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미화 Oct 29. 2022

품위의 사회학

3

【이 소설은 5회로 연재됩니다】


송은 침착하게 속도를 유지하면서 흔들림 없이 20여분 만에 죽서루 앞 동해회관 문 앞에 차를 댔다. 청록색 외벽 타일 쪽이 몇 개 떨어진 것 말고는 그대로다. 동해회관은 홍 선생과 태백산 겨울산행 길에 들른 집이다. 눈보라가 기세등등한 창밖을 보며 꽁꽁 언 몸을 뜨끈뜨끈한 온돌에 녹였다. 죽서루는 이듬해 초여름에 한 번 더 왔었는데 동해회관 잠긴 문에 한자로 상중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서 중앙시장 근처 향어 매운탕 집을 갔었다. 말만 듣던 이스라엘 잉어인 향어는 숭어만큼 컸다. 고춧가루를 듬뿍 뿌린 시뻘건 국물에 죽은 몸을 푹 담근 향어의 큰 눈 때문에 숟가락을 뜨기가 힘들었다.         


이틀에 한 번씩 인제에서 길어온 약수로 지은 동해회관 돌솥밥은 부드럽고 순했다. 말간 풀색이 물든 듯 만 듯한 밥 위에 씨를 빼고 도려낸 대추 두 조각과 은행알 두 알이 다소곳하다. 이질적 개체인 물, 쌀, 대추, 은행알이 자기 형질을 지키면서 상대 형질을 망치지 않고 색과 맛을 서로 보완해주고 있다. 각자 있으되 내침 없고 침범 없이 어울리는 배치다.


어느 주말 시내에 나갔다가 띠지에 쓴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에 끌려서 산 리베카 솔닛 산문집 ‘멀고도 가까운’에 품위를 소개한 일화가 나온다. 당나라 화가 우다오쯔 일화와 미국 만화 ‘로드러너와 코요테’ 예시를 든 작가는 그림 속으로 사라진 현자와 새는 품위를 가리킨다고 한다. (자기 삶에서 품위를 지키면) “불 속을 걸어가고, 바위를 뚫고 지나가고, 꼿꼿이 선 채 하늘을 날아간다”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실현할 수 있는 행동이 품위라면 동해회관 돌솥밥처럼 어떤 품위는 배워야 한다.  

   

날것의 욕망을 절제 없이 부풀려 날뛰다가 둘레를 망쳐놓는 욕망은 무간지옥에 떨어질 천형을 받을 것 같다. 그런데 욕망이야말로 인간에게만 타고난 본성 아니던가. 일시적 바람인 욕구와 다르게 욕망은 죽음의 순간까지 머리에 이고, 어깨에 둘러메고, 등에 지고, 허리에 차고, 손에 들고, 가슴에 품고, 발에 묶어 끌고 간다. 멈추고 살피며 돌아봄을 잊고 심지어 타인의 회생을 이끌 한줌 볕뉘조차 시기와 탐욕으로 빼앗는 내밀한 어둠의 마음으로 사랑과 박애를 읊조리는 게 인간이다. 만족을 모른 채 큰 입만 있는 그악스런 괴물을 가슴에 가둬놓고 무럭무럭 살찌우면 허기가 광기로 완벽히 탈바꿈한다. 마침내 신앙이 된 욕망의 리비도를 옹위하는 충복이 된 인간은 탐욕의 노예로 복무하다가 짐승보다 못한 생을 마친다.


오빠가 4년 반 동안 지방대 전임강사를 할 때만 해도 집에 돈을 버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고 엄마가 지금보다는 건강했기에 나의 직장생활은 절박함이 없었다. 월급을 타면 굴드의 바흐 건반 오리지널 독주곡이나 루빈스타인의 쇼팽 한정판 같은 값이 만만치 않은 앨범을 사면서 나만 아는 작은 행복이라며 소확행을 주절거렸다.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두 번 하면서 왼쪽 어깨 신경이 죽고 침을 흘리며 발성이 부정확해진 오빠가 집에 들어앉자 나는 아직 벌레가 되기 전의 그레고리 잠자처럼 모든 욕망과 욕구를 돈의 압력에 강제로 거세당한 인간도 짐승도 아닌 채 하루하루를 버텼다. 신문지를 오려서 지폐가 만들어지는 마술이나 굴러다니는 돈을 횡재했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하며 돈을 미워했다.


폴 오스터는 ‘고독의 발명’에서 돈을 이렇게 말한다. “불로불사의 영약으로서가 아니라 해독제로서의 돈, 정글을 갈 때 호주머니 속에 준비해 가는 조그마한 약병, 독사에 물렸을 때의 대비책” 연필로 밑줄을 그었던가?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최소의 가치와 양보의 미덕은 기억이 뚜렷하다. 그러나 현실의 사람들은 아버지의 술주정 수업과 정반대로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권위를 이용해 자신은 백 원어치 손해 보는 일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조야하고 천박한 집념을 마몬처럼 불사한다. 눈에 돈만 가득 찬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차곡차곡 쌓인 업무 파일을 복기하면서 돈을 미워하지 않고 이해해야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회는 누군가의 수고와 애씀, 헌신과 희생, 인내와 배려 덕에 유지된다. 도덕과 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말은 신물 난다. 도덕이나 정의가 맹목적 힘을 얻으면 특정 세력의 흉기가 되어 굶주린 강도처럼 사회를 먹어 치운다. 번란한 세속에서 전지전능한 돈이 덜 천박하고 덜 잔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는 것처럼 돈이 독이 안 되고 젖이 되는 사회는 머나먼 유토피아인가? 동해회관 돌솥밥처럼 설악산 계곡물이 밥에 스며든 듯 안 든 듯, 맛이 있는 듯 없는 듯, 고작 대추 두 알과 은행 두 알로 어울린 소소한 품위는 돈이 최고의 철학이 된 사회에서 힘이 없기에 소중하다.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의 슴슴한 품위를 깨듯 박의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미국 수사드라마 ‘멘탈리스트’의 능글맞은 탐정 패트릭 제인의 표정처럼 박이 눈웃음을 쳤다.      


-월척입니다. 흐흐. 메일로 보냈다고 하니까 들어가서 다 함께 확인하시죠

-확실하게 조질 수 있는 거죠? 시골 애들 바닥은 좁아도 사돈에 팔촌에 지나가는 개 고양이까지 다 엮어져서 합치면 무시 못해요. 초장에 깨야 합니다


신이 치아를 쑤시던 이쑤시개를 눌은밥을 다 먹은 빈 돌솥에 툭 던지더니 물로 입안을 헹궜다. 행군 물을 돌솥에 뱉자 고춧가루와 밥알 찌꺼기가 이쑤시개와 같이 탁한 물 위에 슼 떠 올랐다.


-아까 과장 새끼 말하는 뽄새 보세요. 지방직 주제에 딴엔 과장이라고 우리 팀장들 우습게 보는 투였잖아요. 우리가 지 아래 팀장급하고 같은 레벨인 줄 아나 봐요. 꼴같잖아서. 지방직 팀장하고 국가직 팀장이 어떻게 다른지 추풍낙엽으로 보여줘야죠

-어, 그럼요. 우리 손에 지들 명줄이 달린 것도 모르고 겁대가리 없이 직을 운운하고. 다 봉고파직 당할 것들이 다가올 운명을 짐작도 못하고 아주 대범해요. 곤장 맞는 기집애처럼 징징 대며 울게 만들어야 합니다


발라낸 고등어 가시가 뒤엉킨 주발 뚜껑에 침을 뱉던 박이 느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크크크. 사내들 거시기에도 좋아서 짜잖아요


순간 송이 내 표정을 힐끔 보더니 숟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치며 말했다.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윤 팀장님은 양형기준이 어떻게 적용될 것 같아요?


세 사람만 모이면 없는 호랑이도 있다고 지어낸다지만 자신만만하게 결론을 미리 정해놓는 유세는 숟가락을 내려놓은 밥상 둘레를 떠날 줄 몰랐다. 남근기를 벗어나지 못한 인물들과 밥상을 마주 하고 있는 내 처지에 화가 났지만 아쉬운 게 많은 주무자로선 참아야 한다. 이렇게 저렇게 칡넝쿨처럼 질기게 얽힌 이 바닥에선 입조심해야 한다. 내 업무에 공조를 해 주는 위치들이니 속마음을 행여 손거울에라도 비치면 안 된다. 툭 던진 말 한마디에, 설핏 스치는 냉담한 표정 한번에 나가리 난 일이 얼마나 많던가. 비겁함과 신중함은 깻잎 한 장 차이다. 처신에 득이 되려면 신중한 척 비겁해야 할 순간이 있다. 입만 열면 법불아귀니, 승불요곡이니, 공정과 원칙이니 현란한 말을 늘어놓지만 이 바닥 짬밥을 어지간히 먹었으니 나쁜 결과가 나와도 나라 안 망한다고, 그럭저럭 다 굴러간다고 자조 섞인 핑계를 소환해 실패를 다독인다. 말없이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장대리가 먼저 일어나 계산대에서 영수증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전 18화 품위의 사회학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