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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화 Oct 29. 2022

감정의 사회학

5

【이 소설은 5회로 연재됩니다】


-어렵게 다시 만났는데 왜 헤어지셨어요? 현영순 사건이 빌미 준 게 있나요?     


최윤정이 짧은 한숨을 뱉으며 천장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땐 현영순이 그렇게 큰 정치 브로커인줄은 몰랐어요. 그깟 명의 한번 빌려주는 건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더랬죠

-명의 빌려주는 거 큰일인데요

-제가 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고 아버지도 저한테는 사업 얘기를 일절 안 하셨어요. 해도 몰랐겠죠. 어려서부터 미술 밖에는 몰랐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없었어요. 대통령을 포함해서 국회의원이나 시장, 구청장, 의원을 뽑는 선거도 그냥 그 사람들 명예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와 무관한 남 일인 줄 알았던 거죠. 나이만 먹었지 세상 물정 모르는 숙맥이었던 거에요. 시골집에 찾아간 적이 있어요. 남면 아시죠? 시골집 잠자는 작은 방에 싸구려 다이어리 같은 게 있더라고요. 뭐냐고 물었더니 별 거 아니니까 읽어보지 말라고 하더군요. 저녁을 먹고 그 사람이 설거지하는 동안 읽었는데 일기였어요. 거기에 한 여자 이름이 반복해서 나와요. 한문으로 또박또박 이름을 쓴 페이지도 있었어요

-누구인가요?

-미용실요. 내용이 그렇게 절절할 수가 없어요. 평소에 무뚝뚝한 사람인데. 잊지 못하는 옛날 애인인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내 가슴속의 예쁜 고래’라고 쓴 문장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일전에 몰래 본 휴대폰에도 그 닉네임이 있었는데 그걸 본 당시에는 여동생인 줄 알았어요. 둘이 친했거든요. 근데 일기장에는 다른 여자 이름 옆에 그게 써 있잖아요. 머릿속이 엉켜서 잠을 못 잤어요. 제가 얼마나 맹추였냐면요. 여동생 연락처를 그토록 애절한 이름으로 휴대폰에 저장해 두는 오빠가 몇이나 있겠어요? 다음날 서울로 올라오면서 깨달았죠. 올라오는 차 안에서 어찌나 울었는지 서울에 도착해선 눈이 퉁퉁 부었어요. 한 달쯤 지나서 서초동 작업실로 와 달라고 전활 했어요. 목돈이 생겼다고 거짓말을 했죠

-송금할 수도 있는데요. 왜 굳이?

-그때 그 사람은 신용불량자라서 송금이 어렵고, 또 제가 작정한 게 있었거든요. 면도를 말쑥하게 하고 싱글싱글 웃으며 문을 열더군요. ‘죄와 벌’에 나오는 추악하고 더럽고 음탕하면서도 악행만 일삼는 스비드리가일로프처럼 제가 돈 줄 때만 저와 말도 잘하고 잘 웃는 게 지금 떠올려도 진짜 역겨워요. 저도 결심했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미용실 여자 이름을 댔어요. 다짜고짜 화를 내더라고요. 남의 일기를 왜 읽었느냐, 이젠 돈 준다고 거짓말까지 하냐, 넌 나를 돈이나 삥 뜯는 파렴치한으로 본 거냐고 막 화를 내면서 나를 나쁜 년으로 몰아세우지 뭐에요. 지가 무슨 심판관이라도 되는 듯 눈을 부라리는 통에 어찌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그래도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미용실 남편도 니들 사이를 알고 있냐고 따졌더니 그 여자 남편이 아는 날에는 너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라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막 협박을 해요

-최윤정씨가 받은 상처는 미안해하지 않고요?

-전혀요. 그 여자 걱정만 하고 제 고통은 눈곱만치 안 한 거죠. 남면 시골집 냉장고 옆에 있던 빈 락앤락 통들이 다 그 여자가 갖다 바친 반찬통들 일걸요. 미용실이 그 먼데까지 뻔질나게 다녔는데 그것도 모르고 저는 소고기 안심에 치맛살에 알배기 꽃게를 냉장고에 꽉꽉 채워주고 이백만 원까지 현금으로 줬어요. 집에 와서 제 방 벽에 머리를 마구 찧었죠.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해 막 소리를 질러대서 엄마랑 정신과에 갔더니 공황장애라고 하더라고요. 멍청한 제 자신이 견디기 힘들어서 밥을 안 먹었어요. 나 같은 바보가 밥은 먹어서 모하나 죽어야지 이런 생각만 들고요. 제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것 밖에 없었어요

-어휴, 참. 이젠 현영순 얘기를 더 듣고 싶은데요. 전달하신 통장 외에 구청장 관련해서 다른 심부름은 없었나요?

-없어요. 그 사람이 현영순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 형님 줄에 서야 성공한다, 그럼 아버지 허락도 받고 그때까지 우리 좀만 참자 그런 얘기였죠. 그런 감언이설도 알고 보면 개구라였던 거죠. 구청장 형이 건설 회사를 하잖아요. 저희 아버지가 그분이 어려울 때 몇 번 도와주셨다고 해요. 그때 토목공학과 교수를 소개받았는데 구청장 형하고 그 교수가 같은 업종이다 보니 친하게 지냈데요. 구청장이 영등포역 뒤 공구상가 재개발할 때도 형하고 교수가 개입하셨고요. 구청장 뒷일은 중앙지검에 있는 구청장 남동생이 봐준다고 해요. 남영동에서 여의도까지 이어지는 가로수며 샛강공원 조성과 여의도 공원 조경수하고 교통표지판 공사도 말이 공개입찰이지 실상은 특혜래요. 미리 자기 형 업체를 선정하고 형식만 공개적으로 보여 준거죠. 그래도 보는 눈이 있잖아요. 그래서 현영순이 야당 의원 비리 게이트를 터뜨려서 눈을 가려쥤데요. 이 얘기는 얼마 전에 엄마에게 들은 거에요

-관급 공사는 공개입찰이 원칙이고 위반하면 관계자 징계가 엄합니다. 교통표지판하고 가로수 식재는 찾아봐야 알겠고, 샛강 정비와 여의도 공원 조경은 세비로 21억 원이 지급된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사업을 수의계약했다면.....

-엄마가 그러는데 향응제공이나 뇌물수수 수사해야 한다고 하던데요. 조사관님 만날 때 이 얘기 꼭 해서 조사해야 한다고 알려줬어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고 그 남자가 누구와 통화할 때 구청장이 지금 돈을 열심히 모으는 중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던 기억이 나요   

  

성수동 칼국수 집에서 최윤정이 통장 두 개를 현영순에게 전할 때 이시영은 대전 사는 여동생이 유방암 수술을 한다며 동석하지 않았다. 현영순은 최윤정에게 건네받은 통장에 의뭉스러운 뭉칫돈을 거래했다. 향우회, 전우회, 청국장 백반집, 화장품 가게, 카센터 등 온갖 개인 후원자들의 자잘한 금액에 심지어 변과 그린벨트까지 계좌에 찍혔다. 문제는 국내 입금액보다 수십억원 단위 돈이 수십 번 쪼개어 필리핀이나 캄보디아에서 차곡차곡 입금된 수작이다. 양심에 털이 났거나 간이 없는 사람 아니면 할 수 없는 거래였다.      


-그 사람은요, 돈이 필요할 때만 전화를 해요. 평소에는 어지간해선 전활 안 해요. 제가 전화하면 항상 같은 이유로 통활 피해요. 누굴 만나고 있다거나 피곤해서 자고 있는 중이라고 전활 뚝 끊어요. 안 받는 경우도 허다했죠. 작업실에서 혼자 멍하게 있다 보면 앞날이 불안해서 막막해지고 얼마나 외로운데요. 캔버스가 거대한 벽처럼 막혀서 가슴이 답답해 전화하면 네가 뭐가 걱정이냐, 별 일 아닌 걸 갖고 뭘 그래, 이런 식으로 말해요. 소통은커녕 철저히 무시만 당했어요. 그 사람은 남의 감정을 이용해서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이에요. 제 감정을 무참히 짓이겨버렸어요. 저는 감정 살인을 당한 거죠. 그게 견딜 수 없었어요      


끝내 이시영의 부고를 알리지 못한 채 양주 골짜기에서 나왔다. 이시영은 지난해 7월 23일 오전 3시 27분 통행이 뜸한 외곽순환도로 교차로에서 즉사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파손된 차량에서 구조한 40대 중반의 트랜스 호텔 일식집 여사장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심장이 멈췄다. 부검 결과 여사장은 임신 2개월이었다고 한다. 충돌 차량은 위변조 된 번호판을 단 40톤 화물차로 해당 차량은 추적이 어려워 수사는 사실상 종결된 상태이다.      


초저녁 불빛이 비누거품처럼 망울망울 아롱지는 양주시내가 가까워지면서 진눈깨비가 내렸다. 드문드문 등을 기댄 낮은 지붕의 시골집들 사이로 미래 슈퍼 간판 가장자리에 달린 꼬마전구가 반짝반짝 손짓했다. 박수근의 마을처럼 흐릿해지는 어스름 시간에 빛바랜 붉은 함석지붕 왼쪽으로 큰 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 있다. 짙은 갈색 새시 유리문에 매직펜으로 삐뚤빼뚤 ‘찐빵 있슴’이라고 쓴 골판지가 붙었다. 미닫이문을 열자 더운 기운이 훅 안긴다. 일흔 살이 훌쩍 넘었음직한 빼빼 마른 노인이 연탄난로에 올려놓은 양은솥 뚜껑을 열고 누런 갱지 봉투에 빵을 담았다.    

 

-저 나무는 무슨 나무죠?

-어데요? 아, 벚나무요

-사장님 소유인가요?

-나무가 누구 소유가 어디 있어요. 사람은 사람이고 나무는 나무인 게지

-사장님이 심으셨어요?

-아뉴. 내가 30여 년 전에 여기로 이사 왔을 때 근처에 벚나무가 서너 그루 더 있었는데 몇 해 전 신작로 넓힌다고 다 캐가고 저 나무만 내 땅에 갠신히 포함돼서 남았어요

-네에. 수령이 꽤 돼 보이는데요

-백칠십 살 정도 된 것 같다드만요. 백칠십 살 이믄 철종 때부터 고종에 왜놈들 만행에 육이오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아이엠에프, 김대중, 노무현, 아이고야. 사람 죽고 살고 하는 거 다 본 거 아닌 감요. 하늘 밑에 벌레가 그걸 따라잡을 수 있나. 보기엔 나무지만 동네 늙은이들한테 4월마다 절 받는 신령에요

-고사를 지내나 봐요?

-저 벚꽃나무 보면서 살고 싶다 안 허요

-왜요?

-봄에는 꽃피워주고, 여름에는 퍼런 잎들이 이쁘고, 가을에는 입추 지나면 제일 먼저 노랗게 물드는데 바스락거리는 게 얼마나 예쁘장하다고요. 걱정거리 있다가도 저 나무만 넋 놓고 보믄 싹 다 잊어버려요

-겨울에는요?

-겨울에는 보기만 혀도 홀가분하지 않소? 저리 검은 가지에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면 진경산수화가 별건가요. 겸재 선생이 울고 갈 일이제. 사철 예 앉아 나무 한 그루나 보면서 흰 죽 마냥 멀겋게 살다가 꽃나무 아래서 덤덤히 죽을 수 있다면 그 보다 편안한 게 어딨소     


찐빵이 담긴 봉투를 들고 가게 문을 여니 눈발이 굵어졌다. 양주를 벗어날 무렵 제임스 웹이 목성을 돌다가 물이 있는 외계행성을 발견했다고 라디오 앵커가 전한다. 의정부를 지날 때까지만 해도 소담하게 내리던 함박눈은 도봉산이 보일 즈음에 펄펄 내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길 잃은 당나귀 울음소리를 내면서 차 옆으로 바짝 붙어 도봉 성당으로 차를 돌렸다.

     

희뿌연 주차장에서 휴대폰 연락처를 훑다 말고 제임스 웹을 검색했다. 목성 주변에 스테판 오중주로 불린 4개의 소행성이 서로 중력에 의해 끌어당겼다 떨어졌다 하는데 1150광년 떨어진 외계행성에서 수증기 형태가 발견됐다고 한다. 물이 존재한다면 외계 생명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한 태양이 두 개 뜨는 행성이나 얼음 행성, 사막행성, 외계인 정류장이 언젠가는 인류의 여행지가 될 것이다. 어렸을 때 ‘어린 왕자’를 읽으며 여우와 장미가 사는 행성 B612를 그린 적이 있다. 중학생인 오빠는 그런 행성은 없다고 쌀쌀맞게 말해서 여동생은 울고, 토라진 나는 저녁 밥상머리 앞에서 숟가락질을 하면서도 오빠에게 눈을 흘겼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인간이 영장류 시절에 생긴 대뇌 피질에서 의식이 창출된다고 했다. 상상하는 대뇌 피질이야말로 인류가 원하는 우주여행의 시발점이라고 쓴 이 대목을 읽은 후 구글 아바타를 우주비행사로 설정하고 닉네임을 ‘뜬구름’에서 ‘창백한 푸른 점’으로 바꿨다. 그러나 먼지가 되어서도 영영 지구를 떠나지 못할 내 촉수는 지구에서 60억 킬로미터 떨어진 명왕성에 향한다. 가스와 티끌이 엉킨 먼지구름을 지나 태양계 행성 아홉 개 가운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빛과 열이 닿지 않고 평균기온이 -248℃ 정도인 별에 왜 마음이 흔들리는지 모른다. 2006년 태양계 행성에서 퇴출된 창백한 명왕성 사진은 잃어버린 왕국처럼 쓸쓸하다.


어떤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명왕성처럼 진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이나 깊숙한 그늘에 있다. 진실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보이는 것은 부분이다. 니체는 진리를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지만 함부로 진실을 꺼내보는 일도 조심해야 한다. 어떤 진실은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증오와 환멸로 되감기 한다. 그러나 인간에겐 부서지고 깨지고 찢어진 상처를 창조로 승화하는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이 돈오돈수(頓悟頓修)에서 오는 것이든 돈오점수(頓悟漸修)에서 발화된 것이든 고통은 새로운 삶을 열 기폭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최윤정은 사랑하는 사람의 진실을 신뢰했다. 결과는 신뢰와 진실은 별개라는 것이다. 광활한 우주에서 행성 수억 개를 지나는 만큼이나 인간과 인간의 거리야 말로 가장 먼 행성이다. 별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인간은 고향에서 고향을 끊임없이 그리워하며 현실을 공허해한다. 칼 세이건은 이 그리움을 잘 알았다. “우리의 DNA를 이루는 질소, 치아를 구성하는 칼슘, 혈액의 주요 성분인 철, 애플파이에 들어있는 탄소 등의 원자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조리 별의 내부에서 합성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별의 자녀들이다 불완전한 영혼과 부유하는 속세에서 초라한 감정의 헐벗음을 별은 묵묵히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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