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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희 Sep 30. 2022

12화. 이게 바로 저주가 아니면 무엇일까

(장편소설) 저주 딜리버리 프로젝트


바깥은 어두운 창고보다는 따뜻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10월인데 은신처에선 패딩을 입고서도 추웠다. 밖으로 나오기 전 토마토에게 마스크와 모자 하나를 빌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창고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슬쩍 내밀자 오른편으로 토마토네 집이 보였다. 지금 시간이면 토마토도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을 테고 토마토의 아버지도 하우스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쪽으로 난 작은 창문이 있긴 하지만 아마도 화장실 창문일 것이고 불은 꺼져있는 것 같다. 토마토가 오기 전에 먼저 사람다운 몰골을 좀 준비해야 한다. 창고 뒤편엔 토마토가 말해준 대로 커다란 감나무 아래에 낡은 수돗가가 있었다. 나를 여기로 데려오기 전 미리 준비한 모양인지 쓸린 나뭇가지와 낙엽들이 옆으로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고 비교적 새것으로 보이는 세숫대야와 샴푸도 놓여 있었다. 비록 문은 발로 뻥뻥 차면서 들어오지만 이런 섬세한 면도 있구나. 며칠간 제대로 씻지 못한 데다 온몸에 토마토 줄기 냄새가 베여 정체불명의 악취를 풍겼다.


토마토는 나를 여기로 데려오자마자 뒤편에 수돗가가 있으니 날이 어두워지면 나가서 편하게 씻으라고 말해주긴 했지만 밤이 되면 꽤 춥기도 했고 굳이 몸단장을 하고 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젠 이유가 생겼으니 씻어야지. 어젯밤에 나왔다면 좀 더 마음이 편했겠지만 아직 이 쌀쌀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어둠 속에서 씻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낮이어도 얼음장 같은 물에 벌거벗고 몸을 맡기는 일은 유쾌하지 않지만 그래도 해라도 나니까 살 것 같다. 재빨리 샴푸로 온 몸을 문지르고 헹군 후 다시 옷을 챙겨 입었다. 토마토가 수건도 챙겨준 것 같은데 깜빡하고 그냥 나왔다. 입고 있다 보면 마르겠지. 다시 조심조심 창고 입구로 돌아오자 문 손잡이에 종이가방이 하나 걸려있었다. 안을 열어보니 마스크 하나와 챙모자 하나, 그리고 초코바 네 개가 들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가기 전에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가 소파 위에 펼쳐져 있던 이불과 패딩, 쓰레기들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마스크와 모자를 쓴 후 초코바와 핸드폰을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 후 다시 밖으로 나와 집 쪽을 돌아보지 않고 큰길 방향으로 걸어갔다. 스탠드 조명은 끄지 않고 나왔다.


토마토네 농장을 빠져나와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역시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사건의 주인공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지역신문의 기자들도 몇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나름 사람 몰골을 하고 나와서 정말 다행이다. 마스크와 모자를 써도 내 체구 때문에 사람들은 금세 나를 알아봤다. 이건 그냥 기자들의 카메라에 얼굴을 찍히지 않기 위해 마련한 장치일 뿐이다. 나는 어차피 어딜 가든 눈에 띈다. 내가 내 외모를 인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장소는 나 혼자 있는 내 집뿐이다. 그런데 난 그 안식처를 잃었다. 그리고 지금 그곳을 완전히 떠날 준비를 하러 간다. 사람들의 질문과 욕설과 비아냥을 들으면서 고개를 최대한 낮게 들고 집에 겨우 도착했다. 사람들은 말로 나를 공격해도 직접 내 몸 가까이에 다가오진 못했다. 내 체구는 나의 익명성을 보장해주진 않지만 안전성은 분명하게 지켜준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건지는 모르겠다. 대문을 닫자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과 기자들도 잠시 뒤 뭐라 뭐라 투덜대면서 멀어져 갔다. '별것 없네'라고 침을 뱉은 이도 있는 것 같았는데, 아마도 기자일 것이다.


그러네. 정말 별것 없네. 생각보다 간단하게 내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간단할 줄 알았으면 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할 게 아니라 망가졌지만 어떻게든 내 집에서 방법을 찾아볼 걸 그랬다. 그랬다면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토마토에게 신세를 지지도 상처를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말 떠나기로 마음먹은 다음에야 내가 내 집에 돌아올 수 있다는 걸 깨닫다니. 그렇지만 이젠 늦었다. 망가진 집에서 어떻게든 생활할 공간을 마련한다 해도 이곳에선 생활비를 벌 방법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는 토마토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토마토에겐 내가 이곳을 떠나는 일이 중요해 보인다.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모양인데, 그 기대를 바로 저버릴 수는 없지 않나.




인간은 왜 손을 두 개만 가지고 태어난 걸까! 자기 집을 이고 지고 살 순 없더라도 최소한 캐리어 네 개는 끌고 다닐 수 있게 신체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적으로 캐리어 두 개는 너무 작다.


여전히 엉망인 집 안에선 이제 고약한 냄새까지 나기 시작했다. 물에 젖었던 물건들엔 곰팡이가 피고 여기저기 깨진 창문들 사이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동물과 곤충들이 아지트로 삼은 모양인지 배설물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어젯밤 떠날 짐을 찾으러 올 계획을 세우면서 우선 캐리어들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었는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안방에 있었나? 창고에 있으려나? 아니면 현관 신발장 위? 대학교 기숙사에 짐을 옮기면서 썼던 커다란 캐리어 네 개가 어딘가엔 분명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10년 전의 일이니 도무지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행인 건 크기가 큰 물건들이라 찾다 보면 금방 눈에 띄리란 희망을 갖고 일단 집 안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캐리어들은 주방 식탁 밑과 소파와 에어컨 사이에서 찾았다. 나머지는 결국 찾지 못했다. 주방 식탁 밑에 있던 캐리어는 쥐에 갉아먹힌 흔적이 좀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 다행인 건 캐리어 안에 들어있던 물건들은 어느 정도 방수가 되었던 건지 나름 멀쩡했다는 것이다. 에어컨 사용 설명서와 빈 쿠키 상자, 말린 로즈메리 한 봉지, 전선 한 뭉치가 앞으로의 여정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상태가 괜찮으니 그대로 캐리어 안에 집어넣었다.


캐리어를 밖의 수돗가로 끌고 나와 가볍게 겉을 씻어준 다음 현관 옆에 놓아둔 비닐봉지들을 뒤적였다. 일단 가장 중요한 옷가지들과 생필품이 될 만한 것들을 찾는데 이젠 작아진 아주 오래된 옷들과 마스크팩이나 공구 세트 같은 것들 뿐이었다. 평소에 입던 옷들은 보통 소파 위에 쌓아두었었는데 불이나고 소방 작업 등을 하며 소파 전체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일단 곰팡이가 피고 탄내가 밴 옷들을 적당히 건져서 비닐봉지 안에 쑤셔 넣은 다음 캐리어에 담았다. 이동한 다음 빨래를 하던지 해야지.


적당히 옷 정도만 담았을 뿐인데 캐리어 두 개가 거의 다 차 버렸다. 나머지 캐리어들을 끝내 찾는다고 해도 손이 모자라고, 배낭이 될 만한 가방은 아마 이 집에 없을 것이다. 옷이 든 봉투를 꾹꾹 누른 다음 정체는 모르지만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약이며 빈 반찬통이며 책이며 쑤셔 넣고 겨우 지퍼를 잠갔다. 아침에 덜덜 떨어가며 씻고 왔는데 어느새 몸에서 땀냄새가 나는 것 같다. 여기에도 수돗가가 있긴 하지만 샴푸나 비누를 찾으러 저 잔해들을 해치고 욕실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일단 물로만 적당히 세수를 하고 허리를 펴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10분 뒤에 도착합니다. 보내주신 주소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10분. 내가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이 동네를 떠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집으로 가기 전까지 남은 시간. 어젯밤, 토마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후 살펴보던 메일 중에서 조건이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사람에게 승낙 메일을 보냈다. 그러면서 내가 짐이 있어서 이동하기 쉽지 않으니 픽업을 와줄 수 있냐고 물었는데 흔쾌히 그러겠다고 해서 집 근처의 파출소의 주소를 보내주었다. 내가 어디 가서 봉변을 당할 가능성이 높은 체구는 아니지만 사람일은 모르는 거니 경찰들이 지켜보고 CCTV가 있는 장소에서 나와 '고객'의 얼굴이 동시에 드러나길 바랐다. 강도 사건을 통해 내가 위기 상황에 그렇게 재빠른 행동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하게 배웠고. 이런 장소라면 적어도 차에서 내리자마자 내게 칼을 목에 들이대진 않겠지.


지금까진 파출소가 집 근처에 있어서 오히려 귀찮을 때가 많았다. 동네 어르신들과 입을 모아 내가 마을 일에 힘쓰지 않는다고 나무라기도 했고, 출근하면서 어쩔 수 없이 지나게 되는 파출소 앞에서 취객이 난동을 부리던 현장에 난데없이 엮이게 된 일도 있었다. 이번 화재 사건이 났을 때도 내 집 근처를 자꾸 어슬렁거려서 기분이 좀 나빴는데, 생각해보니 그 덕분인지 집에 도둑이 들진 않은 것 같다. 대문과 담이 있긴 하지만 넘으려면 얼마든지 몰래 넘어올 수 있고, 창문도 이미 다 깨진 집이라 도둑질하기 딱 좋은 집이 된 것치곤 잘 보존되어 있다. 뭐, 그다지 가져갈 게 없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내가 보석함을 찾듯이 뭐 건질만한 것 없나 뒤져볼 만도 한데 내가 헤집어둔 것 외엔 다른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돈을 조금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바로 돌아와 쓰레기 수거도 좀 하고 보석함을 마저 찾아볼 것이다. 그때까진 일단 떠나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간이 다 되었다. 햇볕에 잘 마른 캐리어들을 세워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끌어보니 바퀴 하나가 움직이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무게에 바퀴까지 말썽이니 수돗가에서 대문까지 2미터가 채 안 되는 거리를 끄는데도 상당한 힘이 든다. 픽업을 나와주기로 해서 정말 다행이다.


대문을 열려다 말고 돌아서서 집을 잠시 바라보았다. 내가 이곳을 이런 식으로 떠날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난... 난 그냥 이 집에서 조용히 살고 싶었을 뿐인데. 눈앞이 흐릿해졌다. 세 번의 사건을 겪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아 슬프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로 집에서 짐을 챙겨 떠나려고 하니 참을 수 없어졌다. 나는 정말로 이제 모르는 곳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모르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게 바로 저주가 아니면 무엇일까. 이제 난 내 저주를 배달하러 간다. 어느 것 하나 제정신인 것이 없다. 목이 늘어난 트레이닝복의 소매로 눈가를 쓱 훔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집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문을 잡아당겼다.




여기까지 1장의 내용입니다.

<저주 딜리버리 프로젝트> 3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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