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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Jan 13. 2019

자면서 밥은 못 먹어도 운전은 한다

도로 위의 시한폭탄 졸음운전

열 시간 넘게 자고 일어난 날 오후 세시 자유로를 달리고 있었다. 옆에는 위경련이 일어나 계속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엄마의 손도 잡고 있었다. 분명 온 신경이 곤두서 운전 중이었는데 8초간 눈을 감은 나는 옆 차선에 달리던 트럭을 부드럽게 밀어 4차선까지 보내는 교통사고를 냈다. 충분히 잠을 잤고 긴장한 상태에서 갑자기 눈이 감긴 이유는 내가 기면증 환자여 서다. 뇌에서 나를 깨우는 호르몬이 나오지 않아 눈은 뜨고 있어도 뇌가 자는 상태였다.


그동안 난 그저 잠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사고를 내고도 바로 진단과 치료를 받지 않았다. 기면증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정상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몸을 깨우는 호르몬을 만들지 않는 내 뇌도 처방받은 약을 먹으면 정상인 수준의 각성상태가 된다. 하지만 지금도 운전을 못한다. 내가 도로 위의 살인 병기이자 시한폭탄이었던 사고 순간을 잊지 못해서다. 광역 버스가 승용차 위에 올라타 브레이크도 밟지 않고 40m를 졸음운전했다는 뉴스를 보며 내가 사고를 낸 순간이 떠올라 죄책감이 들었다.


출처: 데이터 솜(DataSome)
출처: KBS1 <고속도로 치사율 1위 졸음운전 사고…‘충격요법’ 확대> 2018. 11. 26

지난 10년간 고속도로 교통사고 발생원인 1위는 졸음운전이었다. 자동차는 아무리 가벼워도 탑승자를 제외한 차체의 무게만 1톤이 넘는다. 게다가 고속도로 위에서는 평균 시속 100km 내외로 달리기 때문에 3 초만 깜빡 졸아도 100m 정도는 거뜬히 이동한다. 뇌가 잠에 빠진 상태여서 어딘가에 부딪혀도 재빨리 브레이크를 밟거나 방향을 트는 등의 반응을 하지 못해 더 크게 다치는 것이다. 졸음운전자는 위험을 회피 반응이 없어 대형사고로 이어지고 치사율은 20%로 일반 교통사고의 3배가 넘는다. 음주운전과 비교해도 사고건수는 음주운전이 더 많지만 사망할 확률은 졸음운전이 훨씬 높다.



모든 졸음운전의 원인이 기면증은 아니다. 2017년 11월 교통안전공단의 '일반국민 교통안전의식 설문조사' 결과 중 위험운전 경험률을 보면 71% 응답자가 졸음운전을 해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졸음운전의 원인은 불면증, 식곤증, 감기약 복용, 야간 운전, 장시간 운전, 피로 누적, 자동차가 너무 조용해서 등으로 다양했다. 하지만 수면장애가 있는 경우 졸음운전을 할 확률이 높아진다. 불면증이 있는 경우 1.78배, 수면무호흡증이 있는 경우 2.09배, 기면증이 있는 경우 8.78배로 교통사고 발생 위험이 증가한다.(Philip P, Sagaspe P, Lagarde E, et al. Sleep disorders and accidental risk in a large group of regular registered highway drivers. Sleep Med 2010; 11:973-979) 보통 사람도 운전하다 졸음이 올 수 있지만 기면증이 있다면 도로 위의 시한폭탄이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나 같은 기면증 환자는 운전을 할 수 없는 것일까?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기면증은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없는 질병이 아니다. 자진신고를 하지 않는 이상 도로교통공단에서 운전면허를 취득하려는 사람이 기면증 환자인지 모른다. 기면증 환자여도 무리 없이 운전면허를 딸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기면증 환자가 자진신고를 했을 경우 ‘일상생활이나 운전면허 취득에 무리가 없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제출하면 된다. 이후 운전면허적성판정위원회에서 적격 통보를 받으면 기면증 환자는 운전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기면증은 현행 도로교통법의 운전 결격사유 질병이나 뇌전증류의 질병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제45조(과로한 때 등의 운전 금지) 자동차등 또는 노면전차의 운전자는 제44조에 따른 술에 취한 상태 외에 과로, 질병 또는 약물(마약, 대마 및 향정신성의약품과 그 밖에 행정안전부령으로 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하 같다)의 영향과 그 밖의 사유로 정상적으로 운전하지 못할 우려가 있는 상태에서 자동차등 또는 노면전차를 운전하여서는 아니 된다.  <개정 2013. 3. 23., 2014. 11. 19., 2017. 7. 26., 2018. 3. 27.>

제82조(운전면허의 결격사유) 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은 운전면허를 받을 수 없다.  <개정 2014. 12. 30., 2016. 5. 29.>2. 교통상의 위험과 장해를 일으킬 수 있는 정신질환자 또는 뇌전증 환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람5. 교통상의 위험과 장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마약ㆍ대마ㆍ향정신성의약품 또는 알코올 중독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람


하지만 대부분의 기면증 환자는 확진을 받아도 도로교통공단에 자진신고를 안 한다. 신고를 하지 않았을 경우 현행법상 제재도 없다. 아니면 나처럼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 본인이 기면증 환자라는 것을 모른다. 기면증 환자들도 확진을 받기 전에는 보통 사람들처럼 운전하다 잠이 오면 '내가 피곤해서 잠깐 졸았구나.'하고 생각하고 만다. 한 수면클리닉의 원장은 “어떤 환자의 경우 졸음운전으로 폐차를 4번이나 하고 나서야 병원을 찾았다”라고 말했다. 대한 수면학회에 따르면 국내 기면증 환자 중 실제 치료를 받는 환자는 10% 미만이라고 한다. 기면증에 걸린 사람과 주변인들은 그저 만성피로 또는 의지가 부족해서 잠을 못 깨는 정도로만 생각할 뿐 기면증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해서 그렇다.


해외에서는 기면증 환자의 운전을 금지할까? 기면증 환자의 항공기나 유조탱크 화물선 등의 운전은 대부분 금지하고, 일반 차량 운전은 조건부 허용한다. 미국은 면허를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약을 복용하고 증상을 보이지 않으면 운전면허를 내준다. 뉴욕 주에서는 1년, 켄터키 주에서는 90일 동안 치료를 받으며 기면증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전문의의 소견서를 제출하면 된다. 캐나다의 기면증 환자는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음을 증명하는 의사 소견서를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 영국은 수면무호흡 증후군을 진단받을 경우 교통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운전하다가 이 질환과 관련된 사고를 내면 1,000 파운드(한화 146만 원 정도) 이하의 벌금을 낸다. 해외 여러 국가는 기면증 외에도 고령 운전자, 치매환자 등은 매년 지속적인 치료를 받으며 운전이 가능한 상태라는 전문의의 소견서와 함께 인지검사를 통과해야 매년 면허증이 갱신된다. 모든 수면장애 환자의 운전을 막는다면 환자들이 진단과 치료를 기피하므로 사후관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한국은 지난해 <국민의 도로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교통안전 종합대책>에서 졸음운전을 방지를 모색했다. 하지만 기면증 환자 등 수면 장애를 가진 운전자에 대한 대책은 없다. 대신 모든 운전자의 졸음운전을 방지하는 대책이 담겨있다. 국토부는 졸음운전 사고를 예방하려고 신규 제작되는 화물차와 모든 승합차에 첨단 안전장치 부착을 2021년까지 단계적으로 의무화했다. 새로 만드는 자동차들은 국제 기준에 맞게 비상 자동 제동장치(AEBS), 차로 이탈 경고장치(LDWS)를 장착해야 한다. 이는 신규 제작 차량 대상이며 이미 운행 중인 차량은 화물차에 한해 부착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국토부는 앞으로 운전자 졸음운전 모니터링 및 경고장치 신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부착하는 차량에는 보험료 할인 등의 혜택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수면장애를 치료 중인 환자도 졸음운전 방지 스마트 IoT장치를  버스, 화물차 운전기사님들처럼 의무로 부착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일반인도 졸음운전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기계가 필요한데, 일반인의 9배 가까이 졸음운전을 할 확률이 높은 수면장애 운전자는 반드시 장치를 부착해 잠이 왔을 때 깨어나야 한다. 그래야 큰 교통사고를 미리 방지할 것이다.


버스 운전자 졸음 및 부주의 경고 장치 시스템 구성도. 버스운전기사뿐만 아니라 기면증 등의 수면장애를 치료 중인 환자도 스마트 IoT장치가 필수다. 출처: 도로교통공단
파나소닉 <조는 얼굴'>시스템. 카메라와 빅데이터로 운전자의 얼굴을 분석해 졸음운전을 할 것 같으면 경고한다.


기면증 환자가 도로교통공단에 자진 신고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도로교통공단, 경찰청에 기면증 치료 데이터를 공유하는 방법도 있다. 모든 운전자의 졸음운전은 동공 인식, 심박수와 산소포화도 실시간 측정 등 현재 활발하게 개발 중인 졸음운전 방지 스마트 기술을 통해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졸음의 생리적 징후는 모든 사람이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증 기면증이나 수면 무호흡증 등 수면 장애를 가진 환자의 경우 치료를 받는지, 증상이 호전됐는지 등을 확인하는 추가 조치가 필요하다. 기면증 환자의 운전을 금지한다면 기면증 진단을 받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때문에 해외에서는 수면장애 환자의 운전면허 취득 조건을 전문의와 함께 만들고, 운전면허를 취득한 수면장애 환자의 치료를 도우며 추적 관리한다. 또한 항공기, 화물차, 대중교통 운전자의 수면장애 여부 진단은 필수로 하고 있다. 수면 장애 진단비용은 100만 원이 넘어 일반 운전자가 모두가 필수로 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다.


수면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진 신고를 하고, 꾸준한 치료를 받으며 전문의가 운전을 해도 되는 상태라고 보증을 했을 경우에만 운전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를 위해 경찰청, 수면장애 전문의, 기면증 환자 등의 의견을 모아 운전면허 취득과 갱신 관련 도로교통법의 개선이 필요하다. 환자들은 졸기 전에 운전자를 깨우는 스마트 졸음운전 방지 기기를 반드시 설치하고 활용하는 것이 좋다. 스마트폰과 스마트 워치의 졸음운전 방지 어플을 활용하는 것도 졸음을 방지하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약을 복용했을 때 부작용은 없는지, 약효가 얼마나 가는지를 의사와 확인해 본인이 운전 가능한 컨디션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1986년 설립된 기면증 네트워크 매니저 조이스 스캐널은 "평생 기면증을 앓아왔는데, 절대 한 번에 20분 이상 운전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나를 비롯한 수면장애를 가진 사람은 단거리 출퇴근, 집 앞 마트, 병원 등을 갈 때만 완전히 깨있는 상태에서 운전하는 것이 스스로와 동승자, 도로 위의 무고한 시민들을 지키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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