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늦가을, 텃밭에 나갔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기도 갓, 저기도 갓. 갓이 푸르름을 자랑하며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매일매일의 발달상황을 육아일기로 쓸 수도 있는 배추와는 달리, 갓은 내손으로 심은 기억이 없다. 심은 기억이 없으니 당연히 자라는 것을 본 적도 없다. 따로 심지도 않았는데 갓이 저절로 발아해 싹을 틔워 무럭무럭 자라나 있었다.
갓은 저 혼자서도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완성형 인간 같다. 누구에게 기대지도 않고 도움을 바라지도 않으며 홀로 잘 먹고 잘 살아간다. 향이 독특해서인지 벌레도 잘 꼬이지 않는다. 게다가 파종 후 40~50일 정도면 수확할 수 있어 2모작, 3모작도 가능하다.
영양소도 풍부하다. 비타민A는 물론 비타민C, 칼슘, 식이섬유까지 다양한 영양소가 들어있어 사람의 몸에 이롭다. 갓의 이름이 갓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신이 내린 채소라 할만하다.
양도 얼마나 많은지 잠깐 뜯었는데도 대바구니가 철철철 넘쳤다. 말 그대로 유기농, 무농약, 친환경 갓이다. 갓본 김에 갓김치를 담기로 하고 갓을 소금에 절였다. 배추는 10시간 넘게 절여야 하지만 갓은 한두 시간만 절여도 충분했다.
사실 강원도는 갓김치를 먹는 문화가 없다. 우리 집만 그런지는 몰라도 갓은 그저 배추김치를 담글 때 파와 함께 썰어 넣는 조연에 불과했다. 강원도에서는 갓을 소금에 절여두었다가 꺼내 갖은양념에 무쳐 먹는 것을 갓김치라고 불렀다는 자료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 집은 갓을 절여 무쳐 먹는 문화도 없었다. 갓김치를 처음 먹어본 것은 직장생활을 시작해 바깥밥을 먹으면서였다.
갓김치의 고장이라면 단연 여수다. 여수돌산 갓김치가 유명해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여수돌산 갓김치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전라도 김치는 젓갈이 듬뿍 들어간, 강렬한 양념맛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강원도 김치에는 젓갈이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멸치액젓과 새우젓 조금이 전부다. 여기에 고춧가루, 다진 마늘, 찹쌀풀, 설탕, 소금을 넣고 잘 섞은 다음 절여둔 갓을 넣고 버무리면 끝이다. 배추김치가 배춧잎을 일일이 들춰가며 속을 발라줘야 하는데 비해 갓은 양념을 넣고 한꺼번에 휘휘 버무리면 되니 일이 수월하다. 김장을 갓김치로만 담그면 몇 항아리라도 담글 수 있을 것 같다.
김장을 마치고 김치를 배분하는데, 갓김치를 접하지 못한 식구들 답게 갓김치를 가져가겠다는 식구는 아무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20kg의 갓김치는 내 차지가 됐다.
갓김치를 서울로 가지고 올라와 3kg씩 소분해 소중한 분들에게 택배로 보냈다. 늘 든든한 소나무 같은 시인 선생님, 새로운 기법을 전수해 준 일러스트 선생님, 늘 격려를 아끼지 않는 오랜 친구, bbc 다큐에 출연한 언론사 후배, 천사표 해고 동지 후배. 택배를 받은 분들께서 “갓김치가 참으로 맛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 보람을 느꼈다.
나에게는 5kg의 갓김치가 남아있다. 김치냉장고에서 천천히 잘 익어가는 중이다. 코끝까지 시린 어느 겨울날, 외출에서 돌아와 따뜻한 밥을 지어 갓김치를 먹어야겠다.
쌀은 지리산 작은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지은 유기농 햅쌀이다. 아이들이 직접 볍씨를 뿌려 모판을 만들고 손으로 모내기를 하고 피를 뽑아가며 키워 추수해 거둔 귀한 쌀이다. 벼농사를 지으며 자연의 소중함과 농사의 위대함을 체험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편지에 담겨있다.
농사를 지어보면,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식재료는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내 밥상에 올라온 모든 식재료들은 농부, 어부가 땀 흘려 가꾸고 거둬들인 것들이다. 한 톨도 낭비하지 말고 정성껏 먹어야 할 일이다.
귀한 쌀밥에 직접 만든 갓김치를 올려 밥을 먹으면 뱃속이 든든해지겠지. 올 겨울이 따스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