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훈이 쓰러진 직후, 최 이사와 손 과장이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최이사의 한쪽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손 과장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침방울을 튀어가며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슬로모션이 걸린 것처럼 지나치게 낮고 느렸다. 기괴한 극저음을 뱉어내며 얼굴을 찡그리는 그는 한 마리의 괴물 같기도, 자식을 눈앞에서 잃고 울부짖는 부모 같기도 했다. 그들이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남수단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라면, 상훈의 말이 맞다. 우리는 정말 좆됐다. 뒷골이 서늘하게 땅기며,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흘렀다. 이제야 손 과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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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수, 김상훈. 당장 따라 나와!"
상훈과 내가 남수단으로 떠난 건, 퓨쳐닙스라고 불리는 전설의 슈퍼푸드 때문이었다. 퓨쳐닙스는 미 정부의 지원 아래 컬텍 생명공학 연구소와 문산토사가 공동연구하여 개발한 GMO 식품이다. 퓨쳐닙스 농축액을 물과 잘 배합하여 가공하면 각종 단백질과 비타민, 무기염류를 원하는 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 게다가 퓨쳐닙스는 아주 소량의 물과 영양분, 심지어 바닷물만으로도 충분히 잘 자라서 어디에서든 재배가 가능하다. 빈국의 영양실조와 사막지대의 비타민 부족을 동시에 해결할 수도, 미국에 어마어마한 식량 패권을 안겨줄 수도 있는 말 그대로 슈퍼푸드인 셈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2012년 이후로 퓨쳐닙스의 연구와 생산은 모두 중단되었다. 시민단체에서는 GMO 식품의 심대한 부작용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연구가 중단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 정부는 단순히 개발비의 부족이라고 해명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퓨쳐닙스는 한동안 수많은 음모론을 자아내며 세상을 들쑤셨다. 처음으로 재배 실험이 이루어진 캘리포니아 농지에 괴생명체가 등장했다는 소문부터, 연구에 참가한 다국적 연구원들이 CIA에 의해 하나둘씩 살해되고 있다는 소문까지. 당연히 이러한 주장 중에 사실로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동시에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을 만한 근거 역시 하나도 없었지만 말이다.
어떡해서든 퓨쳐닙스를 구해오라는 최이사의 닦달에 못 이겨 상훈과 나는 지난해 7월 남수단으로 향했다. 우리는 두바이를 경유해 에티오피아로, 에티오피아를 경유해 우간다로, 우간다에서 곧장 지프를 빌려 남수단의 수도인 주바로 밀입국했다. 남수단은 퓨쳐닙스의 2차 경작지로, 2009년부터 연구가 중단될 때까지 활발히 생산이 이뤄졌다고 한다. 어쩌면 남수단이야말로 퓨쳐닙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일지도 모른다. 가장 많은 양이 남수단에서 생산되었고, 흔적을 지우기도 여의치 않은 곳이니까. 하지만 한국의 일개 식품회사에 근무하는 우리가 남수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주바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여행금지 국가의 쓴맛을 제대로 느꼈다. 손 과장이 적어 준주소에는 연구소가 아닌 롤렉스라는 우간다 음식을 파는 노점이 있었다. 미리 연락해둔 전문가들은 전문가라기보다는 아는 체하기를 좋아하는 지역 유지에 불과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머리 위로는 해가 기울었다. 우리는 하릴없이 마땅한(값비싼) 곳에 숙소를 잡고 며칠간 방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내전 중인 국가를 한가히 관광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라면 퓨쳐닙스의 흔적은커녕, 퓨쳐닙스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조차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가 열흘이 넘는 칩거를 끝내고 바깥구경을 나선 까닭은, 오로지 챙겨 온 음식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다시 우간다로 데려다줄 브로커는 집에 일이 생겼다며 열아흐레 후에 국경에서 만나자는 말만을 남기고 급히 떠났다. 그가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기는 했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를 만나 일정을 당겨 귀국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살아남으려거든 한 번은 밖으로 나가야 했다. 시장이든 식당이든 바깥공기와 이질감이 느껴지는 남수단 사람들을 직접 마주해야만 했다.
우리는 숙소 직원이 그려준 약도를 손에 들고 시장으로 향했다. 그나마 오래 보관이 가능한 바나나를 잔뜩 사서 돌아올 작정이었다. 이따금 울리는 총성과 불쾌한 시선을 뒤로하고 곧장 시장으로 달렸다. 다행히 시장은 내가 익히 아는 그 시장이었다. 콜라 열매와 카사바, 얌 등등 생전 처음 보는 식물들을 구경하며 시장을 거닐었다. 나는 여행 금지 국가도 똑같은 사람 사는 곳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상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봤다. 상훈이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나는 상훈의 이름을 외치며 커다란 시장을 몇 바퀴나 달렸다. 사람들은 동물원에라도 놀러 온 양, 소리를 꽥꽥 내지르는 동양인을 바라보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이대로 상훈이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두려움과 서러움의 눈물이 쏟아질락 말락 아찔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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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야 찾았어. 찾았다고!"
상훈은 내 손을 잡고 시장을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과일과 묘목을 지나쳐 작은 토분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상훈은 작은 토분 하나를 가리키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냐고 소리쳤다. 정말 잎사귀의 모양과 크기가 퓨쳐닙스와 비슷했다. 나는 주인에게 귓속말로 이게 퓨쳐닙스가 맞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우리를 한참 훑어보더니, 수도의 가장 큰 시장에서 어떻게 퓨쳐닙스를 팔겠냐고 비웃으며 답했다. 주인은 이 기괴하게 생긴 식물이 바로 스피랄리스라고 했다. 종종 얼뜬 외국인들이 퓨쳐닙스로 오해하고 사가곤 한다고.
상훈은 얼굴을 감싸 쥐고 연신 한숨을 뱉어냈다. 어지간히 들떠 있던 모양이다. 주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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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쳐닙스를 구하고 싶으면 북서부 아웨일로 가 봐. 아직 퓨쳐닙스를 취급하는 판매상이 있다고 들었어."
흐리멍덩한 상훈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웨일은 내전의 여파가 심한 곳은 아니라 주바보다 훨씬 더 안전했다.
우리는 숙소 주인의 도움을 빌려 곧장 아웨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몇 번이나 심문을 당했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반군은 10달러 지폐 한 장, 정부군은 두 장이면 친절한 경호원이 되어 다음 체크포인트까지 우리를 호위했다. 그들은 모두 일정한 규칙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웨일에 도착한 시각은 늦은 새벽이었다. 발품을 팔아봤지만, 중소도시 아웨일에는 마땅한 숙소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무릅쓰고 배낭여행자인 척 위장해서 국경 없는 의사회 숙소를 찾아갔다. 다행히 선한 마음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특히 이모뻘인, 한국인 박 간호사님의 도움이 컸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해가 질 때까지 아웨일 시장을 돌아다녔다. 소매치기를 몇 번 만났으나 주머니에 돈이 될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AK소총을 난사해대는 반군도 오늘 새벽 뇌물로 이미 안면을 튼 사이라 오히려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행의 긴장감도 이제 막 사라지던 중이라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퓨쳐닙스를 찾을 수 없었던 것만 빼면.
아웨일 곳곳을 뒤져봐도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무지개의 끝을 쥐는 것이 더 현실성 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상훈과 나는 숙소로 돌아가서 이제 포기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브로커가 국경으로 돌아올 날짜를 셌다. 무언가 빼먹은 것이 있는 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조금 찝찝했다. 순간, 상훈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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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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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든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 보고하라던 최이사의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소정의 후원금을 지불하고, 사무실의 위성전화를 빌렸다. 9시 그러니까, 한국 시각으로새벽 3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최 이사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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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신데, 새벽부터 전화를 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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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 김민수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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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래. 찾은 거야? 찾은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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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 남수단 곳곳을 뒤져봐도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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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딴 소리나 하려고 새벽부터 전화를 건 거야? 찾기 전까지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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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최 이사는 퓨쳐닙스를 먹고 싼 똥이라도 찾아오라며 역정을 냈다. 우리가 퓨쳐닙스를 찾아온다고 해서 회사 사정이 바뀔까. 연구가 중단된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을 텐데.
문밖에서 '삐걱'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상훈은 나와 눈을 마주치고서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나는 천천히 문고리를 당겼다. 문밖에는 박 간호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초리가 차고 날카로웠다. 그녀는 대뜸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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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내용을 다 들어버렸네요. 무슨 소리죠? 퓨쳐닙스라뇨. 사실대로 말해봐요. 그렇지 않으면 경비를 부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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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할 수 없이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 늦은 시각, 숙소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멀쩡히 내일 아침을 맞이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상훈과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침방울의 수가 늘어나는 만큼, 그녀의 표정은 굳어져 갔다. 결국, 그녀는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우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서둘러 자리를 옮기자고. 그녀는 우리를 끌고 복도를 지나, 자신의 방으로 갔다. 방에 들어가서는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한참이나 주변을 둘러보더니, 블라인드를 내렸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위스키를 몇 모금 삼키고 나서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퓨쳐닙스 연구 개발은 부작용 때문에 중단된 것이 맞다고 했다. 퓨쳐닙스를 장기 복용할 경우 암은 물론이고, 불임, 만성두통, 그리고 심각한 인지장애를 일으킨다고 했다. '인지장애'라는 단어에서 왠지 모를 불길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국경 없는 의사회에서 그 인지장애를 퓨쳐닙스 디멘시아라고 부른다고 했다. 상훈은 화들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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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시아면 치매 아닌가요?"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퓨쳐닙스 디멘시아의 증상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퓨쳐닙스를 장기 복용하면 높은 확률로 퓨쳐닙스 디멘시아에 걸리고, 그 증상은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하고 끔찍하다고 했다. 평상시에는 정상처럼 보이지만, 피곤하거나 영양부족 상태가 되면 이성을 잃게 된다고. 그 정도가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면, 퓨쳐닙스 나아가 모든 초록잎 식물에 강한 집착을 하게 되는데, 굶주림의 정도가 심해지면 사람을 물어뜯기도 한다고….
상훈과 나는 동시에 같은 단어를 떠올렸다.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우리와는 아주 동떨어진 두 글자 단어. 그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말을 이어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알겠는데, 엄밀히 말하면 좀비는 아니에요. 영양분이 충족되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고, 오직 퓨쳐닙스를 섭취한 사람에게만 일어날 뿐 전파되지는 않으니까요."
이제야 미지의 식물 퓨쳐닙스에 대한 윤곽이 어렴풋이 잡혔다. 그녀는 한숨을 크게 쉬고,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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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단 북동부에 말라칼이라는 마을이 있어요. 퓨쳐닙스의 마지막 피실험 도시였죠. 퓨쳐닙스의 부작용을 발견한 연구진들은 서둘러 말라칼에 퓨쳐닙스 공급을 중단했어요. 그다음은 어떻게 됐을까요? 가난이 당연시되던 내전 국가의 사람들이, 절대 가난해서는 안 되는 상태가 되어버린 거예요.
딱 일주일이 걸렸어요. 대규모 동족 포식이 일어날 때 까지요. 첫 일주일에는 인구의 절반인 7만 명 정도가 사망했어요. 그제야 미 정부와 남수단 반군은 협의 하에 말리칼을 통제하기 시작했죠. 도시를 봉쇄하고, 헬기로 도시 안에 음식을 뿌렸어요. 도시는 금세 안정상태를 찾은 것처럼 보이더군요. 적어도 어떤 미친놈이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해내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나와 상훈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등골이 서늘했다. 가난 해결을 위해 개발된 식물이지만, 가난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으면 그곳은 살육의 현장이 된다라…. 하지만 이 소설 같은 이야기의 끝은 아직 끝을 달리기 전이었다. 이야기는 이제 막 클라이맥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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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군 지도자인 일명 제임스가 생각이란 걸 했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진작에 남수단에도 평화가 왔을 텐데…. 아무튼 그는 생각했죠. '이런 식으로는 절대 퓨쳐닙스의 부작용을 해결할 수 없다. 이미 결말이 정해진 비극을 1막이 끝나기도 전에 중단했을 뿐이다…'라고.
그래서 그가 뭘 했는지 알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식량 제공을 멈춰버린 거죠. 그는 깨달은 거예요. 말라칼 사람들이 모두 죽기 전까지는 퓨쳐닙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다시 한 주가 지나니까 인구가 3만 3천 명이 됐어요. 다시 절반이 죽은 거죠. 그다음 주에는 만 5천 명이 남았고, 그다음에는 7천 명쯤. 지금은 말라칼 안에 몇 명이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해요. 소문을 듣고 퓨쳐닙스를 찾아 말라칼에 오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리기 시작했거든요. 요즘은 경비가 조금 느슨해졌다고는 하지만,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말라칼에 가겠어요?"
다음 날 아침, 나와 상훈은 내 나이보다 더 오래된 도요타 지프 위에 있었다. 부디 말라칼에는 갈 생각도 하지 말라고, 들어가기도 전에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고 박 간호사가 애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은 뻔한 이야기다. 겁이 났지만, 피가 끓었고 끓는 피가 솟구쳐 무모한 결정을 내렸다. 최이사의 닦달도 어지간했지마는, 미지의 식물이 우리의 호기심을 어지간히 자극했던 모양이다. 특히 식물유전공학 연구실에서 우리 회사로 이직해온 상훈의 호기심을.
아침 일찍부터 상훈의 작은 눈은 유난히도 반짝였다. 그동안은 서류업무만 하는 머저리로 알고 있었는데, 그는 확실히 전문가였다. 미래 먹거리가 말 그대로 미래 '먹거리'가 아닌 퓨쳐 캐시카우로 알고 부서를 이전한 나 같은 진짜 머저리랑은 달랐다.
말라칼 근처에 다다르자 경비가 삼엄해진 것이 느껴졌다. 곳곳에 반군과 미군,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방역복을 입고 들것을 나르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을 꼽자면,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운 것과 등 뒤에 소총 한 자루가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찰서였던 폐허에 숨어, 도시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생각했다. 자신의 고향이 말라칼이라고, 그 지역 지리를 잘 안다고 하기에 거금을 들이고 고용한 운전사 겸 가이드는 잠시 몸을 피할 폐허를 찾는 것 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군인들과 반짝이는 최신식 총포를 마주하더니 겁을 잔뜩 먹고 홀로 돌아갈 뿐이었다.
경찰서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말라칼로 들어가는 커다란 철문이 있었다. 하지만 굳게 닫힌 저 문을 뛰어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군데군데 전기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어서, 문 앞까지 다다르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철문 왼쪽 아래에는 자그마한 개구멍이 있었다. 폭이 1m쯤 되는 컨베이어 벨트가 개구멍을 통해 말라칼 안팎으로 물건을 날랐다.
우리는 반쯤 부서진 건물 기둥 뒤에 숨어, 말라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출입구를 바라봤다. 컨베이어 벨트로 이따금 큼지막한 자루가 실려 나왔다. 시간을 재보니, 대략 2분 간격으로 자루가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군인들은 자루를 트럭에 옮겨 실었고, 자루 10개가 모이면 어딘가로 떠났다. 자루를 끌고 지나간 자리에는 거뭇거뭇한 자국이 생겼다. 점도로 보나, 색깔로 보나, 풍겨오는 분위기로 보나 그 자국은 분명 혈흔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애써 모른척했다. 정적을 뚫고 상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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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쳐닙스를 꺾으면 검붉은 유액이 나오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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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도 있겠다고 답했다. 이러나저러나 퓨쳐닙스를 꺾어서 검붉은 핏물이 생긴 것이니까. 개구멍으로는 쉴 새 없이 자루가 쏟아져 나왔다. 컨베이어 벨트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예외 없이 2분에 하나씩 자루가 나왔다.
상훈이 가방에서 바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껍질을 깠더니 새하얀 바나나에 검붉은 노을이 묻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바나나를 크게 베어 물었다. 바나나에서 비릿하고 짭짤한 피 맛이 났다. 긴장될 때면 혀끝을 씹는 몹쓸 습관 때문이다. 이미 검붉어진 바나나의 단면에 자꾸 피가 묻어 나왔다. 바나나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남았을 때는, 단면에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검붉은 피가 묻은 바나나 위에 검붉은 노을이 덧씌워져, 완전한 검정이 되었다. 서서히 달이 떠올랐다. 달은 그 어느 곳에서 봤던 것보다 크고 환했다. 우리 집에서 봤던 달과 이 달이 정말 같은 달이란 말인가?
"위잉~ 위잉~"
오전 12시 45분, 사이렌이 울려서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문 쪽을 바라보니, 경비들이 교대를 시작했다. 그들은 입구에서 짧게 인수인계를 하고 초소 뒤로 사라졌다. 담배를 피우려는 것 같았다. 바쁘게 움직이던 컨베이어 벨트도 잠시 멈췄다. 컨베이어 벨트 끝에 간신히 걸친 자루에서 시꺼먼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때다, 싶어서 곤히 잠든 상훈을 흔들어 깨웠다. 상훈은 습관적으로 기지개를 켜며 신음을 내다가, 화들짝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개구멍을 가리키고 나지막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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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데?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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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눈빛이 몽롱한 상훈의 뺨을 양손으로 툭툭 쳤다. 그의 눈빛에 점점 결의가 차올랐다. 나는 상훈에게 신호하고 먼저 문 앞으로 냅다 달렸다. 상훈은 바지춤을 부여잡고 어정쩡하게 내 뒤를 따라왔다.
개구멍 입구에 걸려 있는 자루를 바닥으로 빼냈다. 한껏 예민해진 감각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느낌을 제멋대로 해석했다. 방금 자루 안으로 만져진 것은 분명 발목이었다. 허리를 숙여 구멍으로 들어가자,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상훈도 곧 구멍으로 들어오더니, 헛구역질을 해댔다. 심장이 뛰었다. 그냥 평상시처럼 뛰는 게 아니라, 폭발할 듯 크게 요동쳤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말라칼을 바라봤다. 아니, 세상을 봤다. 거기에는 분명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