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황진이가 읊었다는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처럼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구비구비 펴서 야근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겨울밤에 해야 할 중요한 임무는 서리태 콩을 고르는 일이다.
서리태는 수확해 찌끄레기를 골라내고 멀쩡한 콩만 자루에 넣어야 비로소 수확이 마무리된다.
서리태는 농사가 비교적 쉬운 작물에 속한다. 6월 초순, 비닐 멀칭을 한 후 한 알씩 넣고 흙을 덮어두면, 알아서 싹을 틔우고 쑥쑥 자라나 콩나무(?)가 된다.
벌레가 창궐하는 여름철에 농약을 뿌려 벌레를 잡아줘야 하는 게 일이라면 일이다. 그러나 농약을 자주 열심히 뿌리지 않아도 벌레에게 내주고 나서도 제법 많은 양의 콩을 수확할 수 있다.
순 지르기를 하면 수확이 늘어난다는데, 어느 순을 잘라줘야 하는지 아무리 들여다 봐도 알쏭달쏭해 순 지르기는 해주지 못했다. 올해는 꼭 배워서 순 지르기를 능숙하게 해내는 전문가st 농사꾼이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추수도 비교적 쉽다. 서리태는 서리가 맞을 때까지 놔뒀다가 추수한다 해서 서리태라고 하는 만큼 콩잎과 줄기가 모두 말라비틀어진 10월 말, 11월 초에 거둬들이면 된다. 너무 늦어지면 콩 꼬투리가 말라 벌어지면서 콩이 땅으로 떨어져 도망가니 적당히 말랐을 때 베어야 한다.
낫으로 베면 좋으련만 아직 낫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초보 농사꾼이라 낫 대신 전지가위를 들고 추수에 나섰다. 그런데 바싹 말라 목질화된 줄기를 전지가위로 자르는 건 쉽지 않았다. 전지가위를 내려놓고 손으로 꺾어보았더니 툭하며 손쉽게 부러지는 게 아닌가? 콩은 베는 게 아니라 꺾는 거였다. 콩꺾기라는 말이 있는 이유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됐다.
콩을 꺾어다 비닐하우스에 넣어놓고 보름 넘게 건조한 후 바싹 말랐을 때 본격적인 타작에 나섰다.
비닐하우스 바닥에 방수포를 깔고 그 위에 콩 가지를 올려놓고는 작대기로 툭툭 내리쳤다. 도리깨가 있었다면 도리깨질을 했겠지만 도리깨가 보이지 않아 나무 작대기로 대신했다.
잘 마른 콩 꼬투리를 신나게 때리니 꼬투리가 터지면서 콩이 쏟아져 나왔다. 콩 한 알이 자라 100알 가까운 콩을 돌려주니 9900% 수익률이다. 로또 맞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타작한 콩은 콩과 콩 꼬투리가 뒤섞여있어 정선 작업을 거쳐야 한다. 정선은 각종 불순물을 걸러내고 알곡만 거둬들이는 일이다.
과거 우리 할아버지 때는 정선을 할 때 나무로 만든 풍구를 사용했다. 풍구에 곡식을 넣고 손으로 돌려 바람을 일으키면 검불은 날아가고 검불보다 무거운 알곡은 아래로 떨어진다.
요즘에 나오는 풍구는 전기로 바람을 일으켜 편리하게 정선할 수 있게 했다. 헛간에 두었던 전기 풍구를 꺼냈다.
이 전기 풍구는 몇 년 전 아버지에게 선물해 드렸던 농기구다. 손으로 일하는 아버지의 일손을 덜어드리기 위해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해 배송해드렸다. 그 때는 그 풍구를 내가 쓰게 될 줄은 알지 못했다.
풍구에 콩을 넣고 전원 버튼을 누르니 과연 검불은 밖으로 날아가고 콩만 받쳐둔 소쿠리 안으로 쏙쏙 떨어진다.
이렇게 풍구에 돌려 검불을 날리고 알곡을 거뒀다고 끝이 아니다. 이제 마지막 단계인 콩 고르기 작업이 남았다.
겉보기에 다 멀쩡한 콩 같아도 그 안에는 썩은 콩과 깨진 콩같은 불량이 섞여있다. 깨진 콩이야 남에게 팔 상품이 아니니 상관없다 해도, 썩은 콩은 맛을 해치기 때문에 반드시 골라내야 한다. 귀찮다고 썩은 콩을 골라내는 작업을 거르면 썩은 콩은 반드시 내 입으로 들어온다.
동짓달 기나긴 밤, TV를 틀어놓고 눈으로는 뉴스를 보면서 썩은 콩을 골라낸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뉴스에서 눈과 귀를 뗄 수가 없다. 내가 썩은 콩을 골라내는 이 겨울밤, 대한민국 국민들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앉아 썩은 콩을 골라내고 있다. 겨울밤은 썩은 콩을 골라내기 좋은 때다.
불량까지 말끔히 골라낸 서리태를 양파망에 넣어 다용도실에 걸어놓는 것으로 한 해 콩 농사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서리태는 벌레가 잘 생기기 않아 비교적 오래 보관할 수 있으니 올 한 해 건강한 밥을 지어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