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첫 만남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을 추억하는, 또 다른 어느 멋진 날에

by 아헤브

첫 만남이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순간이 있다.


그저 스쳐 지나갈 인연이 아님을 직감하게 되는 순간 말이다. 작년 이맘때의 일이다. 겨울로 접어드는 신호탄을 쏜 듯, 무거운 찬 공기가 가만히 밀려오던 어느 10월의 밤이었다. 숨 막히게 붐비는 승강장을 간신히 빠져나와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바삐 재촉하고 있었다. 오래된 지하철 역사의 퀴퀴한 냄새와 자잘하게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나는 단 한순간이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단 몇 분만이라도,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눈앞에 놓인 사람들을 마치 투명인간처럼 여기며, 지하철을 급히 빠져나가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이었다. 그렇게 나도 부리나케 집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출구를 빠져나와 지상으로 몸이 나왔을 때, 늘 그랬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몇 미터 앞에서 내 쪽으로 손을 흔들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환한 미소로 웃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시선에 닿자마자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이 아는 지인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직진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 중에는 나 말고 고개를 들고 지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모두 다 땅을 보고 있거나 다른 방향을 향해 시선을 멀리 두고, 부지런히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나에게 인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 두 명이 나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지만, 잠시 기도를 드리고 그 사람들이 걸터앉아 있는 방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반대쪽에서 인사한 걸 봤는데, 혹시 제게 인사한 게 맞나요?

맞다면, 두 분이 제게 밝게 손을 흔든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 있을까요?"


"I saw you wave from the other side- was that meant for me? If so, may I ask what made you both wave at me so brightly?"


"저희는 이곳에 앉아서 한국 사람들 표정을 살펴보는 중에, 거의 모두가 무표정한 얼굴로 지하철을 빠져나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제 딸과 함께 이야기하다가, 지쳐 보이는 한국인들에게 밝게 손 인사라도 건네주면서, 미소 지을 수 있는 짧은 순간이라도 선물해주고 싶었어요.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까. 그렇게 한참 손짓을 했는데, 십분 넘게 받아주는,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어요.

유일하게 당신만 우리 인사를 받아주었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다가와서 말을 걸어주었네요.

이름이 폴이라고 했죠? 폴,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We were sitting here observing people's faces as they came out of the subway, and we noticed that almost everyone had a blank expression. My daughter and I were talking, and we wanted to give these tired Koreans a bright wave- just to offer a short moment where they might manage a smile. That's all we could really do here. We waved for quite a while, over ten minutes or so, and almost no one returned the gesture or even paid attention. You were the only one who waved back, and not only that, you walked over to talk to us. You said that your name is Paul, right? Hi Paul, it's so nice to meet you."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 만남이 서로의 마음을 바로 움직이는 순간이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었고, 그 자리에 서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전에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정중하게 그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아무런 사심 없이 그분들이 한국에 있는 동안 따뜻한 기억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대화가 길어지면서 여러 주제로 다양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대화 말미에 우리는 서로의 SNS를 주고받았고, 엄마와 딸은 내 개인 계정에 새 친구로 등록되었다.


SNS 친구가 된 이후에 그 두 사람의 일상을 피드를 통해 종종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각자만의 방식으로 삶을 사랑하는 멋진 사람들이었다. 주위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예쁘게 살아가는 모녀였다. 보기 좋았다. 엄마는 뷰티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커리어 우먼이었고 딸은 유명 잡지의 각광받는 모델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차츰차츰 알아갈 수 있었다. 서로의 근황이 올라오면 라이킷을 누르고 간단한 메시지도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미국과 한국에서 펼쳐지는 서로의 일상을 꾸준히 응원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렇게 오늘까지 달력 12장이 서서히 넘어갔다.


몇 주전, 엄마에게서 디엠 하나가 들어왔다. 비즈니스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갈 시기를 지금 저울질하고 있는데, 혹시 내 스케줄이 가능하다면, 한국에 들어가 있는 기간 동안 수행 통역을 부탁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편한 마음으로 가능한 경우에 한해서 수락 여부를 알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날 내가 만난 그 두 사람은 정말 좋은 마음 밭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따뜻하고 사려 깊은 사람들이었다. 대화 속에 이어지는 질문 하나하나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던 그 두 사람의 모습이 그 순간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중간에 스케줄이 바뀌면서 추후에 한국행 일정이 최종적으로 정해지면 일정을 재차 알려 주기로 했다. 이후에 만남이 성사될지 여부는 현재 불투명하다. 만남의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감사한 점 몇 가지를 나누고 싶다. 누군가 수행 통역을 해준다면 네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 말이 참 고맙게 여겨졌다. 기쁨 이를 귀여워해준 두 사람에게 아이와 아내를 직접 소개해 주고 싶어졌다.


기쁨 이의 환한 얼굴을 보고 라이킷을 눌러주던 두 사람이 기쁨 이의 대모(Godmother)와 같은 관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집 꼬마는 보나 마나 쑥스러워하면서도 미래의 만남을 즐거워할 것이다. 두 사람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통해 기쁨 이가 혜택을 볼 것이다. 아이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또 다른 새로운 꿈을 꾸게 되지 않을까? 이탈리아에 사는 남미 이모를 통해 이제나 저제나 이탈리아 가고 싶은 꿈을 품고 사는 아이에게 이번엔 미국에 가야 할 새로운 이유가 생길 것만 같다.





첫 만남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우리 세 사람의 만남이 그런 순간을 함께 나눠 가졌다. 선의와 진심으로 서로를 정중하게 대하고 이후의 만남을 계획하는 시간이 느린 속도로 흐르고 있다. 아내와 아이를 소개해줄 생각을 하니 순간순간 마음이 벅차다. 그날, 피곤에 지친 한국인들에게 밝은 인사를 건네려 하던 그 예쁜 마음이 없었더라면 오늘 이 글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날 내가 고개를 숙이고 지하철을 부리나케 빠져나왔더라면 그들과 밝은 인사를 나눠가질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만약 피곤하다는 생각에 잠겨, 그저 인사만 받고 서둘러 앞을 무심하게 지나쳐갔다면, 지금의 대화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일이다.


따뜻한 인사를 건네준 그들에게 다가가, 다시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었음에 감사할 뿐이다. 한 시간가량 대화하고 연락처를 마지막에 나누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다시 한국에 온들, 두 가정의 재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의 선의를 확인하고, 관계의 울타리 안으로 그 두 사람을 초대한 것은 너무나 잘한 결정이 되었다.


앞으로는 또 다른 어떤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10년 전에 이탈리아 사는 에콰도르 누이에게 길을 안내했던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8년 전에 병실에서 아픈 아이를 돌보는 인도 부부를 만나고, 우리 가정 안으로 그들을 초대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이 일을 통해 다시금 깊은 차원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이제 1년 전에 미국인 모녀를 만난 것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삶에 자리 잡게 될 것인가? 앞으로 오래오래 이어질 다음 만남을 위해 기도한다.


누군가를 속이는 관계가 아니라, 누군가를 환영하고 세우며 소중하게 여기는 관계를 가져가는 매일이 내겐 기념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두 명이 지금 내게로 서서히 걸어오는 중이라 믿는다. 그들을 동구밖으로 나가 마중하고,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시처럼 그들의 인생이 내게 오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은 내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말 그대로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함께 데리고 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만남이 필경 환대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함께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마음을 삶으로 기리는 것이며, 우리가 삶으로 시를 쓰는 것과 다름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시를 쓰면서도 시인이 되지만, 삶을 쓰면서도 시인이 된다.





인천공항 가는 길, 영종도 휴게소에서, 인도 형님을 배웅하는 9월의 어느 화창한 날에^^


며칠 전 인도 형님을 태워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고, 이후에 미국에 무사히 도착해서 일상을 다시 시작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 친구는 10월 초에 폐암 1기 결과를 통지받았습니다. 항암 없이 추적관찰을 수년 간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제 친구를 위해 두 손과 마음을 정성스럽게 모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keyword
이전 11화가장 반가운 소식이 찾아온 9월의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