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영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불이 반쯤 꺼진 담배꽁초를 화단으로 휙 던졌다. 바삭한 낙엽 사이로 빨려 들어간 불빛은 얼마간 희미한 연기를 내뿜다가 곧 조그만 불꽃을 만들었다. 아영은 덤덤하게 낙엽을 짓이겨 불을 껐다. 새하얗던 신발코가 거무스레하게 그을렸다.
녹이 잔뜩 슨 철제 대문이 '삐거덕삐거덕'소리를 내었다. 아영은 가죽이 반쯤 벗겨진 소파에 앉아 성긴 문틈을 쏘아봤다. 문밖에는 아직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10년도 더 된 포르쉐를 꼴에 스포츠카라고 으스대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아영은 잠깐 웃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얼굴이나 목소리 따위를 기억할 수는 없었다. 아영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민수와 찍은 사진 몇 장을 바라봤다. 시각세포로 전해진 몇 가지 정보는 시신경을 교차해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기억보다,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사람이 민수라고 생각하니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2017년 겨울이었다. 한겨울 캠퍼스의 분위기란 별의별 따분한 것들로 찌들어 어지간히 침침했다. 주광색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중앙도서관 열람실도 공기가 텁텁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곳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아영이었다. "혹시 라이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민수는 푹 꺼진 눈을 비비며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아영도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바람은 찼고, 텅 빈 캠퍼스는 넘치도록 호젓했으며, 두 사람은 언제나와 같이 쓸쓸했다.
그 후로도 둘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이 담배를 피웠다. 하지만 먼저 담배를 피우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명이 나가면 그 뒤를 다른 사람이 쫓을 뿐이었다. 안 그래도 울적한 공기에 반투명한 연기와 수증기가 뒤엉켜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었다. 그리고 그 얄궂은 분위기는 언제부터인가 그들을 한 곳에 가뒀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이 꿈속에 갇힌 것이었다. 우리는 종종 '차라리 꿈이었으면…' 한탄하곤 하는데, 여러모로 꿈보다는 현실이 나은 법이다. 꿈과 환상에서 깨어나는 순간의 숙취를 생각하면 말이다.
며칠째 몽환에서 깨어나기만을 반복하던 두 사람은 어느 한순간,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허물어졌기에, 돌아갈 곳도 가야 할 곳도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즈음의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했다. 공기는 차갑고도 흐릿했으며, 1월의 캠퍼스 안에서 생기를 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중지와 검지 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온도와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찾아오는 묘한 기시감뿐이었다. 민수와 아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기묘한 느낌을 사랑으로 정의했다. 그 무엇도 아니어서, 마지막으로 남은 감정이 사랑이어서 하릴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투명해진 것도 한겨울의 일이었다. 예년보다 따뜻했기 때문일까, 민수와 아영은 극성스런 열병에 시달렸다. 실제로 둘의 두 뺨은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있었기에, 그들이 단순히 마음의 열병을 앓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어쨌거나 둘은 한동안이나 앓았다. 첫 봄밤이 찾아오고, 마지막 봄눈이 내릴 때까지도 두 사람은 넘을 수 없는 벽을 쌓고 그 안에 자신을 가뒀다.
무엇 때문에 이태 동안의 사랑이 흔적도 없이녹아내렸는지, 이 글에서 밝힐 수는 없다. 사실 필자도 그 까닭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해 2월부터 아영은 가벼운 해리성 장애를 겪었는데, 무슨 일인지민수도 그즈음부터 아영에 관해서라면 입을 꾹 다물었다. 아영의 기억 상실 때문에 둘 사이가 멀어진 것인지, 아니면 서로 간의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아영이 기억을 잃은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그 누구도 그 순서를 밝혀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이 글은 다시 처음으로, 그러니까 아영의 나지막한 혼잣말 속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2020년, 그리고 2021년의 추위 속에서 무엇이든 찾아내야 한다.
아영은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존 레전드의 2집 앨범, Once Again CD를 플레이어에 꽂아 넣고 우두커니 거실에 앉았다. 익숙한 멜로디가 허전했던 방안을 가득 채웠다. TV 옆에는 민수와 같이 찍은 사진 몇 장이 싸구려 액자에 들어있었다. 아영은 사진 한 장, 한 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1. 합정동 앤트러사이트 두꺼운 옷차림으로 보아 겨울인 듯함 셀프 카메라.
2. 배경 알 수 없음 (민수의 집일지도?) 민수와 내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우리 언니 사진을 찍은 사람 알 수 없음.
3. 해외, 아마도 베트남 (내가 베트남에 가본 적이 있던가?) 한여름 옷차림 움푹 파인 그의 눈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찡그리듯 웃는 나.
4. . . .
아영은 한숨을 내쉬며 노트를 덮었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노트를 들췄다. 눈물 자국으로 잉크가 희미해진 맨 앞장에는 알 수 없는 그림이, 다른 페이지에는 오늘 적은 내용과 비슷한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별다른 소득 없이 노트를 서랍에 집어넣는데, 서랍 맨 끝에 오래된 편지 봉투 하나가 있었다. 아영은 낯선 세계에서 날아온 듯 생경한 느낌이 드는 봉투를 열어 편지를 펼쳤다. 2019년 여름, 민수가 아영에게 보낸 편지였다. 아영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첫 장부터 천천히 편지를 읽었다. 하지만 다섯 장을 빼곡히 채운 편지를 모두 읽을 수는 없었다. 힘없이 갈겨쓴 글씨체가 왜인지 거부감이 들었거니와, 내용이 너무 진부해서 차마 끝까지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영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편지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봉투의 끄트머리에는 지나치게 오글거리는 문장 하나가 적혀있었다.
'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민수가.'
다리에 힘이 풀린 아영은 의자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몇 달 동안 그리던 민수는 그저 따분한 20대 초반 남자애였을 뿐일까. 끝없이 밀려오는 허무함과 회의감 같은 것들을 이겨내지 못한 아영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존 레전드의 목소리는 절정을 달렸다. 그는 자꾸만 공원으로 가자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자고 부르짖었다.
문밖에서 시끄러운 엔진음이 울려 들었다. 아영은 귀에 익은 굉음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찬바람이 몰아치는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민수도, 민수의 포르쉐도, 온종일 민수만을 가리키던 기억도. 희미한 눈발이 바람 따라 이리저리 휘날렸다. 아영은 눈을 마시려 입을 크게 벌렸다. 아직 다 낫지 않은 열병 탓인지, 얼음 결정들은 아영이 내뿜는 열기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갔다. 이제는 번뜩이는 차가움으로도 꿈에서 깨어날 수가 없다.
미처 닫지 않은 문 틈새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CD는 어느새 한 바퀴를 다 돌아 다시 1번 트랙, '세이브 룸'이었다. 하지만 노래 가사와 달리, 아무리 기다려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아영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그를, 그가 남긴 흔적들을 더는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아영은 이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기억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을 그리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돌고 돌아 원점, 그러니까 다시 깨어날 수 없는 꿈속이다.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면 이미 끝에 다다른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아영은 지금 이 기묘한 느낌을 종말로 정의하기로 했다. 말 그대로 아직 꿈속이고, 현상의 맨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