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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Sep 15. 2022

#1 회사를 그만두었다

서른세 살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5년 넘게 다닌 회사였다. 미국에 본사를 둔 외국계 기업이었고, 근무 조건도 좋았다. 강남 파이낸스 센터의 꼭대기층에서 내려다보는 테헤란로는 절경이었다. 어쩌면 내 커리어의 정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든 걸 멈추고 싶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혼자가 되고 싶었다.


마지막 짐은 쇼핑백 하나로 충분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팀원들과 인사하는 것으로 송별회를 대신했다. 여유로운 2호선을 타면서 퇴사한 게 실감 났다. 당분간은 늦잠을 잘 생각이었다. 내 인생에는 쉼표가 필요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을 포기하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스물네 시간을 얻었다.


소설을 쓸 생각이었다. 눈여겨본 공모전이 있다. 기존 수상작들을 읽으면서 치밀한 분석도 마쳤다. 상금이 1억이다. 해볼 만한 도전이었다.


회사 생활과 연애가 잘 풀리지 않던 시기에 소설은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위로를 넘어 베스트 프렌드 자리를 차지했다. 소설가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소설을 읽을수록 내가 쓴 책이 갖고 싶어졌다.


회사에 다닐 때 용기를 내어 첫 문장을 썼다. 틈틈이 써 내려갔지만 쪽글에 불과했다. 절대적인 시간도, 실력도 부족했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하며 내공을 쌓았다. 100권의 책을 읽을 때까지는 회사에 붙어 있기로 했다. 100권을 읽고 나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때 퇴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퇴사를 한 후에는 구립 독서실에 다녔다.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앉아서 엉덩이의 힘을 길렀다. 100권을 더 읽기로 했다. 독서를 하며 침잠했다. 글을 쓰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릴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독서실은 독서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지만 글을 쓰기에는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의자 끄는 소리, 물 마시는 소리도 소음인 곳에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릴 수는 없었다. 집에서 글을 쓰려고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집에서는 긴장이 풀렸고, 무엇보다 엄마의 손님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내가 원하는 고요한 우주는 아니었다.


새롭고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했다. 이번 기회에 잠시 혼자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서울 집값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지척에 나가 산다고 하면 엄마가 허락해줄 리 없었다. 그리고 서울에는 같이 놀 친구가 많았다. 친구들이 만나자고 하면 나는 늘 예스,라고 대답했다.


글을 쓰려면 서울을 벗어나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고, 풍경도 좋으면 더 바랄 게 없다. 한 군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한국이지만 비행기나 배를 타야 갈 수 있는 곳, 아무 때나 가족이 방문할 수 없는 곳, 제주도다. 육지와 섬 사이의 바다가 나를 속세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해줄 것이다.


"제게 많은 영감을 준 제주의 자연에 이 영광을 돌립니다."

연말 시상식을 보면서 당선 소감을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제법 그럴듯하다.


다음 날 아침, 제주도 숙소를 알아보는 것으로 새해 첫날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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