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장 반가운 소식이 찾아온 9월의 어느 날

2년 만에 만난 형제, 함께 했던 행복했던 시간

by 아헤브


내겐 둘도 없이 소중한 형제가 있다. 그와 나는 고통으로 이어진 관계를 오래 맺어왔다.

그의 아픔은 오래도록 나의 아픔이었고, 나의 눈물은 이미 그가 흘린 눈물이기도 했다.


8년 전, 우리는 병실에서 처음 마주했다. 우리 아이들이 머문 재활 병원에서 첫인사를 나눴다. 처음 그가 나를 만났을 때 그는 나를 조금 경계하는 듯했다. 나의 선의를 알 길이 없던 그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방금 처음 보았는데 살갑게 인사하는 내게서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그는 한 발짝 떨어져 나의 의중을 먼저 살피고자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나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 편을 택했다.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의 아내를 처음 병실에서 만난 그날, 한참 동안 이어진 대화 끝에 그의 남편의 다음 방문일을 알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 살던 시절, 흑인들 사이에 끼어 있던 나를 기억하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전개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여겨졌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아이의 재활을 위해 매일 재활 병원을 오가는 것은 여러모로 매우 힘든 일이었다. 집에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유모차를 끌고, 무거운 짐을 얹어 지하철로 오가야 한다는 것이 여성에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6인실에서 별다른 소통 없이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다른 어머님들도 그녀를 돕고 싶어 했지만, 언어 장벽으로 인해 대화가 어려웠다. 그 모습이 무척 안타까웠다. 그날 그 모습을 내가 마주한 것에는 하늘의 분명한 뜻이 있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나의 선의를 쉽게 받아들였고 그녀의 남편에 대해 어렵지 않게 질문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 그녀의 남편까지 만나 악수를 청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모습, 언어, 종교를 지녔지만, 한 가정을 책임진 부모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 두 형제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와 함께 걸은 동대문


수년 후 시차를 두고 아이들의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그 상황 앞에서 어떤 말을 꺼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함께 앉아 침묵으로 서로의 고통을 나눌 뿐이었다. 그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저 차분하게 모든 상황에 일관성 있게 대처해 나갔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모두 성숙한 모습이었다.


짙은 어둠의 틈새로 희망의 빛이 들어왔다. 한 줄기 밝은 빛이 차츰 지면에 깔리는 모습을 차분히 지켜보았다. 우리는 시차를 두고 오가는 밝은 빛을 붙들고 앞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수술 이후 전혀 걷지 못하던 딸아이는 매우 불편했던 걸음걸이에서 조금 더 나은 자세로 걷기 시작했다.


8년 전,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존재였을 뿐이었다. 이름도, 사는 곳도 몰랐지만, 그에게 말을 건 이후,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시간은 그 우정을 형제애로 거듭나게 했다. 매달 한 번, 빠짐없이 얼굴을 마주하며 우리는 먼 길을 함께 지지하며 걸어올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새로운 길 위에 서기로 했다. 미국 대학에 좋은 자리가 나서 오랫동안 계획했던 것처럼 미국으로 이민을 다시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년 전 이맘때, 공항으로 향하던 그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오래도록 그리움이라는 그림자를 지켜봐야 함을 알았다.


그러던 그가 며칠 전 한국에 방문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온 것이었지만 그가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마음이 들떴다. 그렇게 한국에 온 이후, 지난 나흘의 시간 동안 우리는 이틀에 한 번꼴로 얼굴을 보고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미국에 간 그는 여전히 그곳에서도 성실하게 자기 몫을 감당하고 있었다. 나보다 더 험한 상황 속에서도 그가 보여주는 태도는 매번 내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역경 앞에서도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는 여전히 삶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내일이면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다시 시간의 강을 사이에 두고 긴 기다림이 시작될 것 같다. 나는 이제 몇 시간 후면 그의 호텔 앞으로 찾아가, 그를 차에 태워 인천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2년 전과 같은 길이지만, 이번에는 직접 그의 짐을 싣고 공항까지 태워 간다는 차이가 있었다.


이별의 순간은 늘 같은 모양으로 찾아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를 더 기쁜 마음으로 환송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를 지지하는 내 마음을 단단히 보여주었으니까, 그에게 힘든 시절이 오면 다시 나를 떠올리며 그도 새 힘을 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더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평안했으면 좋겠다. 그의 무거운 짐이 날이 갈수록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그의 딸이 언젠가 자유롭게 걷고 뛰며,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내어 놓는 기적이 찾아오기를 바라고 원한다. 아이와 부모 모두 여전히 극심한 고생을 하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 부모는 여전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나의 진심이 그에게 전해지고 그녀에게 전해져,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안녕하기를 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그는 떠날 것이고, 나는 이곳에 남아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이어질 것이다. 지난 8년이 흘러 그의 아내는 내 아내의 친구가 되었고, 나는 그의 가까운 형제가 되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유산을 남기는 삶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다. 꿈꾸는 자로서 나는 여전히 비상할 날을 꿈꾸며 현실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잘 지켜가고 있다.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축복만큼 커다란 즐거움이 있을까? 관계의 즐거움만큼 큰 즐거움은 드물 것이다. 이토록 즐겁고 소중한 삶을 어찌 누리고 나누지 않을 수 있으랴! 모두를 이 기쁨의 장으로 초대한다. 서로가 서로 안에 있는 보석을 발견하며, 더불어 이 거친 세상을 힘있게 살아가기를 꿈꾼다.


https://brunch.co.kr/@aheb/96


제가 아직 회복이 덜 되었습니다 구토 감기 몸살이 번갈아가며 있는터라 좀 더 회복하고 연재 글을 쓸 예정인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