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Tarot)
본관 입구 로비는 건물 크기 대비 좁은 편이었다. 세 갈래 길이 나 있었고 흡사 미로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때 마침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놔! 이거 안 놔!"
저 여자의 목소리가 아린의 목소리가 맞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둘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성진은 수술한 다리가 약간 불편한 듯 뛰면서 몸의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쳤다.
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코너를 돌아보니 양쪽으로 대칭되어 있는 거대한 철문이 보이고 모두 다 그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철문 앞에는 검은색 슈트를 차려입은 남성이 서서 출입을 막고 있었다. 성진은 당장 들어갈 것처럼 '이제 그만 귀찮게 해라'는 어투로 오른 손등이 보이게 휘휘- 저으며 말했다.
"어이 거기, 다치고 싶지 않으면 비키세요."
그러자 그 남자는 '들어올 테면 들어와 봐'라는 자세로 방어를 하려는 듯 몸을 살짝 숙였다. 슈트로 가려진 다부진 몸매가 상당히 세게 느껴지고 빈틈이 없어 보이는 게 아까 무리들의 중간 보스 같았다.
성진이 떠 보려고 날린 오른쪽 잽을 그는 가볍게 쳐냈고 왼 주먹 훅이 들어갈 때 자연스럽게 왼 손바닥으로 공격을 막았다. 그는 바로 오른쪽 팔꿈치를 뻗어 성진의 턱주가리를 크게 날렸다. 단 한 번의 공격이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
성진이 한 방에 나가떨어지자 준아는 그와 정면에서 대칭한 채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까닥- 들었다 내리며 쓰러 진 성진을 가리켰다. '데리고 꺼지라'는 거였다.
준아는 알겠다는 듯이 성진 쪽으로 가서 부축하려는 시늉을 했고 성진도 따라서 준아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성진을 부축하고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남자도 그 제서야 뒷 허리춤에 차 있는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그가 무전기를 입에 대는 순간 성진은 그 자의 오른쪽 다리로 태클을 시도했다. 그는 재빨리 다리를 뒤로 빼 깊게 들어온 태클을 피했다. 곧바로 그 다리를 높이 들어 구두 굽 뒤꿈치를 써서 성진의 등을 찍어 버렸다.
"으- 악-!"
성진이 고함치는 그 타이밍을 준아는 놓치지 않았다. 그 자의 옆구리 명치 부분을 오른발 돌려차기로 꽃아 넣었다.
준아는 고교 시절부터 국정원에 가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가산점을 받기 위해 남들보다 늦은 십대 후반부터 검도와 태권도를 시작했고 결국 6년 동안 각각 3단 자격을 취득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기는 바로 스피디한 발차기였다.
명치를 맞은 남자는 윽-하는 울림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성진이 다급하게 그의 두 팔을 압박하고 말했다.
"어서 들어가!"
철문에 다가가 보니 다행스럽게도 틈새가 살짝 벌어진 게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여자들이 우르르 들어간 후 그가 문을 잠글 새 없이 곧 성진과 준아가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생 두 명에게 이렇게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준아는 오른손으로 철문을 더 당겨 그 틈새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 펼쳐졌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고풍스러운 느낌의 가구들이었다. 밝은 색의 화려한 가구들은 오래된 건물과 상반되게 세련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길게 늘여 퍼져있는 붉은색 카펫에는 골드 빛깔의 무늬가 새겨 있어 모나코 궁전의 내부와 같이 점잖으면서 동시에 화려하게 보였다. 짙은 나무 향 때문인지 괜히 안락하게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고 마치 다른 차원 게이트를 통과한 것 같았다.
'본관 안에 이런 대 저택이 숨어 있을 줄이야.'
바로 그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여기까지 들어온 학생은 지난 70년 동안 없었는데 자네가 처음이네, 처음이야."
믿기지 않는 듯 처음을 강조하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한영대 기획처장이었다. 준아는 그를 경계하면서 따져 물었다.
"누구시죠? 방금 여기로 납치된 여학생 어디 있어요?"
"흐.. 하하-!"
준아는 기획처장의 웃음에 기분이 나빠졌다.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세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이 상황이 웃겨요?"
잠깐 멈칫했던 기획처장은 다시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답했다.
"그 학생은 귀가 잘 시켰으니 당장 돌아가세요. 무단 침입죄로 유치장 가기 싫으면.. 당장!"
'학교 건물에 학생이 출입한 게 무단침입죄라니!' 웃기는 얘기였다.
말로는 안 되겠다 싶은 준아는 기획처장에게 다가섰다. 준아의 공격권 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다급히 오른쪽 팔을 쭉 뻗었다.
그의 두 번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준아의 등 뒤 편 위 쪽 벽면이었다.
준아의 시선은 그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2미터가 넘는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부부로 보이는 남녀와 두 명의 아이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왼쪽 위 흰색 원피스를 입은 예쁘장한 소녀는 바로 앞에 앉아있는 엄마로 보이는 여자 어깨에 손을 얻고 있었다. 그 여자는 팔을 올려 소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소녀 옆에는 조숙해 보이는 사내아이가 무표정한 채 감정 없이 서 있었고 그 앞에 가장으로 보이는 남성이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준아는 사진을 쭈욱- 살펴보다 자신도 모르게 처음 눈에 들어왔던 소녀의 얼굴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저 소녀.. 아린과 닮았다!'
준아는 일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때 낯선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소리 없이 다가오는 한 남자. 아린이 밤늦게까지 낯선 남학생과 있다는 것을 보고 받고 즉시 납치를 지시했던 장본인, 한영대의 후계자 윤지혁 교수님의 등장이었다.
"아니, 이 늦은 시간에 남의 집에서 누가 이렇게 소란이야!"
큰소리를 치며 준아 앞에 섰다. 언제 봤던 사람인 것 마냥 낯선 기색 없이 준아를 쳐다보았다.
"실례했습니다. 03학번 강준아입니다."
'직접 보니 더 풋내기 구만.' 그는 속으로 준아를 비웃었다.
준아는 아린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더 불리한 상황을 막고자 이를 악 물고 최대한 공손한 인사로 선수를 쳤다. 곁에서 눈치를 보던 기획처장이 말을 이어받았다.
"이분께서는 차기 총장 후계자 화학공학과 윤지혁 교수님입니다. 아린 아가씨는 교수님이 아끼는 여동생이고요."
준아는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이곳은 서울에서 가장 넓고 웅장한 대 저택이었다. 그들이 소유한 재산은 한영대 캠퍼스 자체였고, 총장의 가족은 이곳에서 70년 넘게 대대로 살고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