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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DA Jun 08. 2019

왕비가 된 이웃나라 상속녀

는 발명가이자 패션리더'


프랑스 문화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외국에서 온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조용하고 서서히 자신의 나라에서 익혀온 문화를 프랑스에 전파하고, 남편이 죽은 후엔 어린 아들들을 대신해 오랜 기간 나라를 통치하며 프랑스의 역사가 되었죠.


그녀는 바로 유럽 역사 속에서 ‘Reine Noire(검은 여왕)'으로 지칭되는 피렌체 메디치가의 Caterina입니다.


르네상스를 꽃피운 피렌체 공화국의 그 유명한 메디치가에서 1519년 한 여자아이가 태어납니다. 공화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메디치가의 유일한 상속자로 태어난 이 아이의 삶은 초반부터 녹록지 않았죠. 부모를 일찍 여의고 친척들의 손에 의해 컸으며 복잡한 정치 상황과 기울어진 가세에 스스로 살아남아야만 하는 환경에 놓이기 일쑤였습니다. 결혼도 당연히 나라를 위해 집안 어른들이 정해준 곳으로 가야 했지요.



다양한 정치적인 이유와 유럽을 주름잡던 금융 및 상인집안 출신이라 프랑스 왕국에 많은 것을 쥐어줄 것을 기대한 왕 Francesco I세에 의해 둘째왕자의 짝으로 정해졌으나.. 15세기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 있는 가문이었지만, 그녀가 살던 시대에는 파산에 가깝게 기운 가세로 14살 어린 신부의 손엔 지참금* 대신 증조부 시대에 꽃 피운 르네상스 최고의 문화뿐이었죠.


그녀의 증조부는 ‘위대한 로렌조(Lorenzo il Magnifico)’라 칭송받으며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든 르네상스 예술의 최고 후원자이자 피렌체를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세련되고 우아하며 지적인 공화국으로 만든 메디치가의 가장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결혼식을 거행할 때만 해도 그나마 친척인 교황 Clemente VII세의 보호 아래 있어 많은 수행원들을 거느린 채 Caterina는 금장된 흰색 말을 탄 위엄 있는 모습으로 마르세유에 도착했고, 기다리던 프랑스 군중들은 외국인 신부의 화려하고 장엄한 행렬에 입을 벌린 채 구경했죠. 더욱 놀라운 건 그들이 지나간 자리까지 머물러있던 향기였습니다. 반면 Caterina는 엄청난 군중들의 악취에 정신이 혼미해져 말에서 떨어졌다는 설까지 있지요.



Caterina는 발전된 문물들과 개인 스태프들까지 프랑스로 데리고 갔습니다. 재단사, 자수사, 보석 세공사, 조향사, 요리사, 파티시에, 잘 훈련된 시종들까지 그녀와 함께 였고 이들은 프랑스 궁정문화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켜주었죠.

놀랍지만.. 식사 전 손 씻기, 식탁보에 코 풀지 말기, 음식 손으로 먹지 말기와 같은 식사예절의 기본 중의 기본을 그녀가 프랑스 궁정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사실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당시 많은 유럽 궁정에서 통용되던 에티켓으로, 모든 전통과 관습은 변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만큼 포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중반까지도 귀족들에겐 손으로 음식을 먹는 방법이 권장되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포크의 생김새를 교회가 싫어했습니다. 에냉도 싫어하더니 뾰족 한 건 그냥 다 싫었나 봅니다.


유럽에서 처음 포크가 등장한 곳은 베네치아로, 1004년 베네치아 총독의 아들과 결혼한 비잔틴 공주 Maria가 연회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포크로 음식을 찍어먹자 주위에선 놀라 수군수군 대며 교회 지도자들은 악마의 도구라 했다고 하니.. 약 500년이 지나서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던 이 외국인 신부들이 들고 온 도구는 아마도 전통을 바꾸려는 도전처럼 비쳤을 테죠.



Caterina는 그런 그들에게 포크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밥과 디저트를 구별해 코스로 먹는 문화와 달콤한 ‘Gelato(아이스크림)와 Amaretto(마카롱의 시초)’의 세계로 초대했으며, 냄새나는 사람들을 씻게 하고 속옷도 전수하는 등 청결문화 정착에 힘썼습니다. 향수, 하이힐, 코르셋, 부채 또한 그녀가 만들거나 프랑스로 가져가 유럽 전체에 유행시켰지요.







Profumo; Eau de Cologne; 향수


오늘날 '향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가 된 프랑스를 향의 세계로 인도한 이가 바로 Caterina입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워야 할 결혼식 날 새신부는 남편에게서 나는 역한 냄새에 기겁한 나머지 비누와 물을 사용해 씻을 것을 새끼손가락 걸어 약속시키고 자신이 가져간 향수도 소개해주었죠. 흑사병 이후 씻으면 병 걸리는 줄 알았던 사람들에겐 염소 냄새가 났고, 오물이 널린 길거리에서 나는 악취로 냄새가 나인가.. 내가 냄새인가 하는 삶을 살았을 프랑스 사람들에게 이를 감추기 위한 향수의 유행은 당연한 결과였을 겁니다.


당시 피렌체의 귀부인들은 향수에 정통했으며 허브와 에센스를 다루는 연금술사들이 그녀들을 위한 개인 향수를 제조해주었습니다. Caterina 또한 개인 조향사가 만들어준 향수를 금으로 된 'Melograni odorosi(향기로운 석류)'라 불리던 작은 향료 앰플에 넣어 목에 착용하고 다녔죠. 사람들은 단순히 좋은 향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에 남녀노소 모두 작은 용기에 담아 손이나 목걸이, 허리 등에 달고 다녔습니다.



Caterina가 쓰던 향수는 프랑스 궁정으로 가 ‘L'Acqua della Regina(여왕의 물)’이 되어 인기를 끌었고 현재에도 쓰이는 향수의 종류인 ‘Eau de Cologne’가 되었습니다. 피렌체의 Santa Maria Novella약국에서는 현재까지도 이 향수(L'Acqua di Colonia)를 판매하고 있죠. Renato Bianco가 만든 그대로의 향은 아니지만..


그녀가 피렌체에서 데리고 간 조향사 Renato Bianco는 마치 ‘서울 김 씨’처럼 'René le Florentin (피렌체 르네)'라 불리며 프랑스 향수 산업에 크게 이바지합니다. 고아였던 그는 Santa Maria Novella 수도원에서 자라며 12살 무렵엔 수도원 연금술사의 조수가 되어 약초를 증류하는 비법을 아는 스승의 유일한 계승자가 되죠. 그가 만든 향수에 매료된 Caterina는 자신의 결혼행에 그를 포함시켰고 그는 그녀의 조향사이자 조력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합니다.


16세기 유럽 궁정에서는 술이나 스프에 독을 타 라이벌을 제거하는 일이 공공연히 행해졌는데, 특히 이탈리아인들은 이러한 작업의 대가로 이미 Renato자신도 피렌체에서 스승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의심을 받은 전적이 있었습니다. 실력으로는 비할자가 없었으며 권력에 대한 욕망도 컸던 그는 Caterina의 비호 속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어두운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그는 이러한 어두운 세계의 작업에도 창의력을 발휘하죠.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방법이 독특하고 세련돼 보이길 바랬습니다. 당시 귀족 남성들은 속옷(셔츠)에서 좋은 냄새가 나도록 향수에 담가놓았다 입었는데 그 과정을 그의 상점에서 도맡아 했습니다. 하인들이 속옷들을 놓고 가면 그는 화학 작용과 향에 대한 실험에 몰두했죠. 그의 표적이 된 이들은 그 속옷을 입은 뒤 살이타고 벗겨지는 고통을 느끼다 죽었습니다. 이러한 몇몇 사건으로 인해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와 척을 진 사람들은 그렇게 신체적인 고통을 받다 죽어나갔죠.


하지만 곧 죽어도 자신들의 관례와 향유하는 문화를 포기할 수 없었던 높으신 분들께서는 하인들에게 먼저 입혀보고 하루 동안 지켜본 뒤 아무 이상이 없으면 그제야 입는 방식으로 화를 모면했습니다. 사람들은 Renato의 짓이라는 걸 알지만 그는 왕비를 등에 업고 있는 자였고 자신들도 필요하면 그의 능력을 돈으로 샀기에, 그저 그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며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지요.   


때로는 권력자의 요구에 순응한 듯.. 때로는 적극 가담하며 자신의 시대를 완벽히 살았던 Renato는 그렇게 프랑스 향수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가 만든 향수는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프랑스 향수의 기초가 된 도시도 그가 발굴해냈죠. 그는 고품질 원료를 찾아 프랑스 돌아다녀 Grasse를 찾아냈고, 그곳은 현재 프랑스 향수의 메카가 되었습니다. Renato의 가르침을 배우고 성장하던 충실한 학생 프랑스는 어느덧 스승 피렌체를 빠르게 뛰어넘어 당시 거의 2세기 동안 독점적이었던 향수 산업을 프랑스로 이동시켜 산업의 우위를 차지하고 오늘날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Mutande;  Caleçon; 속옷


역사적으로 꽤 오랫동안 속옷은 특정 계급만 입거나 그저 한 번씩 유행하는 불필요한 아이템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시대에 따라 신체를 대하는 태도와 관념, 성에 대한 개방도, 청결 개념 등이 달랐던 만큼 속옷의 모양과 존재의 유무는 계속 변화했죠.


당시(16C) 유럽 여인들은 치마 속에 속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청결 개념도 지금과는 매우 달라 물이 모공을 열어 병균을 침투하게 한다며 목욕 대신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청결을 유지했고, 부득이하게 목욕을 한 경우 다음날은 침대에서 하루 종일 누워 휴식을 취할 것이 권장되던 시대였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겐 씻는 행위가 도덕적인 잣대가 되어 정결한 여성들은 몸을 씻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 자주 씻으면 부정한 여인이 되는 이상한 시대였죠. 위생은 어이없게도 향수가 담당했습니다. 향으로 냄새를 덮었지만 과연 덮어졌을까.. 싶네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속옷은 지극히 Caterina의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사냥을 매우 좋아했던 그녀는 여성을 위한 말 타는 방법을 고안해내는데 'Cavalcata all'amazzone' 로 양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녀는 퍼레이드 용으로 그냥 옆으로 앉아만 있을 수 있었던 아주 간단한 디자인의 Sambue**에 손잡이나 지지대 등을 달아 좀 더 편하고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진화시킨 'Sella da Amazzone(곁 안장)'을 만들었죠. 자신의 아이디어로 새롭게 탄생한 이 곁 안장으로 그녀는 남자들과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자신을 예뻐해 주던 시아버지 Francesco I세의 사냥팀에도 낄 수 있었던 유일한 여성이었을 만큼 혁신적이고 자유스러웠던 그녀였지만.. 사실 빠르게 달릴 방법을 고안해 낸 이유는 질투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라는 사냥은 안 하고 남편 곁을 맴도는 남편의 애인 Diane de Poitiers을 찾아내 남편에게서 떨어트려 놓고, 사냥할 때 빠르게 달리는 남편과 함께 달리기 위함이었죠. 2살도 아닌 20살이나 많은 데다 자신의 남편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쁘고 기 센 Diane 앞에서 어린 외국인 신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테지요.


그녀가 만든 곁 안장으로 말을 타면 구조상 두 다리의 높낮이가 달라졌기 때문에 달리다 보면 춤추듯 휘날리는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맨다리를 가려줄 보조적인 아이템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낙마라도 하게 될 경우 벌어질 아찔한 상황에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던 Caterina는 속바지 형태의 무릎까지 가려주는 속옷을 만들죠. 육체적으로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 예쁜 다리라 생각했던 그녀는 가려야 할 부분은 가려주면서 자신의 아름다운 다리를 드러낼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이름도 재밌는 ‘Briglie da culo(엉덩이 고삐)’라 불리던 이 아이템은 삽시간에 프랑스 귀족 여성들에게 유행으로 번졌습니다. 궁정 여인들이 입기 시작하면서 속옷에는 리본과 레이스, 보석이 달리고 심지어 금과 은으로 된 천으로 만드는 등 화려해지기 시작했죠. 프랑스 궁정 사람들은 처음부터 Caterina를 ‘그 이탈리아 여자’라 부르며 대놓고 무시했다고 하는데 그녀가 하는 것들은 모두 유행이 되는 이상한 현상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이후 계속 이 속옷이 애용된 건 아닙니다. 유럽 궁정으로 퍼지며 잠시 인기를 끌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교회가 등장하죠. 음란하다며 싫어했습니다. 특히 개신교도들은 이 속옷이 드레스를 짧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악마의 도구이며 매춘부나 바람둥이에게나 어울리는 옷이라며 적극 반대했습니다.  


그들의 염려가 맞았는지 이 속옷은 베네치아에서 'Braghesse'라는 이름의 드레스 사이로 살짝살짝 보여주는 유혹의 도구로 쓰이며 매춘부들의 전유물이 되죠. 매춘부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상이 된 이후 귀족들은 더 이상 입지 않게 됩니다.


어차피 역사적으로 청결 개념이 아닌 유행 아이템으로 일시적인 필요에 의해 있고 없고를 반복했던 이 팬티 용도의 속옷은 19세기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 또한 필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새장 드레스(crinoline)를 위해 많이 허전해진 하체를 돌발 상황 -강풍이나 계단에서 넘어질 경우- 에서 보호해 줄 보조 아이템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이렇게 매번 존재의 가치가 저평가되던 팬티를 일반적으로 모두 입게 된 것은 1900년대 초가 지나서입니다. 의복의 형태가 바뀌고 여성의 인권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속옷의 형태도 단순화되었고 오늘날과 같이 위생을 위한 필수 품목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 Caterina의 친척인 교황이 약속한 지참금이 있었지만 약 1년 후 교황이 서거하자 교황청이 지불 거부

** Sambue - 1300년대 초 만토바 후국에서 사용되던 간단하고 안전하지 않았던 곁 안장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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