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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화 Oct 29. 2022

품위의 사회학

5

【이 소설은 5회로 연재됩니다】


레슬링 대회에서 세 번 우승한 ‘어깨가 넓은 사람’ 플라톤은 노예도 수학의 진리를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노예가 지식을 배운다고 해서 주인의 필요에 부응하는 지식이지 노예 자신을 위한 쓰임이 아니다. 플라톤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가 사회적으로 필요하다고 봤다. 죽기 전에 자신의 노예들을 해방시킨 아리스토텔레스 진심을 알 수는 없다.


이렇다 할 직업이 없이 용산역 앞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신형 페라리를 색깔별로 3대나 소유한 5촌 조카 영선이는 일이 안 풀려 풀이 죽은 나에게 현대사회에 노예가 어디 있냐고 해맑게 반문한 적이 있다. 영선이 아버지인 나의 외종사촌은 만석꾼 집안에서 장자로 태어나 단독 유산을 물려받았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명사립대학 이사장 딸하고 결혼해서 별 두 개를 달고 퇴직할 때까지 집에는 유모와 가사도우미와 운전수가 몇 명씩 상주했다. 영선이보다 아홉 살 많은 두 번째 부인과 이혼소송에서 재산을 많이 잃었지만 망해도 부자 3년 간다는 말처럼 부산 광안리 80평 아파트에서 군인연금과 임대료 수입을 꼼꼼하게 챙겼다. 배움이 짧고 처가 덕도 못 본 영선이 작은 아버지는 군산 조선소에서 배를 만들다가 추락해 6년 동안 누워만 있다가 죽었다. 밤톨 같은 나이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엄마까지 여의고 공장으로 떠돌던 4남매가 큰아버지를 찾아가 하소연했지만 노력해서 살라는 살벌한 소리만 듣고 살고 싶지 않다며 봄비가 사납게 내린 날 밤에 집으로 찾아와 울었다. 엄마가 친정의 큰 자랑인 부산 큰 조카에게 전화를 걸어서 길에 나 앉게 된 가련한 혈육들을 부탁하자 옆에서 듣던 오빠는 어눌한 목소리로 엄마에게 처음 화를 냈다. 예전에 오빠가 사고당하고 퇴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들어앉았다는 소식이 막내이모 입을 통해 친척들에게 삐라처럼 살포되었을 때 영선이 아버지가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턱관절이 상해 침을 흘리는 오빠를 바꿔 달라고 했다. 어렸을 때 신동이면 무슨 소용 있냐, 가진 거 없는 놈들은 실패하면 끝이고, 그건 타고난 운명이라고 가시 박힌 말을 뱉었다.


장렬하게 실패해도, 넘어져서 무릎이 깨져도, 애쓴 성과가 볼품이 없어도, 축 처진 히마리 없는 뒷모습을 보며 밥 잘 먹고 잠 푹 자면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길 거라고 마음을 써 주는 게 사람의 도리라고 가르친 아버지의 가치관은 가치 없는 사회가 되었다. 나의 파일에 기록된 지배 엘리트들은 영선이 아버지 말처럼 절대다수의 개와 돼지, 소수의 6두품, 더 소수인 초상류 세계로 사회 구성원을 구분한다. 목젖이 뽑아질 정도로 국장이 떠든 불가촉천민론을 짚어보다가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말한 지배자의 실체가 생각났다. 오늘날 가장 큰 악은 디킨스가 즐겨 묘사하던 추악한 ‘죄악의 소굴’에서 행해지지 않는다. 강제수용소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실행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곳에서는 악의 최종적 결과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악을 구상하고 지시하는 일은 (그것은 기안, 검토, 결재, 기록의 절차를 밟는다) 카펫이 깔린 깨끗하고 따뜻하며 환한 사무실 내부에서, 흰색 와이셔츠에 잘 정리된 손톱과 매끈히 면도한 얼굴로 좀처럼 목소리를 높일 필요 없이 묵묵히 일하는 사무직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지배 엘리트의 폭력은 이처럼 냉정하며 고도로 계산된 조직에서 나온다.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적지 않게 후원받는 사단법인 호국재건위원회 감사는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그들은 거대하고 강한 철옹성이었다.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호국재건위원회는 진보와 미래, 국가와 역사를 전시하면서 결성한 사회적, 경제적 이익이 목적인 허영 카르텔이다. 총알로도 뚫을 수 없는 게 신념이라지만 이들의 신념은 그때그때 해가 비치는 쪽으로 재빨리 몸을 돌리는 놀라운 순발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유동적이고 다면적이다. 내면에는 비열한 사악함과 오만한 흙탕물이 출렁이고 불법취득과 편법 증여에 핀 곰팡이는 세습으로 번지면서 사회를 오염시킨다. 손톱 끝까지 자기 이기로 물들어서 출세하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한 21세기 어용 엘리트는 나와 장대리를 징계심의위원회에 회부했다.    

 

대기발령이 나고 평일 낮에 옛집 근처 박물관에 갔다. 뒷산 등성이에 진분홍 진달래 군락지가 주차장에서 올려다 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지 2학년 때인지 아버지 오빠 나 이렇게 셋이 보채는 여동생을 떼어내고 산에 올라갔다. 진달래 무더기 앞에서 사진을 찍고 엄마가 대추나무 찬합에 싸준 쑥 인절미와 통후추를 박은 배숙을 먹었다. 성미 급한 내가 한입에 떡을 넘기자 찰떡은 한입에 꿀꺽 먹으면 얹히니까 천천히 씹어 먹어야 한다고 아버지가 인절미를 잘게 뜯어 놓았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본 바다에는 한입거리로 떼어낸 인절미 조각 같은 배들이 띄엄띄엄 물 위에 떠 있었다.


-팀장님, 그 소식 들으셨어요? 회계팀장님이 공무상 비밀누설로 사전 구속영장이 신청됐다는데요

-국장 짓야?

-그 인간 아니면 누가 그러겠어요. 가 팀장님이 자수하는 심정으로 감찰팀에 제보했는데 감찰팀에서 역으로 국장에게 꼰지른 것 같아요. 저도 오늘 감사 1과 동기에게서 들어서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하여튼 박멸해야 할 좀벌레에요. 팀장님과 저를 외진 곳으로 내치려고 지금쯤 꿍꿍이를 짜고 있을걸요

-가 팀장이 서초동 로펌에 줄이 좀 있어. 근데 장대리는 그 동영상 어쩌려고?

-잘 보관해 뒀죠. 해동시 그 올백, 선고유예 받았다네요. 중국 조폭 애들 술 얻어먹고 업체 허가 술술 풀어 준 놈을 선고유예라니, 이게 말이 돼요? 연금 완전 박탈해서 돈줄 끊어놓고 사회적 불구로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들 실컷 개고생만 하고. 어휴 아사리 판에요

-그동안 직을 이용해 얻은 노하우가 얼만데 돈줄이 끊어지겠어. 꺽다리는?

-사직했어요. 검찰이 불구속 입건했는데 연금 다 받아 처먹을 테죠. 최근엔 사모펀드 끌어들여서 산업폐기물 사업 신청했던데요. 아들은 VIP실에서 나와 JP모건 들어갔는데 놀라지 마세요. 거기에 국장 아들도 재직 중에요. 얘들은 상상 이상으로 부지런하게 살아요. 아참, 구속된 전 팀장 김태운요. 법인카드 세탁해 주고 조폭 돈 심부름 한 연변 출신 내연녀 복옥례가 바다에서 발견됐데요. 자살로 추정되는데 중국에서 온 아버지를 죽이고 자긴 자살한 걸로 경찰발표가 떴어요. 팀장님, 뉴스 좀 보세요!

-아, 진짜? 왜 아버지를? 어디서 죽인 건데?

-해동시요. 2포구에 빨간 우체통 모양 관광 등대 있잖아요. 거기 올라가서 아버지를 밑으로 밀었대요. 다음날 관광객이 시신을 발견했다나 봐요. 복옥례 시신은 묵호항 테트라포드에서 찾았고요. 호국재건위원회에 돈 대준 중국 조직이 낀 게 아닌가 조사했는데 CCTV에 다른 인물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경찰 발표로는 복옥례 아버지가 딸이 어렸을 때 성폭행을 해서 중국에서도 처벌받은 전력이 있대요. 복옥례가 한국으로 온 것도 아버지 피해서 도망 온 거겠죠. 근데 위조여권으로 들어온 일도 이상하고. 어휴, 숭악해요

-경찰 수사는 CCTV 분석으로 종결된 거야? 더 안 파고?

-그런 거 같아요. 걔들을 머리 아프게 누가 건드리겠어요

-썩을. 애들은 잘 있어? 부장님은 어떠셔?

-부장님은 건강상 이유로 휴직계 내셨대요. 머리가 아프시겠죠. 팀원들은 그럭저럭 지내나 봐요. 어제도 통화했는데 팀장님하고 언제 다 같이 뭉치자고 했어요     


평생 남에게 얼굴 한번 안 붉히고 막대한 피해를 준 사람에게도 융숭한 대접을 한 관세음보살 홍 선생은 거진으로 귀향했다. 찔레꽃 향기가 물씬 짙은 무렵 지병인 유전적 다낭종신이 악화되어 생의 종착지에 도착한 것이다. 임종 며칠 전 마지막 통화에서 말을 잇지 못하는 나에게 수화기 너머로 천상병 시인의 ‘귀천’ 한 구절을 들려줬다. 고요한 물빛 같은 목소리였다. 장례식장에서 홍 선생 누나에게 납골당 주소를 묻고 해동으로 차를 몰았다. 폐사지처럼 사라진 북평교회 녹슨 종탑 아래 그윽한 노을의 환대를 받으며 키 작은 벚꽃나무 이파리들이 가만히 흔들렸다. 알베르 까뮈는 ‘작가수첩’에서 평안한 최후를 이렇게 썼다. “어떤 날 저녁에는 그 감미로움이 끝나지 않은 채 오래 이어진다. 우리가 떠나고 난 뒤에도 땅 위에는 이런 저녁들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면 죽는데 도움이 된다”


징계심의위원회에서는 내 의견을 수용해 장대리는 본원에 재배치하고 나는 근대역사가 질곡한 지부로 발령을 냈다. 다툼과 불안, 엄살과 원망이 없는 밋밋하고 심심한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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