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남편은 어부가 되었다.
“여보! 내가 있잖아. 드라마를 봤는데… 흑.. 그게 있잖아.흐어어어어 으앙!!!!!”
그렇게 나는 늘어진 티셔츠 양팔이 축축하게 젖은 채로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내고 있었다.
“뭔 드라마길래 자꾸 울어. 울지 마. 울면 못 생겨져.”
딸아이를 달랠 때 하는 식상한 멘트로 나를 달래는 남편이다.
나름 동네에서는 배 타기에는 아깝다는 인물인 사람인데 하필 또 잘 생긴 박보검이 배를 타네.
내가 안 울 수가 있나.
서울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던 나는,
늘 그랬었다.
미국 시민권 있는 남자 만나서 미국이고 일본이고 한국이고 어디든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살 거라고……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이가 말했다.
‘나는 섬놈한테 시집 안 갈 거라고!’
어느 해 봄.
친구가 지인의 결혼식에 혼자 가기가 멋쩍다며 함께 가자고 했고 그렇게 나는 따라나섰다.
그때 나는 왜 그 말을 했을까?
“나는 이 동네는 살라 해도 못 살 것 같아.”
하늘이 비웃었던 걸까?
그 뒤로 4개월 뒤쯤 남편을 만났고, 나는 그때 ‘그 동네’에 자그마치 12년째 살고 있다.
미국으로 훨훨 날겠다는 꿈 대신 시골 어촌마을 출신의 총각을 만난 것이다.
그래도 그 총각은 신혼여행은 꼭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내 말을 무던히 잘 따라 주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울다 웃다를 반복했는데 어쩌면 이렇게 단전에서부터 눈물이 쏟아지는지……
관식이가 배를 타게 되는 것도 너무 짠했고, 매일 고된 노동을 하고 와서 쓰러져 자는 모습을 보며 마침 일터에 나간 남편이 생각나서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정말 나를 울게 한 것은,
관식이가 귀가 길에 손에 들고 온 대입시험 문제집.
갖고 싶은 물건이 있다고 조르면
매번 “기다려봐.” 하고는 여유가 될 때마다 잊지 않고 선물해 주던 남편이 오버랩되었다.
내가 공부한다고 했을 때도, 내가 글을 쓴다고 했을 때도 조용히 응원해 주고 기다려준 사람이다.
관식이만큼 우리 남편도 중학교 때 운동 유망주였는데
지금 우리는 현재에 만족하며 아이들 키우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다.
드라마 속 중년의 애순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내 삶이 얼마나 빛나는지 가만히 떠올려 본다.
주름진 내 얼굴을 여전히 예쁘다고 해주고, 아이들과의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야말로 ‘무쇠’ 같은 남편이 있다.
‘노스탤지어도 모르는’ 관식이처럼 답답할 때도 있지만 양배추 대신 팔아주던 모습처럼, 궂은 일은 나 대신 자기가 다 하려는 그 마음을 안다.
어제 자기 전에 딸아이가
“엄마, 나는 엄마가 엄마의 할머니처럼 90살이 훨씬 넘도록 살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지금 나의 꿈같은 삶.
인생.
얼마나 반짝였던지.
90살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