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미화 Oct 29. 2022

감정의 사회학

4

【이 소설은 5회로 연재됩니다】


-다 아시죠?      


커피를 한 잔 더 들고 온 최윤정이 전 애인의 빚 얘기를 꺼냈다. 허구한 날 빚 갚는 게 일인 사람이라서 자기 이름을 빚과 송금이라고 불러달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금융감독원 조회에서는 농협 빚 5천만 원 보증인이 두 명이다. 한 명은 최윤정이고 또 다른 인물은 이시영이 평소에 형이라고 불렀던 다른 연대 보증인이 두 차례 소송을 거쳐 갚았다. 최 사장이 미리 작성해 둔 유언장 외에는 공식적으로 이렇다 할 재산이 없던 최윤정은 채무이행 불능으로 면제받았다. 우리은행 빚 3천만 원은 이시영 모친이 갚았다.     


내가 사무실에서 빨간 색연필로 그은 부분은 제3 금융권, 즉 대부업체 빚이다. 사채 빚 6천여만 원 가운데 2천만 원은 그린벨트가 수표로 갚았다. 그런데 이시영은 그린벨트에게 이미 천만 원 정도 빚이 있던 상태로 확인됐다.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두 사람의 은밀한 거래는 어디에서도 포착되지 않았다. 이시영 계좌를 추적하다가 변 아무개라는 이름이 새롭게 나왔다. 이시영과 동향인 변은 키르기스스탄에서 석탄 광산업을 하는 남편과의 사이에 초등학생 아이 둘이 있다. 서울 서북부 지역에서 이시영이 소속된 정당 서포터스로 활동하는 변은 을지로에서 직원 세 명을 고용한 미용실을 운영한다. 미용실이 입주한 3층 건물을 남편과 공동명의로 소유하고 있었다. 하늘에 금이 갈 것처럼 쨍하게 추운 날 장대리와 미용실을 찾아갔을 때 리프팅 시술이 가라앉지 않아 퉁퉁 부은 얼굴로 변이 커피를 내왔다.      

 

변은 이시영 빚 4천만 원은 대리 변제 한 게 아니라 빌려준 거라며 감정 상하게 하지 말라고 언죽번죽 말했다. 차용증을 보자고 했더니 막역한 선후배 사이끼리 그런 거 쓰는 사람이 어딨냐고 목청을 돋웠다. 사업을 하는 사람치고는 문서를 보여줘도 막무가내 화를 내고 자기 부부 계좌에 암호 화폐 거래가 진행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시영이 사업차 잠깐 사용하고 돌려주겠다면서 깨끗하게 쓸 거라고 했단다. 이유가 무엇이든 변은 통장 거래 내역을 모르는 눈치였다. 변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고향 오빠에게 건넨 계좌에서 출금된 돈은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로 단번에 날아갔다. 버진 아일랜드가 콧구멍 속인지 똥구멍 속인지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른다며 변이 부은 얼굴을 씰룩거리자 잠잠하던 장대리가 조분조분 말했다.      


-저, 선생님. 나중에 세계지도 꼭 찾아보세요. 경찰과 검찰에서 곧 연락이 올 테니 미리 변호사 선임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근데 검찰 수사관은 저희와는 아주 딴판인 건 아시죠?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장대리는 독사 같은 독한 독냄새가 난다고 고개를 저었다. 구청장 비위 조사가 막바지에 달했을 때 새로운 일이 밝혀졌다. 이시영은 부도 이후 정치권 선배가 투기용으로 사둔 태안군 빈 시골집에서 세 달 정도 지냈다. 변은 알배추로 담근 물김치며 갈비찜과 장조림, 굴전 같은 정성 들인 반찬을 뜨거운 사랑과 함께 차에 싣고 남면을 부지런히 출입했다. 남면 지구대 협조로 두 사람 행적을 뒤질 때 40대 후반 경찰은 시골 동네 사람들은 둘 사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다 알고 있었다고 했다며 수화기 너머 느끼한 웃음을 날렸다.    

 

-그 여자 조사했어요? 미용실요

-검찰에서 소환할 겁니다

-왜요? 저도 그럼?

-네. 근데 사안이 조금 다르긴 해요


온몸의 솜털까지 양심이 반질반질 윤색된 고급 정치브로커 현영순과 공범이 아니라고 최윤정이 증명하려면 부득불 이시영과 얽힌 오만가지 관계가 들춰진다. 어쩐 일인지 이번 일은 경찰에 자료를 넘기는 일이 편치 않다. 순전히 좋아하는 감정으로 연애만 했을 뿐인데 심술궂은 주낙에 걸려들었으니 감정이 없는 법에게 따듯한 가슴을 기대하긴 어렵다. 끝이 안 좋은 남의 연애사를 들으면서 나의 20대 연애사가 소환됐다. 스물여섯 살 초겨울에 헤어진 사람은 최윤정처럼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연정이었다. 그해 겨울에는 대전역 상가에서 그 사람이 사준 이정석의 ‘첫눈이 온다구요’를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다. 둘이 갔던 을왕리가 텔레비전에 나오면 가슴에 동그란 포물선이 일렁였다. 앞날에 대한 불안을 이유로 이별을 통보한 뒤늦은 미안함에 마음이 주춤댔지만 지나간 일을 돌이켜봤자 감정만 낭비하는 짓이라고 스스로 비웃었다.      


냉소적이고 감정이 무디어진 성격으로 변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최윤정이 조사관과 조사 대상자로 구분되는 사회적 관계에서 나를 경계하는 대상으로 의식하고 있다면 조사 정확도가 떨어진다. 한편으로는 사적으로 건조한 관계인 나에게 내밀한 속마음을 다 비치다시피 한 이면에 심리적으로 나에게 의존하고 있다면? 프랑수아 스티른이라는 프랑스 고등학교 철학교수가 쓴 ‘인간과 권력’이라는 작은 철학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서열관계는 드러나지 않아도 권위적 서열관계라고 한다. 여기서 가리키는 권위는 폭력의 기만적인 가면이다. 조사자의 감정을 숨기고 대상자의 해묵은 상처를 헤집으면서 빠져나올 수 없는 우물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이전 14화 감정의 사회학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