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5회로 연재됩니다】
저녁밥을 일찍 먹고 오빠와 공원에 핀 수선화 무리를 보러 나간 엄마가 아파트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 꽃샘바람이 쌀쌀한 저녁이다. 긁힌 왼쪽 광대뼈가 눈 밑까지 부어올라 검붉은 멍이 들고 무릎과 손바닥이 까진 엄마는 엑스레이를 찍는 동안 눈물을 흘려 방사선 기사를 애먹였다. 골절 안 되고 치아 멀쩡하고 뇌진탕 안 당해서 다행이라고 오빠가 연신 위로를 해도 컴컴한 방에서 자기 싫다고 거실 바닥에 요를 깔게 했다.
밤새 잠자리를 뒤척이던 엄마는 출근하는 등 뒤에서 휴가도 없냐고 엊저녁에 물은 말을 또 물었다. 힘없이 떨리던 엄마의 습한 목소리가 귀에 눅눅하게 고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후 반차를 냈다. 나를 끌어당기는 세상의 모든 중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오빠가 엄마 잔소리를 들으며 고사리나물을 볶고 데친 취나물을 조물조물 무치는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 나무에 연한 연두색 물이 오르는 작은 숲에서 산책을 했다. 탑신에 버짐이 핀 돌탑을 돌아 전시실로 들어갔다. 유리 진열관 안쪽에는 박제가 된 지나간 시간이 고아한 불빛을 받으며 관람객을 맞았다.
옛집 근처에 있던 시립박물관은 둘레 풍경이 마음을 붙잡은 곳이다. 주차장을 지나 경사진 길로 오르면 은사시나무 오솔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는 가리비 껍데기를 세워 놓은 것 같은 유원지 야외공연장 뒤로 바다가 나타났다.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를 읽다가 깜짝 놀라 이 장면을 반복해서 읽었다. “어둡게 바삭거리던 모래밭, 얼룩덜룩한 유원지의 원색들, 붉은빛이 음침하게 착색된 높다란 송전탑, 커다란 조개껍질을 세워놓은 것처럼 만들어진 야외무대, 길게 뻗친 긴 방죽과 군 작전지역이라고 쓴 붉은 표지판과 철조망” 눈 감으면 떠오르는 고향 풍경이 책 속에서 튀어나와 오랫동안 마음이 웅성거렸다.
해발 200여 미터가 안 되는 산 아래에 박물관이 생기자 약속이 없는 주말에는 설렁 걸음으로 산책을 나섰다. 빗살무늬 옆구리 한쪽이 떨어진 점토 항아리나 칙칙한 시서화보다 벚꽃나무 아래 의자를 더 좋아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날에는 의자에 누워 읽다만 헤르만 헤세를 배 위에 올려놓고 살랑대는 나뭇잎 사이로 엄지와 검지로 쭉 뜯어놓은 솜사탕 같은 구름을 쳐다봤다. 어떤 날에는 새파란 하늘바다에 향유고래가 우아한 지느러미를 흔들며 지나갔다.
벚꽃나무는 취업의 기쁨에 밀려 장렬히 잊혔다. 사색과 정서를 성과와 돈으로 교환하는 사회는 동물 농장이라고 욕하면서 일주일에 절반은 사무실에서 먹고 잤다. 나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의 모든 정보와 사연을 헤집으면서 정의를 실현한다고 부장이 침을 튀며 떠들 때마다 속은 편하겠다고 속으로 비웃었다. 메모지에 ‘정의-의-(?)-불의’를 썼다. 의와 불의 사이에 꼭 뭔가 있는 것 같다. 그게 무엇인지 몰라도 인간은 이쯤 살 듯싶다. 정의의 환상에 불나방처럼 달려들다가 나자빠진 몰골들을 목격하면서도 정의를 비난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삶을 무시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니 의와 불의를 서로 멱살 잡듯 곁붙이지 않고 그 틈새에서 숨을 쉬는 공간, 즉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는 시스템 바깥 공간도 존중받아야 한다.
-지난 토요일에 고향에 내려갔다 왔거든. 코 찔찔 흘리던 시절 친구 놈들을 만나서 거하게 놀았네 그려. 놀 때만 좋지 인석들은 평시엔 저승사자들이여. 요즘은 누구 조사하냐, 비리의혹으로 난리 난 도지사는 조사 안 하냐, 우리 고향 군수 놈 뒤 좀 캐봐라 등 날 만능해결사인줄 아는데 짜증 보통 나야 말이지. 그래도 이건 약과야. 작은 어머니 서울대 병원 입원시켜야 하는데 누구 아는 의사 없냐, 지 마누라 하고 베트남 여행 갈 건데 믿을만한 여행사 소개해달라고까지 하는데 와, 미치겠다니까. 맨날 등쌀이 보통이어야 말이지. 그래서 휴대폰에 불이 붙어도 쌩깠는데 작년에 울 모친 장례식 때 떼로 몰려와 생업도 접고 3일 동안 도와준 걸 나 몰라라 하면 인간이 아닌 것 같아서 이번에 작정하고 내려갔지
-네. 길어지는 얘기에요?
-이 사람이 증말. 내일 스트레스 받을까 봐 미리 풀어주려고 하는 얘긴데 그렇게 싹둑 잘라버리면 나 삐쳐. 된서리 내리기 전엔 무서리 내리고 무서리 내리기 전에는 몸을 준비해야 엄동설한 대비할 거 아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맞다. 몇 놈은 먼저 들어가고 3차까지 네 명이 남았거든. 이제부터 진짜 스토리가 나와. 마동석처럼 팔뚝이 장난 아닌 덩치에다 힘이 장사인 놈이 있어. 얘가 막국수 집을 해. 헐크 같은 덩치가 하늘거리는 국수 말고 있는 모습이 어울려? 미친 조합이지. 얘랑 죽이 잘 맞는 별명이 얌생이라는 놈이 있어. 남의 집 인분 푸는 일 했던 걔 아버지가 술 먹고 갈대숲에서 자다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가 노점에서 채소나 생선 팔면서 고생 많이 하셨지. 학교 다닐 때는 막국수집 아들 마동석이가 얌생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라면이나 꽈배기 같은 거 사 멕이고 그랬어. 네 명이서 시간도 늦었고 택시 타고 이만 찢어지자고 큰길로 나갔는데 얌생이가 근처 슈퍼마켓 앞에 주차한 마티즈를 보더니 마동석이한테 마티즈 들 수 있냐고 도발하는 거야. 마동석이 그깟 거 하면서 성큼성큼 걸어가서 차를 들어보는데 꼼짝도 안 혀. 그래서 아까 오줌을 그렇게 많이 누더니 거 봐라, 국숫집 때려치고 고깃집 해라, 그러면서 놀렸지. 마동석이 침을 한번 뱉더니 우리 보고 같이 들어서 옮겨보자고 하는 거야. 네 명이 마티즈 들기는 들었어
-그런 짓은 왜 하는 거에요?
-쪼다들이라 그래. 술까지 먹었잖아. 아무튼 들기는 했는데 발이 안 떨어져. 한 발자국도
-그래서 4차로 고고씽을 하셨다는 말씀이죠?
-빙고! 흐흐흐. 어때, 시트콤보다 웃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