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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Apr 02. 2021

사라진 것들을 위한 (2)

좋았던 기억만.

"운명 같은 만남, 그렇다면 그다음은 어땠을지 정말 궁금했어요. 오늘은 함께해서 좋았던 시간, 행복했던 시간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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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건 없어요. 그냥 누구나 겪는 그런 따분한 사랑 이야기일 뿐이에요. 왜, 다들 그런 경험 있잖아요. 그때는 미치도록 설레고 짜릿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면 내가 왜 그랬지 싶을 정도로 사소하게만 느껴질 때요. 그 사람과 제가 겪었던 일들도 다르지 않았어요. 요즘은 원래 사랑이 그런 건가 싶은 생각도 드네요. 그때처럼 시도 때도 없이 '쿵쿵' 거렸다가는 제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결국에는 사랑에 무덤덤해졌다는 이야기를 너무 장황하게 풀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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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경험한다고 해서 그 일이 특별하지 않다거나, 혜윤 씨가 말한 것처럼 '따분한'일이 되는 건 아니에요. 일례로 아이를 향한 부모의 사랑을 생각해 볼까요? 전 인류의 대부분은 아이를 가져요. 사랑의 결실로요. 그리고 대부분이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죠. 어쩌면 모성애와 부성애란 어쩌면 지구에서 가장 흔해빠진 감정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도 모두 특별하지 않고, 그저 따분한 일이 되는 걸까요? 절대 그렇지 않잖아요. 그리고 모두가 해낸다고 해서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감정에 무뎌지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해요. 혜윤 씨 말대로 그렇게 대책 없이 심장이 뛰어대면 우리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거예요. 그래서 저는 차라리 그런 일련의 과정을 '무르익는다'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뜨거운 햇살이 달콤한 과육으로 변해가는 과정으로요. 혜윤 씨가 사랑에 무덤덤해진 것은, 정말 그 사랑이 보잘것없었거나 그 세기가 약해졌기 때문은 아닐 거예요. 따가운 햇살로 날아들던 사랑이 다른 에너지로 바뀌어 저장된 거죠. 지금 같은 경우에는 추억과 그리움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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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과 그리움…. 두 가지는 왜 서로 떼어놓을 수 없을까요. 그리움과 아픔은 왜 항상 같이 오고요. 추억만 간직하고 싶어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잔인한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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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그리움과 아픔은 꼭 같이 와요. 그리움이 가시가 되어 날아와 혜윤 씨의 가슴께에 꽂혔고요. 우리는 지금 그 가시를 뽑는 중이에요. 구멍 난 자리에 새살이 돋고 고여있던 피가 조금 희석되면, 그때는 우리가 한자리에 앉아 추억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조금은 덜 아프고, 더 아름다운 추억에 관해서요.


두 분은 계속 제주도에서 지냈나요? 용두암에서 재회한 다음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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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그치고, 한라산에 쌓인 눈이 다 녹을 때까지는 제주에 있었어요. 둘 다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정처 없이 제주 이곳저곳을 거닐었죠. 꼭 해야 하는 일도 없고, 하지 않아야 하는 일도 없었어요. 느지막이 일어나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껏 느즈러져 있다가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데, 음… 풍족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동안은 계속 헛헛함을 느꼈거든요. 배는 불러도, 마음은 항상 비어있는 듯한 느낌. 근데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고프지 않았어요. 커피 좋아하시죠? 커다란 빈 셀러에 이번 주에 마실 커피를 한가득 채워둔 것처럼요.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어쩌면 처음부터 있었을지도 모르는 커다란 구멍을 그 사람으로 빈틈없이 채웠던 거예요.


다시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그 사람이 떠나고 난 자리를 다시 채울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라도 피가 철철 흐르는 구멍을 틀어막아 버릴 수 있을까요? 이러지 않기로 했는데, 기쁘고 행복한 이야기만 나누기로 했는데 미안해요. 자꾸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아픈 기억을 후벼 파게 돼요. 상처를 꺼내 두 눈으로 마주하고 아픈 곳을 꼭 한 번 더 찔러봐야만 해요. 매번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네요. 아직은 좋았던 일들만 무덤덤하게 늘어놓을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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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생각보다 가시가 깊은 곳까지 박혀 있었나 봐요. 거의 다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뿌리가 남아서 혜윤 씨의 깊은 곳까지 더욱 파고들었나 봐요. 다 이해해요. 저도 요즘 들어 어딘가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자주 들어요. 혜윤 씨가 그랬던 것처럼 마음이 텅 비어버렸거든요. 이제 제 이야기를 들어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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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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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해부터 첫째 아이가 많이 아팠어요. 거의 병원에서만 시간을 보낼 정도로요. 금방 좋아질 것 같다가 다시 증상이 악화되고, 호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가, 곧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티 없이 밝고 맑던 아이는 점점 초췌해져 갔죠. 그 작은 아이가 파리한 모습을 하고 제게 사랑한다고 말하던 기억이 아직 생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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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지금은 괜찮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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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이는 지난겨울에 제 곁을 떠났어요. 아마 날개를 달고 이 세상을 훨훨 날았을 거예요. 비행기라는 단어만 들어도 신나서 방방 뛰던 개구쟁이였거든요. 설마 눈이 되지는 않았겠죠? 시린 겨울에 떠난 아이가 아리도록 차가운 눈송이가 되어 벌벌 떨고 있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만약 제게 괜찮으냐고 물으신 거라면, 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고 비슷한 또래 아이들만 보면 깜짝깜짝 놀라요. 아이가 다니던 학교를 지나치기 싫어서 30분을 넘게 빙 돌아 출근을 하고요. 전혀 괜찮지 않아요. 차라리 평생 괜찮지 않기를 바라기도 해요. 아이를 잃고도 금방 괜찮은 부모는 얼마나 못난 부모게요.


아까도 말했지만, 혜윤 씨도 당연히 많이 아플 거예요.  그래야 하고요. 혜윤 씨가 이상한 게 절대 아니에요. 혜윤 씨가 몹시 아픈 건, 그만큼 그분을 사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양팔을 들고 한 번 휘저어봐요.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지 않나요?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이야기 나눠요. 그때는 정말 좋은 기억만 가지고요."





"같이 방콕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정말 무더웠던 어느 날에요. 아마 쏭크란 직전 즈음이었을 거예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뜨거운 방콕 도심 한가운데를 헤매던 기억이 나요. 땀이 등판을 다 적셨고, 그늘을 나서기만 해도 현기증이 막 났어요. 굳이 방콕에서까지 그 고생을 한 건, 제가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어요.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돈도 정말 조금, 심지어는 핸드폰도 가져가지 말자고 했거든요. 옛날 기분을 좀 내보고 싶어서요. 5박 6일 여행이었는데 둘이 합쳐 3,000바트만 환전해갔으니 말 다했죠.


아무튼, 그렇게 무더위 속에서 헤매다가 제가 '픽'하고 쓰러졌어요. 다오카농이라는 아직 여행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시장 근처였을 거예요.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어요. 팔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적당히 선선한 에어컨 바람이 땀을 완전히 식힌 후였죠. 깨어나자 마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해지는 거예요. 핸드폰도 없었는데 누가 나를 병원까지 데려왔을까, 하필 큰길에서 한참 떨어진 지역이라 택시도 찾기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내가 병원에 와 있을까.


마침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고 말해주더라고요. 그러고서는 침대 아래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피식 웃는 거예요. 그제야 허리를 일으켜서 침대 아래를 봤죠. 차가운 바닥에 그 사람이 누워있었어요. 신발을 한쪽만 신은 채로, 신발이 벗겨진 발에는 상처가 가득한 채로요. 이제 막 잠이 들었다고 했어요. 오 분 전까지 제 손을 맞잡고 눈물을 훔치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다고.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요. 정신이 혼미해지는 뙤약볕 아래서, 자기 발에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병원을 찾아다녔는데.


막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흘러내리고 또 흘러내려도 자꾸만 눈가에 눈물이 고였어요. 결국에는 꺼억꺼억 흐느끼며 엉엉 우는 지경이 되었죠. 울음소리에 놀라 그 사람은 벌떡 일어났어요. 황급히 가방을 뒤적이더니 손수건을 건네더군요. 눈이나 좀 더 붙이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그에게 물었어요. 그가 바보처럼 환하게 웃으며 답했어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어찌어찌 달리다 보니까 병원이 보였다고, 신발이 없어진 것도 당신을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알아챘다고.


그이 발바닥에 생긴 상처는 두 해가 지나도록 아물지 않았어요. 저는 그 상처를 마주할 때마다 정말 아팠는데, 자기는 상처가 평생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고마운 상처라고, 조금만 더 깊었으면 당신을 업고 병원까지 가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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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사랑의 힘이었네요. 아픔을 가볍게 이겨낼 만큼 강인한 사랑의 힘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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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딱지가 아직 굳지도 않은 맨발을 이끌고 긴급 송금 서비스를 받으러 대사관을 찾아가던 그는 정말 지독하리만큼 미련한 사람이었어요. 만약 그 미련의 원동력이 사랑이었다면… 그는 왜 저를 사랑했을까요?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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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되지 않아서 사랑이라고 한다면, 너무 뻔한 대답이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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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되지 않아서 사랑…, 그렇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람은 제게도 분명 사랑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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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건 분명 사랑이었을 거예요. 그럼 태국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난 거예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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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제가 또 고집을 부려서 그다음 날 퇴원했어요. 그리고 부지런히 돌아다녔죠. 그 사람은 어디선가 커다란 우산을 사 들고 와서 항상 제 옆에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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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고도 설레는 이야기네요. 하나만, 딱 하나만 더 얘기해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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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제가 저녁 약속이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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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요? 아, 벌써 시간이 다 됐군요. 그럼 남은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해주세요. 덕분에 설레는 한 주가 될 것 같아요."





"블라디보스톡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다른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기 위해 잠깐 들른 도시였죠.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로,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레부르크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북유럽으로 넘어갈 예정이었어요. 3등석 기차표를 예약하고, 긴 여행 동안 필요한 물건들을 찾아 도시 이곳저곳을 헤맸어요. 짬짬이 시간을 내서 바다를 보기도 했고요. 게다가 아직 봄기운이 다하기 전이라, 여행의 설렘이 배로 차올랐어요.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에는 한가로이 혁명 광장을 거닐었어요. 느긋하게 광장을 한 바퀴 돌고 바다를 잠깐 바라봤다가, 다시 느긋하게 광장을 걷기를 반복했죠. 정말 모든 것이 완벽했어요. 따스한 햇살과 고소한 빵 냄새,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까지…. 지금블라디보스톡의 그 광장을 떠올리면, 산뜻한 기운이 스며요. 그리고 그날, 그때 그 사람의 얼굴을 저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해요. 몽롱한 분위기 사이로 문득문득 보이던 그 사람의 얼굴을요. 행복에 겨워 눈을 지그시 감고 웃음을 짓던 그 사람의 얼굴을요.


그의 표정을 마주한 순간, 여행을 멈추고 얼마간 여기서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적당히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곳을 이 사람과 만끽하고 싶다, 온 지구를 쏘다녀도 이런 곳을 다시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모두가 횡단 열차를 타기 위한 중간 기착지 정도로 생각하는 도시인데, 둘 다 취향 참 특이하죠?


하지만 뭐 당연하게도, 그럴수록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렀어요. 나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고, 기차를 타야 하는 날이 온 거예요. 새벽부터 일어나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짐을 쌌어요. 짐을 싸면서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요. 아마 서로의 얼굴에 이곳을 떠나기 싫다고 진하게 쓰여있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표를 다 끊어 뒀는데 어쩔 수 있나요.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서운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배낭을 메고 기차역으로 향했어요. 여전히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기차역에 다 와서는 티켓을 확인하고, 터덜터덜 플랫폼까지 걸어갔죠. 시간은 왜 잠시라도 천천히 흐르지 않는 건지, 금방 기내방송이 울려 퍼지더라고요. 곧 기차가 들어오니, 서둘러 탑승을 준비하라고.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마가 굉음을 뿜으며 플랫폼에 멈춰 섰어요. 분주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서둘러 기차에 올라탔고요.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하는 열차니까 조금 오래 멈춰 서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차장은 매정할 정도로 순식간에 문을 닫았어요. 다시 '덜컹덜컹', 철마가 대륙을 가로지르며 나아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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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스크바까지 가신 거예요? 뭔가 조금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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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우리는 기차를 타지 않았어요. 그 자리에 가만히 얼어붙어서 그냥 멍하니 기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봤어요. 여전히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냥 가만히 서서 굉음을 내뿜는 기차를 바라볼 뿐이었죠. 기차가 역을 완전히 빠져나가고 나서야, 대륙을 가로질러 아득히 먼 곳에 찍힌 점이 되고 나서야 우리는 움직일 수 있었어요. 가장 먼저 고개를 들어 그이의 얼굴을 바라봤어요. 며칠 전 혁명광장에서 봤던 표정의 그의 얼굴에 있었어요. 행복에 겨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 웃음을 짓는 표정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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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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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시내로 나가서 한 달 동안 머물 숙소를 잡았어요. 한 달이 지난 다음에는 다시 한 달을 머물 숙소를 찾아 헤맸고요. 그렇게 넉 달이 넘게 블라디보스톡에 있었네요. 봄기운이 다하고, 여름이 오고, 서늘한 가을의 분위기가 도시 곳곳에 가득 차오를 때 까지요.


지금은 뭐,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기억일 뿐이지만요. 이런 기분 좋은 기억들도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겠죠? 완전히 잊어버려서 다시는 떠올릴 수조차 없는 다른 어떤 날의 기억들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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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지도 모르죠. 다만 확실한 건, 오늘을 계기로 블라디보스톡에서의 기분 좋은 기억이 조금은 더 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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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군요. 아주 오래도록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 생명이 다하는 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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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도록 남을 거예요. 그게 기억의 힘이잖아요. 기억하면 할수록 더욱 견고 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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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사라진 기억은 어쩌죠? 먼지에 가려져 완전히 잊힌 기억은요? 사라진 기억을 위해 아니, 이미 사라져 버린 모든 것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미안해서요.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많이 아프다는 핑계로 내팽개쳐 버린 모든 것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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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오늘은 아직 남아 있는 좋은 기억들을 잊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봐요. 그리고 또 그리면서 그 기억들이 휘발되지 않도록 한번 애써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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