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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화 Oct 29. 2022

그 후

에필로그

# 1

앤서니 홉킨스는 ‘더 파더’로 2021년 제93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선정됐다. 1992년 ‘양들의 침묵’에 이은 두 번째 수상이다. 83세 노장은 전 세계 카메라가 몰리는 할리우드 시상식장에 가지 않는 대신 영국 자택에서 동영상으로 소감을 전송했다. “나는 여기 조용한 시골이 좋아요. 마당에 앉아서 저 들판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영국 남서부 시골집에서 화려한 아카데미 시상식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늙은 배우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스쳤다. 동영상을 보고 구글에서 웨일스 로드 뷰를 따라갔다. 탁 트인 들판, 야트막한 구릉, 산벚나무와 회양목이 우거진 작은 숲, 띄엄띄엄 나타나는 시골집이 정겨운 콜라보를 이뤘다. 오붓한 시골길 사이로 야생 덩굴장미나 찔레 덤불과 같은 크지 않은 관목이 심심하지 않은 풍경을 만들며 파노라마로 전개된다.       


# 2-냉장고에 붙인 포스트잇

• 아삭아삭한 콩나물 비빔국수 1인분 양념 비율 : 식초 4큰술, 진간장 1큰술, 설탕 1큰술, 고춧가루 1큰술, 다진 마늘 반 큰 술, 고추장 1큰술

• 맛있는 만두 간장 소스 : 식초 1큰술, 진간장 1큰술, 미림 1큰술, 설탕 1큰술. 식성에 따라 고춧가루 약간과 깨소금 첨가. 미림이 없을 때는 정수 희석

• 고기 찍어먹는 양념간장 소스 : 간장 3큰술, 식초 1큰술, 설탕 1큰술, 후추 1큰술, 빻은 깨 1큰술, 겨자 약간    

 

# 3

아버지 기제사 때 집을 갔더니 엄마가 부쩍 야위었다. 백내장 수술을 한 후 주름은 더 늘고 근감소증으로 엉덩이가 푹 꺼졌다. 아침에 일어날 때 힘들다고 해서 인터넷에서 황토볼 보료 침대를 주문했다. 며칠 후 한껏 들뜬 엄마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뛰쳐나와 퇴근길 들판을 가로질러 울렸다.      


-엄마, 메밀국수 오래 삶지도 않았는데 왜 질척거리지?

-삶기 전에 생국수일 때 부서지지 않게 흐르는 물에 살살 씻어서 전분기 없애야 해. 끓는 물에 넣고 나서도 면발이 붙지 않도록 나무젓가락으로 잘 젓고. 삶은 국수는 얼음물에 씻어서 건져야 쫄깃하지     


-엄마, 대구 맑은 탕 끓일 때는 생대구 써? 반건조 써?

-대구 맑은 탕엔 무조건 하루쯤 말린 거 써야 살이 안 부서지고 맛이 달아. 생대구는 부서지고 반건조는 불려도 식감이 덜 부드러워. 대파랑 마늘은 겉껍질 얇게 벗겨서 쓰고. 안 그럼 쓴 맛 나. 마늘은 귀찮아도 그때그때 까서 도마에 칼로 다져서 넣어야 향이 살아. 다시마 넣고 내장 딴 멸치랑 마른 새우 넣어서 국물 우린 다음 무 넣고. 그다음에 대구 넣고 마지막에 채소 넣어야지 너 성질대로 한 번에 다 넣으면 잡탕 된다. 간은 참치액이나 간수 뺀 천일염 써야 국물이 맑고 시원해. 요샌 약대구 그런 거 있나 모르겠네. 좀 짜서 그렇지 너 어렸을 때 심하게 앓고 나서 그거 한입씩 밥에 올려놔서 먹고 입맛 돌았어


# 4

얼마 전 톺아보기 독서회에서 고 선생이 알려준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봤다. 서커스라고 부르는 MI6 최고위급 간부 가운데 이중첩자인 두더지를 색출하는 과정은 새롭지 않다. 어느 조직이든 부정과 밀고자는 있다. 이 영화에서 조직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들은 조직이라는 온실에서 나왔거나 말단이다. 조직의 울타리가 지켜준 고급 정보, 직업적 자만심, 안정된 생활기반은 왁달박달한 현실 앞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조직에서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조직에 붙어 있으려고 굴욕을 참는다. 컨트롤인 조지 스마일리는 긴장을 유지하는 조직에서 매력 있게 늙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과묵하고 냉정하고 예리하다. 들뜬 휴머니즘을 경계하면서 자기를 돌아보는 인물이다. 말단을 믿고 말단과 협업해서 조직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성공한 스마일리는 화려한 언변이나 액션을 내세우는 스파이 영화의 전형적인 주인공이 아니다. 주류에서 내쳐졌고, 실패로 괴로워했으나, 사람에겐 무엇이 중요한지 알았다.        

 

# 5

낮에는 남의 출생과 사망, 결혼과 이혼, 재산다툼과 몰락을 분석하다가 퇴근길에는 노란 꽃창포가 함초롬한 작은 연못에 들렀다. 부드러운 저녁 빛이 수평선에 가로로 길게 누우면 드문드문 조약돌처럼 떨어진 작은 집마다 불이 켜졌다. 벚꽃이 지면 조팝꽃이 피고 수수꽃다리와 모과나무와 코스모스가 차례로 계절을 알렸다. 뒤영벌이 떠난 오솔길에서 수줍게 익은 까마중을 터지지 않게 손바닥에 살포시 담아 관사로 걸어오는 동안 아껴 먹었다. 한참을 뒤돌아 봐도 어여쁜 길이다. 아담한 수양벚나무 한 그루가 다소곳하게 서 있는 우체국 모퉁이를 돌아 4층 오피스텔에 들어와서 창문을 열면 그새 푸르스름해진 들판을 차분한 고요가 포실하게 감쌌다. Jean Louis Steuerman이 연주하는 바흐의 ‘파르티타의 밤’을 들으며 화인이가 보내준 일목일과 머스크멜론을 먹었다. 겨울에는 털목도리를 칭칭 두르고 저만치 강 하구에 가서 검은머리물떼새 무리를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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