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를 함께 담그는 친구
난 혼자서는 김치 안(못) 담근다. 혼자서는 하기 싫다. 생각만 해도 개피곤. 근데 같이 하는 건 좋다. 같이 해도 고되긴 마찬가진데 그걸 상쇄하고 남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나한테 김치는 엄마한테 얻어먹는 김치와 친구와 함께 담그는 김치가 있는 셈.
근데 그게 친하다고 무조건 함께 김치를 담글 수 있는 게 아니다. 함께 김치를 담그려면 여러 가지 합이 잘 맞아야 한다.
일단 입맛. 특히 간이 맞아야 한다. 액젓, 젓갈을 쓰는 방식도 맞아야 한다. 누군 간간한 걸 좋아하고 누군 심심한 걸 좋아하고, 누군 젓갈을 많이 쓰고, 누군 젓갈 냄새를 싫어하고, 누군 맵고 칼칼하게 누군 시원하게, 누군 달달하게 누군 담백하게, 입맛이라는 게 천차만별이다. 이 취향이 완전히 같을 순 없어도 어느 정도 비슷하게 가야 함께 김치를 담글 수 있다.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핵심은 역할 분담이나 협업 방식이다. 김치는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고난도의 음식이다. 장을 보는 것에서부터 재료를 다듬고, 씻고, 절이고, 양념 만들어서 버무리는 것까지 단계도 많고 할 일도 많다. 근데 일이라는 게 모두가 잘하는 게 아니고 일을 똑같이 분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단계에 우르르 몰려다닐 순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누군가는 먼저 시작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더 하게 되거나 덜 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 불균형적인 노동구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실수하거나 잘 못해도 받아들여야 한다. 내 김치 친구 하나는 채소를 못 썰고 느려 터졌다. 근데 못한다고 놀리면서 하는 게 너무 즐겁다.
결과에 쿨해야 한다. 진인사대천명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재료로 최선을 다해 김치를 담갔는데 맛없다면 우리가 아니라 하늘이 잘못한 거다. 결과가 중요하고 결과에 목을 매면 함께 김치를 담글 수 없다. 누군가를 탓하는 사람과는 같이 할 수 없다. 김치를 담그다 보면 더 많은 경험이 있거나 혹은 더 용감한사람,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리더십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져서는 안 된다. 폭망 해도 본전 생각나지 않아야만 함께 김치를 담글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오래 사귀어서 서로 잘 아는 찐친이라야 가능하다. 서로 입맛도 알고, 취향이 비슷한 취향 공동체이면서 서로 신뢰하고 좋아하고, 실패도 즐거워할 수 있는 친구라야 김치를 함께 담글 수 있다. 모든 친구들과 함께 김치를 담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김치를 담글 수 있는 관계라면 특별한 친구인 것이다. 그것도 여러 해를 거듭해서 하고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나에겐 김치를 함께 담그는 두 무리의 친구들에 있는데 한 팀은 원래 친한 친구들이었고, 한 그룹은 김치를 담그다가 친해진 케이스다. 우연히 함께 김치를 담가보니 서로 잘 맞는 것을 확인하고 친해진 케이스다.
어제 갑자기 열무가 생겼다. 우리 집 가까이에서 텃밭 농사를 짓는 친구가 열무를 뽑아가라고 했다. (그 친구는 열무는 나눠주지만 함께 김치를 담글 정도의 관계는 아닌 것) 친구들에게 함께 열무김치를 담글 거면 뽑아오겠다고 했더니 함께 담그자고 한다. 한 친구는 그냥 열무김치, 한 친구는 물김치를 담그자고 해서, 둘 다 담그기로 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된다. 나는 열무랑 얼갈이를 뽑아와서 다듬고 찹쌀풀을 미리 쑤어두었고, 한 친구가 나머지 재료들을 사 왔다. 나머지 한 친구는 김치 담그면서 먹을 양식을 챙겨 왔다. 그렇게 모여서 함께 담근 열무김치가 뽀글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중이다. 김치를 담글수록 우리 관계도 익어가는 느낌이 든다. 함께 담그면 함께 익어가는 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