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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화 Oct 29. 2022

기만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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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5회로 연재됩니다】


포천 톨게이트에서 빠져나와 군내면 지방도로를 탔다. 조종을 둘러싼 바위산 한쪽에 중장비가 바글바글 몰렸다.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떡갈나무며 너도밤나무 토막들이 뜨거운 아스팔트에 누워 있다. 면사무소를 50여 미터 지나쳐 농협주유소 마당에 차를 댔다. 환갑이 된 듯한 주유소 소장이 대단한 사건이라는 듯 때까치 목소리로 설명을 하며 사건 차량이 있던 골목으로 안내했다. 이 사건이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시시한 일은 아니다. 당선된 지 2년 조금 지난 지역구 국회의원이 아래가 발가벗겨진 채 차 안에서 죽은 일은 흔하지 않다. 고인이 지역에서 명망 높은 인물이고 선거 운동원 출신 여성이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동석한 사실은 호사가들의 호감을 얻어 조종 지명을 전국에 알리는 호재가 됐다.


면사무소 맞은편 지구대에 들러 전화로 미리 부탁한 조서를 읽고 걸어서 서미자 집을 찾아갔다. 2차선 지방도로에서 살짝 경사진 위치에 있는 면사무소 민원실 통유리창 안쪽으로 자잘한 다육이 화분이 올망졸망 놓였다. 민원실과 벽이 닿은 왼쪽에 곁방살이하는 것 같은 작은 조립식 건물 앞 벚꽃나무 틈새로 글씨가 지워지고 있는 대한노인회 지부 현판이 보일락 말락 했다.   

   

6월 초 선선한 오후우리 삼 남매는 애교쟁이 복순이와 초등학교 운동장엘 놀러 갔다. 애들 걸음으로 20분 걸리는 거리이지만 날쌘 포메라니안은 우리를 앞질러 단숨에 달렸다. 철봉에 매달리거나 그네를 타다가 입이 심심해지면 운동장 한쪽에 있던 벚꽃나무 아래로 몰려가서 쌉싸름한 버찌를 손에 새까맣게 물들이면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따 먹었다. 초등학교 정문 옆에서 문방구를 하는 은경이네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은경이에게 손을 흔들고 집에 돌아왔다. 나중에 상고를 나온 은경이는 초등학교 맞은편 농협에서 초록 리본을 맨 흰 블라우스에 회갈색 단복을 입고 우리 집 저금통장을 정리해 주고 대출금 이자를 계산했다. 상급학교가 갈린데다가 어린 시절 우정은 세속에 오염되어 퇴색하고, 게다가 우리 집 살림을 은경이가 꿰고 있는 게 싫어서 엄마에게 다른 은행을 가라고 성화를 부렸다. 은경이 책상 정면에서 사계절을 버티던 우람한 벚꽃나무는 새로 부임한 교장이 벌레가 많다는 이유로 잘라냈다. 추억과 순정이 사라진 자리에 둥근 지붕의 콘크리트 체육관이 들어섰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아홉 살 터울인 고종사촌 오빠에게 빌린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버찌는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인생의 풋내기인 열일곱 살은 아버지 주머니에서 훔친 돈으로 버찌를 사서 토할 때까지 실컷 먹고 다시는 버찌를 생각하지 않은 조르바를 이해하기는커녕 제멋대로 인생이라고 욕만 했다. 나중 일은 걱정 없이 당장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며 여자 열여덟 명과 놀아났다고 떠벌이는 조르바는 다혈질에 화끈한 성격이다. 매사에 차분하고, 누구를 만나든 공손하며, 밖에선 큰 목소리로 떠들지 말라고 인이 박히도록 가르친 아버지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내가 경제학 원론이나 국제무역관습 및 협약론 같은 골이 아픈 수업을 받을 때 해양학자가 된 사촌 오빠는 크레타 카잔차키스 무덤 사진을 국제우편으로 보내왔다. 홀쭉하고 기다란 나무 십자가 뒤로 넘실대는 검푸른 바다에선 금방이라도 삼지창을 든 포세이돈이 새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솟구칠 것 같았다. 전 세계 바다를 다니며 물고기 이름을 줄줄이 꿰던 사촌 오빠는 몇 년 후 지브롤터 해협에서 실종되어 영원히 바다의 신화가 되었다.


서미자 집은 면사무소 옆 곱창집 오른쪽 좁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간다. 골목으로 들어가자 1970년대 지은 새마을 주택 여남은 채가 오후 햇살에 색 바랜 지붕과 낡은 담장을 드러낸 채 지난 시간을 전시했다. 골목을 반쯤 들어갔을 때 눈앞에 진분홍 꽃숭어리가 보였다. 갈색 칠이 검버섯처럼 군데군데 변색된 현관문 앞에 모서리가 깨진 차양을 덧댄 집이다.     


시멘트 벽돌담에 바짝 붙어 까치발을 하고 한 송이를 살포시 건드리자 꽃무리가 파르르 떨었다. 옛집 앞뜰에 있던 배롱나무 키만 하다. 첫딸을 잃은 지 7년 만에 나를 얻은 아버지는 호리고타츠가 두 개 있는 부학장 집 정원에서 캐온 작은 배롱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백일동안 꽃을 피워서 목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 배롱나무는 어렵게 얻은 자식을 다신 잃고 싶지 않은 부모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배롱나무가 기우뚱하게 자라자 아버지는 철물점 5촌 당숙 집에서 구해온 지지대를 받쳤지만 그대로 삐딱하게 기둥이 굵어졌다. 엄마는 내가 고집을 피우며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부엌 창에서 내다보이는 삐딱한 배롱나무를 가리키며 성을 냈다. 늘 말끔한 신사복에 나비넥타이를 맨 부학장은 에나멜을 칠한 것 같이 번드르르한 깜장 피아트를 몰았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는 바람에 왼쪽 다리를 살짝 저는 부학장은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운전석 유리문을 내리고 꼬마 배롱이라고 불렀다. 아랫입술을 삐죽 내미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납작한 풍뎅이는 멀어져 갔다.


방학숙제를 일찌감치 다 끝내고 딱히 할 일이 없는 여름 방학에는 대문 안쪽으로 퍼진 등나무 그늘 아래에서 가장자리가 해진 왕골 돗자리를 펴고 찐 옥수수나 참외를 먹으며 뒹굴었다. 홍예문 큰 이모네 집에서 데려온 새끼 고양이를 서로 끌어안겠다고 오빠와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실랑이를 했는데 수학을 잘하던 오빠는 내기에 번번이 졌다. 엄마가 재봉틀로 만든 분홍색 물방울무늬 원피스나 허리에 고무줄을 넣은 리넨 반바지를 입고 탐스런 배롱나무 꽃과 연보라색 수국 꽃숭어리와 태풍에 쓰러져 베어낸 대추나무 둥치를 휘휘 감은 새초롬한 으아리 꽃을 그렸다. 담 너머로 넝쿨을 늘어뜨린 능소화는 나를 여러 번 괴롭혔다. 마디 잇기를 잘 못하는 나와 다르게 크레파스를 처음 손에 쥔 4살 때부터 부모님 감탄을 자아낸 여동생은 애잔한 능소화를 도화지에서 척척 재현했다. 여동생이 손재주를 물려받았다고 좋아한 엄마가 여동생 뺨에 뽀뽀라도 하면 나는 스케치북을 팍 덮었다. 맑은 날에는 호랑나비와 멋쟁이 나비가 꽃 사이를 날아다니며 꽃술에 머리를 박았다. 비가 개면 날개까지 새까만 물잠자리가 나타났다. 오빠와 나란히 앉아 물잠자리나 가느다란 실잠자리 날개를 그릴 때는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섬세한 잠자리 날개를 흡족하게 그리고 나면 삽상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꿈의 순항을 기대한 시간이었다.  


하나로 마트 뒷문이 보이는 레미콘 공장 초입에 어깨를 기댄 컨테이너 두동이 보였다. 경찰 조서에서 본 까무잡잡한 얼굴이 문을 열었다. 실거주지와 법적 주소가 다르면 주민등록 말소가 된다고 알려줬다. 조악한 기계자수로 멋을 부린 싸구려 공단 방석을 꺼내던 서미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우덜 같은 인생은 그 딴 거 한 개도 신경 안 써요. 시방 죽어도 누구 하나 울어줄 인간도 읎는데     


서미자가 손에 들고 있던 담뱃불을 유리 재떨이에 비틀어 끄고 창문을 열었다. 창문 너머 웃자란 개망초며 개똥 쑥이 뒤섞여 방안을 들여다봤다.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를 애써 피하며 가방에서 파일을 꺼냈다. 고인과는 언제 처음 알게 되었는가, 왜 그 시간에 차 안에서 만났냐, 두 사람은 어떤 사이냐, 고인에게 돈과 관련된 얘기를 들은 게 없냐, 나는 정부 조사관이므로 경찰이나 지방 검찰보다 영향력이 크다, 당신 진술은 국정 운영에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 사실과 다른 진술을 하면 안 된다고 겁박을 섞어 속을 떠봤다.      


-경찰에 다 말한 걸 뭣 땜시 또 물어본다요. 대답하지 않으면 가막소 가요?  

   

냉장고에서 맨 손으로 얼음을 꺼내 유리컵에 담던 서미자 목소리에 가시가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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