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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콩을 골라내는 겨울밤  

[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by 김효원 Jan 06. 2025

황진이가 읊었다는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겉보기에는 다 똑같은 콩 같지만 골라내면 썩은 콩이 한 주먹은 나온다. 사진=김효원겉보기에는 다 똑같은 콩 같지만 골라내면 썩은 콩이 한 주먹은 나온다. 사진=김효원

황진이처럼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구비구비 펴서 야근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겨울밤에 해야 할 중요한 임무는 서리태 콩을 고르는 일이다.


서리태는 수확해 찌끄레기를 골라내고 멀쩡한 콩만 자루에 넣어야 비로소 수확이 마무리된다.


서리태는 농사가 비교적 쉬운 작물에 속한다. 6월 초순, 비닐 멀칭을 한 후 한 알씩 넣고 흙을 덮어두면, 알아서 싹을 틔우고 쑥쑥 자라나 콩나무(?)가 된다.


벌레가 창궐하는 여름철에 농약을 뿌려 벌레를 잡아줘야 하는 게 일이라면 일이다. 그러나 농약을 자주 열심히 뿌리지 않아도 벌레에게 내주고 나서도 제법 많은 양의 콩을 수확할 수 있다.


순 지르기를 하면 수확이 늘어난다는데, 어느 순을 잘라줘야 하는지 아무리 들여다 봐도 알쏭달쏭해 순 지르기는 해주지 못했다. 올해는 꼭 배워서 순 지르기를 능숙하게 해내는 전문가st 농사꾼이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한 알의 콩이 자라 콩꼬투리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사진=김효원한 알의 콩이 자라 콩꼬투리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사진=김효원

추수도 비교적 쉽다. 서리태는 서리가 맞을 때까지 놔뒀다가 추수한다 해서 서리태라고 하는 만큼 콩잎과 줄기가 모두 말라비틀어진 10월 말, 11월 초에 거둬들이면 된다. 너무 늦어지면 콩 꼬투리가 말라 벌어지면서 콩이 땅으로 떨어져 도망가니 적당히 말랐을 때 베어야 한다.


낫으로 베면 좋으련만 아직 낫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초보 농사꾼이라 낫 대신 전지가위를 들고 추수에 나섰다. 그런데 바싹 말라 목질화된 줄기를 전지가위로 자르는 건 쉽지 않았다. 전지가위를 내려놓고 손으로 꺾어보았더니 툭하며 손쉽게 부러지는 게 아닌가? 콩은 베는 게 아니라 꺾는 거였다. 콩꺾기라는 말이 있는 이유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됐다.

서리 맞을 때까지 두었다가 거둬들인 콩. 사진=김효원서리 맞을 때까지 두었다가 거둬들인 콩. 사진=김효원

콩을 꺾어다 비닐하우스에 넣어놓고 보름 넘게 건조한 후 바싹 말랐을 때 본격적인 타작에 나섰다.


비닐하우스 바닥에 방수포를 깔고 그 위에 콩 가지를 올려놓고는 작대기로 툭툭 내리쳤다. 도리깨가 있었다면 도리깨질을 했겠지만 도리깨가 보이지 않아 나무 작대기로 대신했다.


잘 마른 콩 꼬투리를 신나게 때리니 꼬투리가 터지면서 콩이 쏟아져 나왔다. 콩 한 알이 자라 100알 가까운 콩을 돌려주니 9900% 수익률이다. 로또 맞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풍구에 콩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바람에 검불은 옆으로 날아가고 콩만 소쿠리로 떨어진다. 사진=김효원풍구에 콩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바람에 검불은 옆으로 날아가고 콩만 소쿠리로 떨어진다. 사진=김효원

타작한 콩은 콩과 콩 꼬투리가 뒤섞여있어 정선 작업을 거쳐야 한다. 정선은 각종 불순물을 걸러내고 알곡만 거둬들이는 일이다.


과거 우리 할아버지 때는 정선을 할 때 나무로 만든 풍구를 사용했다. 풍구에 곡식을 넣고 손으로 돌려 바람을 일으키면 검불은 날아가고 검불보다 무거운 알곡은 아래로 떨어진다.


요즘에 나오는 풍구는 전기로 바람을 일으켜 편리하게 정선할 수 있게 했다. 헛간에 두었던 전기 풍구를 꺼냈다.


이 전기 풍구는 몇 년 전 아버지에게 선물해 드렸던 농기구다. 손으로 일하는 아버지의 일손을 덜어드리기 위해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해 배송해드렸다. 그 때는 그 풍구를 내가 쓰게 될 줄은 알지 못했다.


풍구에 콩을 넣고 전원 버튼을 누르니 과연 검불은 밖으로 날아가고 콩만 받쳐둔 소쿠리 안으로 쏙쏙 떨어진다.

콩이 소쿠리로 떨어지고 있다. 사진=김효원콩이 소쿠리로 떨어지고 있다. 사진=김효원

이렇게 풍구에 돌려 검불을 날리고 알곡을 거뒀다고 끝이 아니다. 이제 마지막 단계인 콩 고르기 작업이 남았다.


겉보기에 다 멀쩡한 콩 같아도 그 안에는 썩은 콩과 깨진 콩같은 불량이 섞여있다. 깨진 콩이야 남에게 팔 상품이 아니니 상관없다 해도, 썩은 콩은 맛을 해치기 때문에 반드시 골라내야 한다. 귀찮다고 썩은 콩을 골라내는 작업을 거르면 썩은 콩은 반드시 내 입으로 들어온다.


동짓달 기나긴 밤, TV를 틀어놓고 눈으로는 뉴스를 보면서 썩은 콩을 골라낸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뉴스에서 눈과 귀를 뗄 수가 없다. 내가 썩은 콩을 골라내는 이 겨울밤, 대한민국 국민들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앉아 썩은 콩을 골라내고 있다. 겨울밤은 썩은 콩을 골라내기 좋은 때다.


불량까지 말끔히 골라낸 서리태를 양파망에 넣어 다용도실에 걸어놓는 것으로 한 해 콩 농사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서리태는 벌레가 잘 생기기 않아 비교적 오래 보관할 수 있으니 올 한 해 건강한 밥을 지어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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