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간에

알리바이-안드레 애치먼

by 김솔솔

지난해 마지막 일주일은 조용한 연말 휴가로 보냈다. 몇 년 전처럼 가족, 친구, 지인들과 함께 송년파티를 하지는 못했지만 인연이 닿은 사람들과 소박한 식사를 나누고, 내년에는 좀 더 자주, 거리낌 없이 만나고 어울리기를 소망했다.


지구의 자전 한 바퀴를 더해 2021년에서 2022년으로 넘어왔다. 세상은 여전했다.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는 강화된 상태에서 연장되었고, 방역 패스는 만료일을 앞둔 사람들이 해당 앱에 접속했을 때 '딩동'으로 알람이 울릴 거라고 했다. 대선을 몇 달 앞두고 대선 후보들의 서로에 대한 비방과 자화자찬도 여전했고, 밤사이 누가 죽고, 누가 살았다는 사건 사고 소식도 넘쳐났다.

모두가 스마트폰 뉴스와 SNS를 통해서 접하는 세상이었다. 새해 첫 근무지는 집이니까. 혼자 업무 하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쉬는 시간을 보내다 책상 한 구석에 던져둔 책을 집어 들었다. 알리바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원작 소설의 저자 안드레 애치먼의 산문집이다. 책의 서문에 밝힌 작가님의 메시지가 마음을 흔든다.



이 책은 유대계 이민자였던 작가가 마음의 고향을 찾아 떠도는 상실의 시간을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회고한 글다. 자전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작가는 소설가이며 뉴욕대에서 문학이론과 프루스트 강의를 하고 있다. 프루스트를 가르친다는 대목에서 예상할 수 있다. 안드레 애치먼이 프루스트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것을. 이 세상과 인물의 내면이 만나는 섬세하고 치밀한 심리묘사 속에서 아주 작은 소재 하나도 얼마나 풍성하게 되살아나는지, 독자도 맘껏 경험하고 즐기게 된다. 이 세상이 내가 경험한 것의 토대 위에 전혀 다른 결로 얼마든지 각색될 수 있다.





라벤더_"삶은 어딘가에서 라벤더 향으로 시작한다."

처음 면도를 하고 애프터 쉐이브 로션을 바르던 17세 소년이 41세의 현재를 거쳐, 아직 살지 않은 80세까지 라벤더 향과 이를 베이스로 한 제품, 사람, 장소로 가득 찬 또는 가득 찰 이야기를 풀어낸다. 화자를 따라 브래틀가의 고급 약국에서 향수 시향을 하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시향지에 코를 스치는 장면을 떠올다. 점원이 자신의 손목에 향수를 뿌린 뒤, 저자의 코(작품 속에서는 입술이라고 표현을 했어요)에 갖다 대는 장면에서는 성적인 긴장감도 같이 느낄 수 있다.


한편, 에세이가 감정만 나열한다면 자칫 감정과잉으로 지루해질 수 있는데, 이 책은 지적 탐구가 균형감을 이루고 있다. 이 에세이에서는 향의 화학적 요소를 문학적으로 근사하게 풀어놓았다. 화자가 나중에 자기만의 향 박물관을 차린다면 원소주기율표의 원소 기호들을 향으로 바꿔 분류하겠다고 한 부분은 독창적이다. 새삼 원소주기율표와 향의 화학식을 떠올리게 된다. 삶이 '피보나치수열'과 같다고 한 부분도. '세 보 전진하면 두 보 후퇴한다는 점에서 인생은 피보나치수열을 닮았다'라고 기록한 부분은 확실히 수포자인 나에게 피보나치수열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한다. 이 얼마나 교육적인 에세이인가.


그러나 이 글은 교육이 목적이 아니다. 이 글은 길을 잃고 떠도는 영혼들에게 자기 삶에 대한 회고적 글쓰기가 영혼의 치유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글쓰기에 매달리고 애원하고 희망하는 모두를 위한 격려 그 자체다.

옮긴이 오현아 선생님은 이 책에 대해서 '시공간에서 표류하는 작가가 쓴 상실과 기억에 관한 글'이라고 해석을 덧 붙였다. 작가님도 서문에 아래와 같이 고백했.


"결국, 내가 좋아하는 건 세상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글을 쓴다는 사실이다."
내 아파트보다는 집에 대한 생각이 즐겁고, 차맛보다는 차에 대한 생각이 더 즐거웠다고. 실제로 고급 약국의 향료 판매원이 어떻든 간에 '내가 상상한' 그녀와 나 사이의 긴장감이 좋았어라고...


안드레 애치먼의 라벤더 한 줄기에는 우리가 살아온 삶, 살지 않을 삶, 쓴 삶, 쓰지 않을 삶 모두가 담겨 있다. 라벤더 한 줄기는 라벤더 향의 원류 그 이상의 훨씬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셈이다. 그 무한한 확장성과 가능성이 우리의 일상을 조금은 다르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평소와 다를 거 없는 월요일이 이 문장 하나로 조금은 달라지는 걸 느낀다. 특별할 거 없는 일상이어도 괜찮아. 쓸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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