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미화 Oct 29. 2022

품위의 사회학

2

【이 소설은 5회로 연재됩니다】


정보수집 능력이 뛰어나고 냉정한 원칙주의자 감사 4과 권이 코로나에 확진되는 바람에 부장이 적잖이 걱정했다. 평소에 부장이 단기필마 달인이라고 편애한 권 대신 대타 송은 소심하다고 부장에게 흉을 잡히지만 침착하고 정확하다. 송과 나, 운영 2과 신과 성대리, 정보관리 2과 박, 장대리 이렇게 여섯 명이 2주 동안 매일 야근을 하며 검토한 자료만 해도 마티즈 뒷좌석을 가득 메울 분량이 나왔다.     

  

해동시 출입국관리사무소를 파헤치면서 해동시에 건강보조식품 수입회사로 등록한 카멜은 실마리가 안 잡혀 애를 먹었다. 간짜장, 짬뽕, 볶음밥, 김치찌개, 된장찌개 같은 시큼털털한 음식만 먹으면 입이 욕한다며 섭식수준을 업그레이드해 보자고 장대리가 작심한 듯 주장하는 바람에 다 먹고살려고 하는 짓이라고 맞장구치면서 탕수육과 잡채밥을 야식으로 먹은 날 카멜 정체가 드러났다. 사막을 건너는 배를 찾았으니 밥심은 위대하다고 밤 아홉시가 넘어 쟁반에 커피 여섯 잔을 담아 오던 장대리가 호기를 부렸다.    

  

해동시로 명기된 카멜 사업장 주소지에는 실장갑 가내공장이 있을 뿐 카멜은 해당 건물에 없다. 산업통상부와 고용노동부 기업 정보에서도 카멜은 폐업신고가 안 됐다. 매출도 없고 직원도 없고 엉뚱한 주소인 회사는 답이 나온다. 이럴 때 머릿속에 섬광을 치는 게 돈세탁이다. 페이퍼 컴퍼니. 등록서류만 존재하는 회사 카멜 대표 우 사장 주소지이자 활동무대인 성남경찰서에 협조 공문을 보냈다. 우 사장과 가족 계좌는 이렇다 할 정황이 없는 대신 관내 은행 몇 군데 CCTV에 우 사장 양아들이 다수 찍혔다.    

  

다렌 출신 양아들이 사용한 계좌 명의는 가족과 연락이 두절돼 거주불명자로 행정 처리된 사람들이다. 거주불명자 계좌에는 해동시 출입국관리사무소를 통과한 중국인과 러시아인들이 입금한 거래와 수상한 해외 송금이 중복됐다. 내가 브로커라는 말을 꺼내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밀항브로커 우 사장은 위조여권 판매, 밀입국과 밀수에 그치지 않고 마약 거래 같은 질이 안 좋은 일을 할 가능성이 크다. 정치인 여러 명을 도태시킨 도시 재개발 사업을 주도했던 8년 전에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감형된 우 사장은 플리바게닝 의혹이 짙다. 본인 이름으로 이렇다 할 덩어리 재산이 없지만 빈틈없는 인간이라고 틈이 없는 건 아니다. 12호 바늘 한 개 꽂을 자리만 있으면 붕괴가 시작된다. 출장 준비 야근은 그 틈을 찾도록 잘 벼린 단검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빨랫감이 많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잘 마무리하면 다음 회기 때 꿀보직으로 달아날 수 있다.

      

이십 대가 저물어가던 11월 초 붉고 노란 단풍이 말갛게 사위어 갈 즈음 두타산에 갔다. 저녁에는 북평교회 홍 선생 사택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홍 선생이 북평교회에 머물던 몇 해 동안 해동을 몇 번 더 갔다. 청량리역에서 오후 열한 시에 출발하는 강릉행 침대열차를 타면 고봉준령 태백산맥을 넘느라고 기차는 밤새 몸살을 앓았다. 새벽 다섯 시 무렵 기차가 큰숨을 내쉰 개찰구 앞에는 빙그레 웃는 홍 선생이 해바라기처럼 서 있었다. 주목나무 눈꽃이 장관이라는 말을 듣고 아이젠도 없이 눈 쌓인 태백산에서 미끄러지던 겨울도 있다. 쌀쌀한 초봄에는 홍 선생 교회 동생과 셋이서 고물 자가용을 타고 구불구불한 오대산 임도를 넘었다. 장엄한 백두대간의 육중한 근육에 넋을 잃어 내려오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홍 선생이 거진에서 해동으로 해동을 떠나 창원, 진안, 대전, 보은, 옥천, 안동, 창녕으로 주소가 바뀔 때 내 삶도 달라졌다. 해동은 박제된 사진 속에 서서히 묻혔다. 영동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오자 지나간 시간이 순식간에 밀려나고 해동 시청 주차장에는 해사한 봄 햇살이 무색하게 빡빡한 현실이 마중 나왔다.   

  

-제가 물어봤을 때는 소석 선생 회고록 출판기념회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더라구요. 서울 사람들은 여기를 두메산골 취급하는데 여기서 방귀께나 뀌는 사람들은 서울을 뻔질나게 드나듭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해당 부서는 물론이고 건설국 전체는 편법행정이나 비리를 사방에서 감시하기 때문에 십 원 한 장도 벌벌 떨어요. 공개입찰에다가 전자결재로 다 근거 남으니까. 요새 세상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문서에서 보다시피 김태운 팀장 혼자 벌인 일이고 과장도 저도 팀원들도 새까맣게 몰랐다는 거 아닙니까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추가 제출하신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으니 빈 회의실 하나 부탁드립니다     


내가 씩 웃으며 응수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소파 옆 탁자의 수화기를 들은 오십 대 후반의 올백머리 국장 인적 사항은 미리 확인했었다. 구린 게 많은 인간일수록 자기 냄새에 자신감이 강하다. 도취된 냄새는 온전히 자기 후각의 문제이므로 압도적으로 다른 냄새를 차단한다. 그걸 세속에서는 뻔뻔하다고 말하고 당사자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한다. 빈 회의실 한쪽 벽에 처덕처덕 포개진 공무용 의자 한 무더기를 보며 송이 이죽거렸다.


-저런 신세가 되어봐야 꼰 다리 풀겠네요     


소석 선생은 6년 전 사망한 왕년의 거물 정치인이다. 5선 의원 출신으로 한때는 내각책임제를 주장해 유력 정치인으로 화려한 명성을 날렸다. 총리가 되려는 야심은 좌절되어 여당 고문을 끝으로 정계를 떠났다. 은퇴 후에는 지병인 당뇨를 치료하면서 골프나 치고 다니는 것 같더니 10여 년 전 호국재건위원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소석 선생 개인 정보와 호국재건위원회를 알아보라고 박이 서울에 전화를 넣었다.        


-아니, 어떻게 허가 날짜보다 등록 날짜가 먼저야. 간이 배 밖에 나왔네. 뭘 믿고 이러지?

-새끼들이 대놓고 노골적인데요. 믿는 빽이 꽤 쎈가 봅니다     


정오가 되려면 50분이 남았는데 범강 장달이처럼 우락부락한 과장이 문을 냅다 열어젖혔다. 도청에서 잔뼈가 굵은 오십 대 중반의 과장은 4년 전 처가가 있는 이곳으로 전근 왔다. 점심식사 대접을 운운하는 과장에게 송이 자리에서 일어나 업무협조 외에는 사양하겠다고 손을 모으며 인사했다. 뒷짐을 지고 책상 위 서류뭉치를 가재미눈으로 흘깃흘깃 곁눈질하던 과장은 사소한 일에 수고가 많다며 회 잘하는 집과 고기 잘하는 집을 한바탕 홍보했다.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요거마저 다 보고 저희가 가서 직접 먹고 올 테니 과장님도 볼일 보십시오. 아참, 식당에 가기 전에 추가 제출 보완 자료를 알려드릴 테니 저희가 밥 먹고 와서 검토할 수 있도록 그 사이에 준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이 신속하게 응대하자 꺽다리 뒷짐이 풀어졌다.     


-그래도 시골 인심이라는 게 있는데 거참. 저녁에라도 모실 기회를 주세요. 모두 팀장님들이라고 알고 있는데 아무리 지방직이지만 제가 명색이 과장으로 공무로 오신 분들을 나 몰라라 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촌구석이라도 대접만큼은 소홀하지 않습니다      


비웃음을 감추고 미소를 띤 나와 다르게 의자에서 일어난 송이 꺽다리에게 고개를 꾸벅했다. 과장이 나가자 성대리가 볼펜을 책상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 한마디 했다.


-꼭, 돌팔이같이 생긴 게      






이전 17화 품위의 사회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