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어느 날 갑자기 사위가 생겼다. 결혼을 하지도 않았고, 딸도 없는 나에게 사위라니.
사람 사위가 아니라 은행나무 사위다.
우리 집 뒤란에서 뒷동산으로 넘어가는 언덕에는 키 큰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다. 봄이면 고운 연두색 잎을 내밀고 가을이면 노란 잎을 떨군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은행나무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은행나무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됐다. 가을이면 은행을 떨어뜨리는 암나무라는 사실도, 은행알의 지독한 냄새로 알게 되었고.
은행나무는 30년을 자라야 비로소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고 한다. 지금 심으면 30년 후에 은행알을 딸 수 있다는 뜻이다. 손자를 볼 때쯤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해 '공손수(公孫樹)'라고도 부른다. '은행나무 함부로 베지 말라'는 캠페인이라도 벌이고 싶어 진다.
우리 집 은행나무는 해마다 은행알을 엄청나게 맺고 있으니 나이가 30년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자리에 30년 넘게 있었을 텐데 그동안 왜 은행나무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까.
은행나무는 암수가 나뉜 암수딴그루다. 우리 집 은행나무가 암나무이니 주변 어디에 수나무가 있을 텐데, 하며 수나무를 찾아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옆집에도 없고, 옆옆집에도 없고, 마을회관에도 없고. 걸어 걸어가다 보니 놀랍게도 수나무는 우리 집에서 1000m는 훨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마을 초입, 지서와 버스 정류장이 있는 삼거리에 커다란 수나무가 위풍당당 서있었다.
마을 안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은행나무라고는 우리 집 은행나무와 버스 정류장 은행나무가 전부였다. 두 나무가 부부 나무라는 것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버스정류장 은행나무가 사위라고 생각하니 버스를 타러 정류장에 나갈 때마다 꼭 쳐다보게 된다. 속엣말로 말도 건넨다.
"잘 있었니? 우리 집 은행나무도 잘 있어."
은행(銀杏)의 한자를 살펴보면 은 은에 살구나무 행이다. 은빛 살구라는 의미다. 은행은 과육을 먹지 않지만 과육 부분이 살구의 과육을 닮았다. 과육에서 몹쓸 냄새가 난다는 것이 은행의 단점이다. 도시에서 가로수로 주로 사용되던 은행나무가 애물단지 취급을 받으며 퇴출되기 시작한 것도 냄새 때문이다. 오죽하면 은행나무의 암수를 구별해 열매를 맺지 않는 수 나무만 가로수로 심는 프로젝트도 펼쳐지고 있다.
은행이 떨어지는 철이면 이웃에서 은행나무에 대한 민원이 들어오기도 한다. 동네 어르신이 “냄새난다”면서 은행나무를 "마카 베어 버리라"라고 지청구를 놓고 가시곤 했다. 30년이 넘게 한 자리에서 잘 살아온 은행나무를 베어버린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우리 집 은행나무가 그 소리를 듣지 못했기를.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아 해마다 가을이면 은행알을 한 자루도 넘게 선물해 준다. 은행알도 제법 굵어 벅앙지(부엌아궁이의 강원도 방언)에서 구워 까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당장 먹을 은행알만 한 됫박 정도 줍고, 나머지는 떨어진 자리에 그대로 둔다. 바깥에서 눈비를 맞으면서 과육이 쪼그라들고 냄새가 빠진다.
몇 년 전, 시골집을 수리하면서 구들방과 아궁이를 하나 남겨두었었다. 장작불 때면서 불멍 하는 재미가 큰데 숯불에 고구마, 감자, 밤 같은 것은 구워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겨울에는 벅앙지에서 은행을 구워 먹는 재미가 추가된다.
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날, 눈을 헤치고 은행알을 몇 개 주워다가 장작불이 타고 있는 벅앙지에 넣고 부지깽이로 뒤적거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껍질 벗은 초록색 은행알이 톡 튀어나온다.
갓 구워낸 은행알은 따뜻하고 말랑하고 고소하고 쌉싸름하다. 무슨 독소가 있어서 하루에 6개 이상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고 하니 숫자를 세 가면서 먹어야 해 더 맛있게 느껴진다.
은행알에는 몸에 좋은 기능이 많다. 혈액순환, 지방 제거, 독소 배출, 피로 회복, 불면증 개선, 폐 기능 강화, 탈모 개선, 노화 방지까지. 이렇게 좋으니 마구 먹고 싶지만 일정 량 이상 먹게 되면 독소 때문에 어지럼증, 호흡 곤란 등이 생길 수 있다니 참아야만 한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은행을 먹으며 공자의 중용(中庸)까지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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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이 이런 데 글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허무와 싸우고 있습니다.
*계엄 때 충격으로 글 발행을 한 주 못했던 점 뒤늦게 사과드려요.
*그럼에도 일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쓰고 있어요.
*제주항공 참사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내란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