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페스타 첫날
10.24(금)
페스타 첫날. 비가 말 그대로 엄-청-나게 내렸다. 길에 사람이 없다. 날도 갑자기 추워지고, 억세게 내리는 비로 길가 여기저기 물 웅덩이가 생겨, 차가 부스 앞을 지날 때마다 물보라가 세차게 튀긴다.
엊그제 미리 설치한 부스의 철근에 정 작가님이 선물해 준 '밤 대추 행잉'을 걸어야 하는데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이 '밤 대추 행잉(다른 좋은 이름이 있으면 추천 좀...)'은 전시 며칠 전, 하우스 메이트 정 작가가 선물해 주었다. 평상에 앉아 점심을 먹다 내가 '저희 부스에 밤이나 대추를 주렁주렁 걸어두면 재밌었을 것 같다'라고 이야기를 툭 꺼냈더니 정 작가님이 "그럼 만들어 볼까요?" 하면서 드릴과 송곳을 빌려와, 앉은자리에서 드드드드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에에? 지금 그걸 다 뚫으실 거예요?"
"네, 얼마 안 걸려요."
"아니 그래도 제가 그러면 너무 죄송한..."
"아녜요. 시호님은 밖에 가서 이거 걸만한 괜찮은 나뭇가지 하나 구해주셔요! 튼튼한 걸로!"
"네넷!"
우리 부스의 데코 제작에 저렇게 열심을 다해주시다니, 정성과 노고에 지지 않는 나뭇가지를 구하고야 말 테다.
나는 수풀, 밭, 바다까지 뒤져서야 꽤 괜찮은 녀석을 구했다.
"여기 있습니다!"
자랑스레 나뭇가지를 들어 보이며 안으로 들어섰더니 작가님은 어느새 작품을 반 이상 끝내두셨다. 헉!
"오, 너무 좋은데요??"
신이 붙은 정 작가는 속도가 붙더니 후루룩 뚝딱! 발을 완성했다.
후루룩 뚝딱이라고 말 하지만, 못해도 두 시간은 넘게 대추와 밤을 일일이 뚫느라 고생하신 정 작가님...
실에 꿰어져 반짝반짝, 저마다의 가을 색을 뽐내는 대추와 밤을 보니 감사하고 흐뭇하다.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려 감사와 애정을 보내요, 우리 연꽃 스님 정 작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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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내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았으나 간간히 관객들이 찾아와 옥수수라테, 밤우유 등을 주문한다.
"너무 맛있는데요?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하셨어요?"
은혜를 갚기 위해, 만든 보은 프로젝트라고 하니 다들 오랫동안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할머니들이 너무 좋아하셨겠어요, 이런 프로젝트를 하시다니!”
좋아하셨을까?
'실은 이런 거 없이도, 저희가 그냥 놀러만 가도 좋아하셨어요'라고는 굳이 보태지 않았다.
우리가 할머니들께 드렸던 보은 키트(친절한 옥시시라테 + 깟댐 밤우유+ 대추트루 크래커)를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이 퍼포먼스의 이름은 <안에 계세요?>.
우리가 다시 방문할 때마다 똑똑똑, 하고 문을 두들기고는 "안에 계세요?" 하고 고개를 들이미는 것부터가 시작이었으니까.
비도 비인데 날까지 추워 도무지 오늘은 사람이 더 올 기미가 안 보인다. 정시에 퇴근해야겠다.
오늘은 못 뵈었지만 내일은 할머니들을 직접 모시고 와서 우리의 간판을 보여드려야겠다. “친절한 옥시시 커피” “깟댐 바암 우유” “대추트루 과자” 는 할머님들의 이야기와 지혜에서 이름을 따 만들어졌다고.
부스를 반쯤 마무리해 두고 윤 작가의 <명파 마이크> 연극 공연에 갔다가 어머나! 실로 오랜만에 박봉여 할머님을 마주쳤다. 처음에 따뜻한 밥상을 대접받은 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터라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실 줄 알았 는데, 마주치자마자 “아이고, 밥 먹으러 왜 안 와- 나는 또 서울 갔는가 하고 음청 찾었네~” 하고 반가움에 등을 한참 쓸어내려주신다. 정말이세요? 저희를 기다리셨어요? 저희는 잊으셨을 줄 알았는데.
“잊기는 무슨, 쉰소리를 하냐”며 눈을 흘기시는 할머님. 세찬 빗줄기에 오그라든 추운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와, 오늘 와 저녁 먹으러.”
“네? 오늘 가도 돼요?”
“응, 와. 장국 해 줄게. 저 머리 긴 총각도 같이 와.” 머리 긴 총각이라 함은 류 작가를 일컬음이리라.
사실 저녁시간 최종 회식이 예정돼있었지만 할머님의 밥상은 절대 지나칠 수 없지.
빠르게 1차로 먹고 회식 장소로 이동하기로 한다. 서둘러 자리를 치워두고 할머님 댁으로 향한다.
따님이 택배로 보내줬다는 떡갈비, 바다풀 무침, 미역국, 다시마, 더덕무침, 황대구이, 명태식해, 고들빼기…
변변히 재료를 살 곳이 없어 언제나 헐게 식사하던 우리에게 이런 따뜻한 식탁이 또 언제 있을까.
며칠만 지나면 이 뻘건 직사각형 상다리도 펼칠 일이 없겠구나 생각하니 또 울컥, 하려고 한다. 울컥도 울컥이로되 큰일이다. 은혜를 갚으려 시작한 프로젝트인데 갚는 것은 100중에 겨우 10이나 했으나 마나. 이미 받은 선물 위에 또 얹어 받은 마음만 자꾸만 쌓여간다. 감히 이 은혜를 다 갚고 명파마을을 떠날 수 있다 생각했다니. 울컥하려다 말고 웃음이 피식 나온다.
드디어 내일이 페스타의 마지막 날이다.
류 작가와 나는 스튜디오로 돌아가 열심히 아몬드를 불리고, 껍질을 벗겨내어 속알맹이로 밤 우유용 아몬드유를 제조하는 동시에 마지막 대추 잼을 졸인다. 옥수수라테에 들어가는 커피도 계속해서 내린다.
치이익- 김이 식을 새 없이 돌아가는 에스프레소머신에서 뽑은 스무 샷의 디카페인 에스프레소. 옥수수 향기와 커피 향기가 스튜디오를 가득 채운 가운데 내일을 위한 묵직한 대용량 커피들이 하나둘씩 쌓여간다. 아, 내일이면 정말로 이 팝업 카페도 종료구나.
새벽 두 시. 슬슬 잠이 온다. 할머님들, 내일은 모두 모시러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