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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알 Mar 12. 2024

전공의는 왜 집에 못 갈까?

전공의 이야기 (4) 일상이 된 초과 노동

“집에 안 간다고 생각해야 편해요.

정식 근무 시작을 하루 앞둔 날, 오리엔테이션이라고 모인 자리에서 한 연차 위 선배가 말했다. 전공의는 집에 가지 못하는가? 도대체 무일을 하는가? 수술과, 비수술과의 입장이 다를 것이고, 수술과에서도 진료과별로, 의국별로 차이가 있겠으나 나의 일과는 이렇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핸드폰 화면을 본다. 시간을 확인한다. 잠결에 몇 번은 '5분 후 다시 알림'을 눌렀을 것이다. 실수로 '해제'를 누르는 날도 있다. 6시쯤이면 당직실 여기저기서 비슷한 알람이 울리고 있다. 화장실은 먼저 일어난 사람 차지다. 침대에서 나오면 컴퓨터를 켜고 차트를 띄운다. 입원 환자가 내가 자는 사이 문제가 있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밤 사이 간호기록과 활력징후(체온, 호흡, 혈압, 맥박) 그래프를 본다. 환자마다 오늘 검사가 있는 날이거나 특별히 처치할 게 있다면 메모해 둔다.


가운을 입고 병동으로 나간다. 아침잠이 길어져 못 씻은 날엔 좀 민망하다. 병실을 돌며 환자들을 본다.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통증은 어떠십니까, 제일 힘든 날은 지나갔습니다, 불편한 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퇴원하는 환자이거나 수술하고 2일이 지난 환자라면 드레싱을 한다. 어깨 수술 환자는 침대에 걸터앉게 하고 얼음팩을 풀고 어깨 단추를 푼다. 척추 수술 환자는 보조기를 풀고 옆으로 돌아눕고 상하의를 젖힌다. 통증으로 거동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이 과정은 대개 느릿느릿 진행된다.


환자가 자세를 잡는 동안 소독을 준비한다. 일회용 드레싱 접시를 개봉한다. 멸균 거즈를 까서 놓는다. 소독약이 묻은 솜을 털어놓는다. 멸균 장갑을 ‘무균술 지침에 따라’ 낀다. 일반적인 수술 창상의 경우 베타딘(빨간색)을 사용한다. 수술부위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한번 닿은 솜은 버린다. 중간중간 흐르는 소독액을 닦아준다. 바로 덮지 않고 잠시 기다려야 한다. 베타딘은 마르면서 살균 효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거즈와 드레싱 밴드를 이용해 창상을 다시 덮어준다. 아무리 간단한 드레싱도 정확히 하면 한 번에 5분은 넘게 걸린다. 가끔 수술 창상이 골반, 사타구니, 허벅지 뒤, 무릎, 발 양쪽 여기저기 있는 환자라도 있으면 드레싱이 대형 프로젝트가 된다. 환자마다 2일에 한 번 꼴로 드레싱을 하니까, 내 이름으로 20명이 입원해 있으면 10명을 하는 셈이다. 5분씩 쓰면 드레싱만 50분이다. 아침 세미나가 보통 7시쯤 시작된다. 세미나가 끝나면 수술 또는 외래, 회진 등 본격적인 팀 일정이 시작되므로 그전에 환자 관리를 마쳐야 한다. 환자가 많다면 그만큼 더 일찍 일을 시작했어야 한다.


팀 일정이 외래인 날은 비교적 여유 있는 날이다. 수술은 7시 40분에 시작하지만 외래는 9시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외래 준비가 다 되어있을 때의 얘기다. 대학병원 외래라는 건 항상 오버부킹되어있기 때문에 지연이 용납되지 않는다. 환자가 나가고 들어오는 사이 새 차트를 띄웠을 때, 이 환자가 초진 재진인지, 재진이라면 얼마 만에 온 건지, 수술 환자라면 어떤 수술을 하고 얼마나 되었는지, 오늘은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오늘 예정된 처치가 무엇인지 미리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어젯밤이나 주말에 미리 해두지 않았다면 외래 시작 전까지 이 '차트 리뷰' 작업을 하느라 분주할 것이다.


수술이 있는 날이면 수술방으로 간다. 갱의실(수술장 탈의실을 이렇게 부른다)에 들러 일상복을 탈의하고 뻣뻣하고 얇은 수술복으로 갈아입는다. 갱의실을 지나 무균 구역 표시가 붙은 수술장 문을 열면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살갗을 스친다.

그날 배정된 수술방에 들른다. 환자가 들어오기 전 수술방 세팅을 해둬야 한다. 침대의 종류, 위치, 방향을 확인하고 조정한다. 스크린에 수술에 필요한 영상을 띄운다. 관절경, 견인기 등의 장비를 설치한다. 환자의 포지션을 만들기 위한 기구를 부착한다.

7시 40분이 되면 수술장 입구에 와있는 환자를 수술방으로 데려간다. 수술 부위와 수술 계획을 마취과, 수술간호부와 확인한다. 마취를 돕는다. 마취가 되면 수술을 위한 자세를 잡는다. 척추 수술을 위해 뒤집거나, 어깨 수술을 위해 옆으로 돌아 눕힌다.

포지션이 준비되면 수술할 부위를 노출시키고 소독한다. 절개창을 따라 세균이 침투하지 않도록 겹겹이, 살균비누로 한번, 알코올로 또 한 번, 다시 베타딘으로 한번 보통 세 번을 닦는다. 멸균포로 수술 부위 외의 나머지 신체부위와 침대 주변을 덮는다.

집도의가 절개를 하면 수술이 본격 시작된다. 출혈이 필드를 가리지 않도록 석션하고 거즈로 닦는다. 심부로 접근할 수 있도록 견인기로 피부, 근육을 당긴다. 사람 팔은 두 개밖에 없으므로 장비를 사용하는 수술의 경우 집도의의 또 다른 팔이 된다. 타이밍에 맞게 전기소작기를 가동하거나 절삭기를 갖다 대는 일을 한다. 집도의가 나가면 절개창을 봉합한다. 피부가 아물기 전 세균이 침입하지 않게 멸균 거즈를 대고 드레싱을 덮는다. 필요하면 부목이나 보조기를 대주거나 석고 고정을 한다. 마지막으로 마취를 깨우기 전 X-ray를 찍어 수술이 계획대로 되었는지 확인한다.

수술을 마쳤다는 신호를 환자 머리맡의 마취과에 보낸다. 그러면 약물과 가스를 줄이고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난다. 회복실로 이송한다. 의식은 명료한지, 힘 빠지거나 문제적인 통증이 없는지 확인한다. 그 사이 수술방이 청소가 되면 다음 수술을 준비하고 다음 환자를 데리고 수술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날 잡힌 수술이 끝날 때까지.


그날의 수술이 모두 끝나면 다시 병동으로 가야 한다. 수술한 환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주의사항이나 재활 방법을 교육한다. 아침에 봤던 환자들도 그 사이 별일 없었는지 다시 확인한다. 오늘 새로 입원한 환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다음 수술을 준비해야 한다. 기저력을 확인하고 수술 전에 필요한 검사를 처방한다. 기저력과 검사결과에 따라 관련 진료과에 수술 전후 필요한 사항에 대해 협진을 의뢰한다. 환자를 대면하고 주호소(가장 불편한 게 무엇인지)를 확인한다. 신경학적 검사(힘이나 감각이 떨어지는 곳이 있는지), 이학적 검사(관절 가동범위는 괜찮은지)를 하고 기록한다. 수술에 필요한 영상 검사가 있다면 추가한다. 수술 계획이 세워졌다면 수술과 마취의 과정, 예후, 발생 가능한 합병증, 치료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동의서를 구득한다.


이것이 전공의 일과의 순한 맛 버전이다. 수술 진행이 어려울 정도의 내과적 상태가 확인되어 해당과에 필요한 처치들을 문의하고, 입원했지만 수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환자에게 상황을 해명하는 것. 수술 후에 예상치 못하게 활력징후가 불안정해져서 중환자실에 간 환자를 케어하는 것. 병실이 없어 입원하지 못한 환자에게 연락을 해서 사태를 설명하고 새로운 일정을 조율하는 것 등이 알싸한 양념으로 첨가될 수 있다. 그날 수술을 모두 마쳐야 이런 일들을 할 수가 있는데, 당연히 수술 끝나는 시간이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9시쯤이면 매콤하고, 자정이 넘는 날은 캅사이신이 따로 없다. 번갈아 하게 되는 응급실 당직 근무는 이 일과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전공의특별법이 시행되기 전과 비교하면 지금의 수련 환경은 분명히 개선된 것이다. 100일 당직(신입전공의가 100일 동안 병원에 상주하며 당직을 도맡아 하는 제도) 같은 야만적인 관습은 지금은 전설로만 전해진다. 2016년 법이 제정되면서 수련 시간에 주당 88시간이라는 상한이 생겼다. 휴식 시간도 법적인 의무가 되었다. 하지만 초과 노동은 여전히 일상적이다. 전공의특별법은 실상을 아슬아슬하게 감추는 가림막이 되기도 한다. 법에 기재된 시간에 맞추어, 근태 현황표가 실제 근무 시간과는 상관없이 작성된다. 해뜨기 전 일을 시작해서 수술하고 다음날 새벽까지 일을 해도, 전산상의 '오리알'은 오전 7시 30분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깔끔하게 퇴근한다. 주말이면 알아서 환자를 보고 담당 교수님께 양식에 맞춰 보고하는 것이 일상이지만 이 시간은 모두 오프로 기록된다.


일과를 마치면 당직실에서 씻기 미안한 시간이 되어 갱의실로 다시 내려오곤 했다. 정작 갱의실에 도착해서는 피로감을 못 이기고 구석에 들어가 그대로 누워 자는 날이 많았다. 시간이 없어 깊은 잠을 자는 게 무서운 날이면 일부러 수술장 휴게실에 놓인 안마의자를 찾아갔다. 눈을 붙이고 두 시간쯤 지나면 수술장의 추위에 체온이 떨어지고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저절로 깨어날 수 있었다. 처절했다.


시간이 얼마간 지난 지금에도, 나는 아직 이 시기와 화해하지 못했다. 모두가 치열하게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목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민이 쓰러졌다. '수련'이 시작되고 일주일 된 날이었다.


*지면에 사용된 이름은 가명입니다.




병원, 아플 때나 마지못해 가는 괴로움의 공간. 여기 그곳에 사는 사람이 있다. 병원이 일상인 사람에게 그 곳은 어떻게 느껴질까? 무얼 먹고 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작가는 대학병원 정형외과 전공의, 환자에게 민폐끼치지 않으려, 선배들과 교수님께 혼나지 않으려 발버둥 치다보니 어느덧 치프(최고 연차 전공의)가 되었다. 쉬고 싶다는 마음을 하늘에 들켜버린걸까.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정말로 긴 시간 병가 중이다.


'전공의'라는 존재에 흥미가 생긴 분들이라면, 여기 한 신출내기 의사의 이야기가 솔깃할지도 모르겠다.


(0) ABR. 뭇 전공의들의 꿈을 제가 이루게 되었습니다. / 서문


(1) 의사 일을 한다고 환자 노릇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 MRI 통 안에서


(2) "저는 인턴이고, 테이프를 잘 뜯습니다." / 인턴 의사의 고민


(3) 시커먼 발 어른거리는 밤 / 경쟁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4) 전공의는 왜 집에 못 갈까? / 일상이 된 초과 노동


(5) 대형 병원에 펼쳐진 중력장 / "사람을 더 뽑자"는 말에 대하여


(6) 운수 좋은 날 / 모탈리티 케이스


(7) 진실된 마음이 항상 최선의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 AMA discharge


(8) "잘못되면 의료진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 법의 사각지대, 무연고 시설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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