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하늘이 조금 보이는 날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산책을 하다 류 작가를 마주쳤다.
“시호작가님, 어디 가세요?”
“철쭉 할머니댁 잠깐 가보려고요”
“그럼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할머니 뵌 지 오래돼서… 촬영하러 가야 해서 오래 있지는 못하지만”
“네, 저도 잠깐 인사만 하고 나올 생각이에요.”
할머니는 류 작가를 알아보시지는 못했지만, 어멈(나)이 친구를 데려왔구나! 하고 반가워하셨다.
우리는 커피를 한 잔 대접받고 할머니댁을 나섰다.
“시호 작가님, 할머니가 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보시던데…”
“아무래도 기억이 깜박깜박하시니까요… 나이도 많으시고”
“그럼, 저번에 저희가 가져다 드린 음료도 기억을 못 하시는 거겠네요.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은혜를 갚아도... ”
류 작가는 조금은 충격, 내지는 실의에 빠진 듯 보였다.
“어쩔 수 없지요. 또다시 기억을 만들어 드리는 수밖에는”
“네…”
낙담한 듯한 류 작가는 어깨가 축 처져서 떠났다.
나도 달리 건넬 위로가 없었다.
밑이 빠진 기억의 독에 물 붓기. 낙담할 만하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 우리의 존재는 얼마나 먼지만 한 순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