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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과 깨달음

어디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걸까.

by 소담

사설 구급차를 부르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12월 들어 진진이는 체중이라는 숫자에 강하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매 주 하는 식단 상담에서도 키 빼기 몸무게가를 120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원칙을 고수했다. 네가 말하는 키 빼기 몸무게가 아직 122라 2킬로는 더 증량해야 한다는 설득을 아이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진진이는 타고나기를 건강한 식성의 아이였다. 할머니가 해주시는 따끈한 밥과 국, 야들야들한 고기와 나물 반찬을 오물오물 잘도 먹었다. 유치원 다닐 때는 선생님들께서, 진진이 옆에서 밥을 먹으면 입맛이 더 좋다며 칭찬하시곤 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한창 식성이 좋을 때는 떡볶이, 마라탕 등 배달 음식도 즐겨 먹었는데, 배달 음식마저도 자기만의 그릇에 소복이 덜어 기쁘게 먹었다. 식성이 그리 건강하지 못한 나는, 아이가 행복하게 먹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기도, 또 신기하기도 했었다.


그런 아이가, 체중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과 타고난 자기 식성과 싸우는 것을 보는 것이 나는 너무 안타까웠다. 식욕을 억제하는 약이 있다면 사주고 싶은 심경이었다.


불안은 결국 표출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그냥 화산이 아닌, 이웃들에게 까지 피해를 주는 거대한 활화산처럼 분출되었다. 너무나 하찮은 1~2킬로 때문에 빠짝 마른 아이가 이토록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머릿속이 멍해져 어떤 말과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상담 센터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진진이는 사설 구급차에 태워져 담당 교수님이 계시는 대학병원 응급실에 '즉시 안정'을 목적으로 이송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는 순간순간 천사와 조우한다.


티브이에서나 본 적 있는 구급차의 침대 밭밑에 앉아 아이를 보고 있는데, 침대 옆 의자에 앉은 구급차 보조요원 여자 직원이 아이에게 이것저것 말을 건넨다. "친구는 모델이 하고 싶어요? 이렇게 웃는 게 예쁜 친구는 처음 봐요. 아, 자기가 예쁘다는 걸 스스로 모르는구나... 어떤 음식이 좋아요?" 예쁜 언니가 조곤조곤 건네는 말들에, 조금 전까지 활화산 같던 아이의 눈이 해사시 하게 돌아왔다.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은 아이와 함께 지난한 응급실의 수속과 기다림을 거쳐 드디어 만난 담당 교수님은, 또 다른 천사였다. 엄마인 나를 더 다독이며 수고했다 해주셨던 분. 나는 이분께 전적으로 기대어 진진이 치료를 계속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택시 안, 은은히 음악 틀어주시며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신 택시 기사님도 나에겐 천사였다.


다음날 진진이를 학교에 보내고 평일 오전미사에 가려고 본당을 찾았는데, 마침 이날은 오전 미사가 저녁 미사로 바뀌었단다. 텅 빈 성전에 혼자 앉아 기도하고 나서려는데 또 한 분의 천사를 만났다. 5,6년 전 자모회에서 만났던 나와 본명이 같은 레지나 씨. 내 손을 잡으며 많은 얘기를 해주시는데, 그녀의 진실한 눈빛은 모든 말을 대신했다

그리고 이 거대한, 혹은 별것 아닌 소동의 주인공인, 내 앞에 앉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숙제를 하고 있는 우리 딸 진진이... 어쩌면 세상에 두려움이 없던 오만했던 나에게, '내려놓음'과 '겸손함'을 깨닫게 하려고 그분이 주신 또 다른 천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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