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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작가 Dec 14. 2024

8화 굼터

타로(Tarot)

  "좀 괜찮아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저는 03학번 강준아입니다."


  성진은 쑥스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아.. 뭐.. 그 정도야 뭐.. 같은 학교 학생끼리 도와줄 수 있죠. 뭐.."

  갑자기 말을 높이는 태도가 이상해서 준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는 최성진입니다. 05학번이고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더 후배네요."


  "아.. 그랬군요. 후배님한테 신세를 졌네요. 하하"


  "신세는요 뭘. 하하"


  둘은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본관 앞 두 마리의 호랑이 석상 눈이 깊은 새벽 밤 속에서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본관 안에서 보고 들은 내용은 절대 발설하지 않기'로 각서와 지장을 찍고서야 새벽 두 시가 되어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택 무단침입과 폭행에 대한 고소 당하지 않기 위해 해야만 하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성진이 합리적인 의심을 하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살짝 흘기며 준아에게 물었다.

  "근데.. 둘이 벌써 사귀는 건가요?"


  "에? 아니에요. 그냥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요. 뭘, 사귀다니요! 친구가 된 거죠."


  "사실.. 아까 낮에 타로 볼 때 구경했거든요. 후배들이 예쁜 여자 있다고 자꾸 가자고 졸라서 갔다가.. 다시 학과 주점에 가봐야 해서 끝까지 있었던 건 아니고요."


  "아, 그때 그 자리에 왔었군요."


  "네, 그리고 밤에 주점 심부름 좀 하느라 광장에 나왔다가 둘이 같이 있길래 알아봤는데 뭔가 상황이 자꾸 이상해 보여서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만, 껴들게 되었네요. 제가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미라.."


  "아.. 그랬군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이것도 인연인데 괜찮으면 한 잔 할래요? 도와준 것도 보답할 겸 제가 한 잔 살게요. 오늘 같은 날은 기숙사에 들어가도 잠이 안 올 것 같아서요."


  "한잔- 좋죠! 근데 주점들이 다 문 닫았겠죠. 정문 앞 번화가에 제 단골 집이 하나 있는데.. 굼터라고요."


  "굼터?"


  준아는 굼터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래서인지 괜히 정감이 가는 기분이라 선뜻 응했다. 굼터는 생선구이가 메인 메뉴인 작은 포장마차였다.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는 마치 학과 주점을 연상하게 했다. 두 사람은 고등어구이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형님, 저 보다 나이도 많고 선배인데 말 편하게 하세요. 그게 저도 편해요. 둘 다 복학생인데 편한 게 좋잖아요."


  성진이 먼저 준아에게 말을 놓을 것을 권했다. 준아 못 이기는 척 말을 놓았다.


  "그래.. 그럼.. 너도 나한테 말 편하게 해. 근데 여기 분위기 참 좋다. 난 포장마차 같은 스타일이 좋더라. 축제 시즌에 학과 주점이랑 닮았고.. 뭔가 프랜차이즈처럼 형식에 갇혀 있는 느낌도 안 들고.. 자유롭잖아."


  "맞아요! 저도 이런 스타일이 편하더라고요. 여기 이모님 생선구이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고등어구이 하나면 소주 세네 병은 금방이에요. 이래서 제 단골집이랍니다."


  성진은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준아는 소주 한 잔이 달게 느껴졌다. 소주보다 쓴 일이 너무 많은 날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 '윤아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상하게 술이 한 잔 들어갈수록 더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러다 회상을 가로막는 얼굴이 떠올랐다. 윤지혁. 그 생기 없는 차가운 표정이 생각나자 고개를 두 번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주점 심부름했다는 건 머야. 혹시 학생회 활동하는 건가?"


  "예, 집행부 좀 도와주고 있어요. 일찍 복학했더니 동기들 다 군대 가 있어서 심심한 찰나에 잘 되었죠."


  "아! 반갑네. 나도 과대하고 있거든."


  "아, 그래요? 우린 오늘 아니더라도 언젠간 보게 될 사이였네요. IT대학이랑 법학대학 건물도 가까운 편이 잖아요."


  "그러게, 오늘 보기를 잘했다. 나 혼자서는 아마 그들을 못 당했을 거야. 정말 고맙다!"


  "에이.. 고맙긴요. 뭘.."


  둘은 서로의 잔을 반갑게 부딪혔다. 둘 다 팔 홉이 가득 찬 소주잔을 한숨에 비웠다.


  "그러면 법대 다니니까.. 나중에 사시 생각하고 있니~?"


  "뭐, 그렇죠. 다들 보니까요. 형은 IT 쪽이니까 취직 잘 되겠어요~"


  "아.. 그렇다고 하더라고. 근데 난 좀 길이 달라."


  "엥? 전공이랑 다른 생각하시는 거예요?"


  "응.. 그렇지. 내 꿈은 말이야. 국정원이야."


  취기가 올라온 준아가 솔직한 얘기를 털어놓자, 성진의 얼굴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준비하고 있거든. 아버지한테 영향을 받아서 '정직'하게 살기로 결심한 뒤로 내 좌우명은 두 개야. '바른 길에 서자랑 약자 편에 서자."


  "오- 멋진데요~ 근데 왜 국정원이에요? 거기가 바르고 약자 편에 서는데 인가? 지나가던 개가 웃을 것 같은데."


  준아는 비꼬는 성진의 태도에 그럴 수 있다는 표정으로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가장 바르지 않고, 가장 약자 편에 서기 힘든 곳이 어딘가 찾아봤지. 그게 국정원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거기에 가서, 가장 안 되는 곳에 가서 그것을 바꿔 보려고. 그렇게 만들어 보려고."


  성진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듯이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잔 하시죠. 국정원.. 아니 꿈을 위하여. 하하"


  "잠깐..


   근데 말이야, 오늘 비슷한 곳을 가본 것 같아서.. 바르지 않고 약자 편에 서지 않는 곳."


   "..."


  "성진아, 거기.. 우리 오늘 들어갔던 곳.. 한번 제대로 밝혀 보려는데.. 나 좀 도와줄래?"


  "... 감당할 수 있겠어요? 오늘 본 건 빙산에 일각이에요. 요~만큼 일각. 이 형 진짜 위험하네!"


  "하하.. 내가 말이야..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


  "엥? 뭐여.. 혹시 타로? 하하하. 이 형 많이 취했네."


  "그래! 타로! 내가 타로 점술가다! 하하!"


  소주병은 어느덧 네 병이 비어 있었고 다섯 병 째 술이 조금 남아 있을 때쯤 밤하늘은 자취를 감추고 다음 날이 새고 있었다.

  드르르륵- 굼터의 셔터가 내려갔다. 성진은 취한 준아를 부축해서 준아가 사는 기숙사까지 함께 걸어갔다.


  드르르륵- 준아의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린이예요. 문자 보면 연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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