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도 백구도 처음입니다만]
집 바로 앞에서 큰길까지는 밭과 논이 계속 이어져 있는데, 담장 바로 건너편의 밭을 일구는 할머니께서는 늦은 봄이면 항상 고구마를 심으셨다. 고구마는 독특하게 씨앗이나 구근을 심는 것이 아니라 잎이 달린 줄기, 즉 ‘순’을 심는다. 뿌리를 잘 내리게 하려고 비가 오기 전날 심는 경우가 많은데, 행여 비 소식이 없으면 2~3일 내내 물을 주어 밭을 충분히 적셔준다. 한번은 순을 심은 다음 날, 그냥 비가 아니라 마치 태풍을 동반한 듯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애써 심은 고구마 순이 꽤 많이 휩쓸려 버린 적이 있다.
허리도 잘 못 펴는 할머니께서 겨우겨우 삽목을 끝냈는데, 이거 큰일이다 싶어 복구를 도와 드리러 나갔다. 평소에는 도와드리려고 해도 대부분 어르신께서 농사일은 손도 못 대게 하셨다. 일손이 서툴러 시켜봤자 답답하실 만도 하거니와, 농사일이 워낙 힘들고 험해서 웬만하면 친자식에게도 안 시키는데, 당신 몸이 힘들다고 남의 자식에게 거들어달라 하지 않으시는 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하지만 이번은 비상사태라 극구 만류하시는데도 달려 나가 폭우에 휩쓸린 고구마 순을 주워와서 다시 하나씩 심는 걸 도와드렸다. 괜히 마음이 안 좋아서 위로 드린답시고 “잠잠하다가 왜 하필 고구마 심고 나니까 그렇게 비가 퍼붓고 난리야! 안 그래요? 할머니, 많이 힘드시죠?” 큰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할머니께서는 손을 멈추지도 않고 허허 웃으시며 농사가 그렇다고 하셨다. 비가 안 와도 분명 다른 이유로 밭을 일궜어야 할 텐데, 이렇게 큰비가 한번 오고 나면 수확할 때까지 그냥 놔둬도 이슬 맞고 가랑비 머금고 잘 자라니 차라리 잘 된 거라며 웃으셨다. 농사일은 손이 놀면 흉년이 든다고 하시며, 내 손보다 훨씬 크고 마디마디가 불룩 튀어나온 휘고 굽은 손가락을 쫙! 펼쳐 보이셨다. 할머니에 비하면 고생이라고 해본 적 없는 내 손이 부끄러워 장갑을 끝까지 벗지 않았다.
곡식이 실하고 건강하게 영글기 위해서는 값비싼 비료만 한가득 들이붓는다고, 뜨거운 햇볕만 강렬히 내리쬔다고, 비만 주룩주룩 퍼붓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 작은 손길 하나하나가 꾸준히 모이고 쌓여야 함을 배웠다.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대할 때, 다가올 내일도 건강하고 알차게 영글겠지?
그해 겨울에 들어서던 어느 날,
낮은 나무 대문 아래에는 크고 실한 호박고구마와 밤고구마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 야 이… 고구마 같은 집사야. 공 말고 간식을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