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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헤브 Apr 11. 2024

8화_청천벽력_100일간의 불면

100일간의 불면 속에서 길을 찾다

여보세요? 전화받으시는 분이 한기쁨 보호자 되시나요?
네, 제가 기쁨이 아빠입니다. 실례지만 어디실까요?
아드님 담당 손해 사정사입니다. 아드님 관련해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만나 뵐 수 있을까요?
... 저를요?
무슨 용건이시길래..

다름이 아니라 보험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요약하면 이런.. 이야기고요

일단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 나누시죠



숨이 막혔다. 하마터면 전화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전화였다

이미 수년간 여러 번 쓰나미가 지나갔는데 또 다른 쓰나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연안 앞바다를 조만간 휩쓸고 지나갈 쓰나미가 눈앞에 분명히 보이는 그 순간에도

난 아무런 손쓸 수 없는 절망감 앞에서, 실낱 같은 희망조차 없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쓰나미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고

하늘을 송두리째 잡아먹은 이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이대로 바닷속으로 수장되고 마는 무명의 인생이 될 것만 같았다

 



며칠 후 손해 사정사를 만났다

한눈에 봐도 베테랑 포스가 물씬 풍기는 아우라였다

업계 베테랑으로서 그간 탄탄대로를 걸어온 듯한 날카로운 면모가 보였고

언뜻 보기에도 능력 있는 중간관리자였다.


조리 있고 분명한 논리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오랜 경륜과 잘 갖춰진 모습으로 처음부터 압박해 들어왔다

그와 반대로 나는 너무 왜소하다 느껴졌다

짧은 순간의 대화였지만 금세 무력감을 느끼며 무슨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막막했다


오랫동안 치열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어느 누구 뒤로 한 발짝 물러 서지 않았다


분명한 건 이 일이 내 아이 인생이 걸린 문제라는 거였


뒤로 물러날 곳은 없었다

그녀는 내게 이길 승산이 없으니 포기하라 했고,

나는 법으로 맞서 싸우겠다고 했다


대형 로펌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싸워도 큰 비용만 들뿐 이길 승산이 없으니 잘 생각해 보라 했다

땅이 꺼지는 듯한 어지러움증을 느끼면서도 땅거미 지는 암울한 대화를 계속 이어





그로부터 100일 여 길고 긴 불면의 밤은 이어졌다

계속되는 내부 조사와 검토, 지속되는 통화와 만남 가운데

시종일관 찾아드는 압박감으로 인해, 이미 병원 생활로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나는 더욱 황폐해져 갔다


나는 점점 더 시들어갔다 곧 말라죽을 것만 같았다


날마다 이어지는 전투에서 계속 참패하는 것 같은 심정이었고 수년간 이어지는 폭격과 같은 현실 속에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 계속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나와 대화하는 상대방이 직업 전선에서는 손해 사정사일지 모르지만, 개인으로서는 여느 아이 부모님일 거라는 점이었다 누군가의 어머니 vs 아버지로서 대화를 나눠야겠다 생각했다


진심으로 마음을 전달하면 적어도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애써 줄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달랐지만 시종일관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서로에게 대항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역시 은혜였다


어느 날 그녀에게 내 심정이 이해 가느냐 물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충분히 이해 간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현실은 매일 아침 내 아이 건으로 회의가 진행된다 했다


할 수 있는 한 차분하게 의견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녀를 힐난하거나 분노하려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분과 싸우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고 그렇게 해서 되는 일은 결코 아니라 믿었다

내 입장을 사실에 근거해 꾸준히 대변한다면 회사 측에서 결국 물러설 거라 생각했다

.

.

.

속절없이 계절이 바뀌었다

언제 그만큼 시간이 흘러간 지도 모르겠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매일 밤 초조함과 스트레스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병원에 가면 늘 피곤했다

자리에 누우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과잉 생각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나를 질식시키려 했다

동시에 주위 누구에게도 내 심정을 말할 수 없었다


밤마다 나는 서류를 뒤적거리고, 인터넷을 뒤졌다

처음엔 법에 대해 무지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열심히 관련 정보를 탐독했다

험준한 산을 오르며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순간, 나는 아빠로서, 가장으로서 더욱 단단해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자각할 수 있었다


아내도 상황에 대해 조금 알고 있었지만,

아이가 너무 어렸고, 그녀는 그녀대로 지쳐 있었기에 자세히 알리지는 않았다

아직 병원 생활이 채 1년이 되지 않은 때였다

그 위에 내 무게감 마저 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장기전을 치러야 했기에 나 혼자 어떻게든 짐을 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만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언제나처럼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었다

하늘의 하나님께 신음하듯 간절히 마음을 토로했다

병원에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면 베갯속에 얼굴을 파묻고 꺼이꺼이 울다 겨우 잠들었다  

잠이 안 오니 몇 시간이고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발 밑에 떨어지는 포탄으로 이미 내 오장육부는 갈기갈기 찢어져 버린 상태였다


그렇게 우리는 아이에 대한 모든 내용을 검토하고 서류를 제출하였고 최종 의견을 듣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이 찾아왔다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첫 목소리부터 뭔가 달랐다

차분하고 가벼운 목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최종적으로 검토 결과,


우리 아이에 대해 원래 계획을 철회하고 보험금을 지급할 거란 결론이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개인적으로도 어느 순간부터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었다고,

회사 내부에서 최종적으로 우리가 제출한 서류를 토대로 우리 주장이 받아들여져 소송 전으로 안 가도 된다 했다. 내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결국 승리했다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지난 몇 달간 힘든 시간을 같이 겪어 오느라 고생 많으셨다 말씀드렸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내게 아픈 아이 건강하게 잘 크길 바란다라는 덕담을 건네주셨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고비를 하나님은 넘어가게 해 주셨다 모든 것이 은혜였다


첫 번째 암울한 진단받던 그 충격과 가히 맞먹는 100일간의 고통이 치유되는 순간이었다




깊은숨을 들이쉰다

나의 과거를 그대로 아이에게 들려주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아이가 이 글을 보면 어떤 감정을 느낄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지난 이야기들이 모두 다 너무 아픈 이야기라 혹시나 큰 충격을 받지는 않을까 못내 마음 쓰인다  

지나온 날들이 너무 가혹할 만큼 매서웠고 아팠기에, 나는 여전히 그 영향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은데, 내 아이는 제발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성정과 기질은 아이와 한참 울어도 괜찮지만,

우리 아이는 나와 같은 현실 속에 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사 그게 하나님의 계획일지라도,

너무 아픈 그 고통을 지나가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이는 이미 열 살, 십 년이 지났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시절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간직한 채 또렷이 그 상황들을 하나하나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예수의 사랑으로 상처는 이미 흔적이 되었지만, 그 고통의 강도는 잊히지 않는다




수많은 날,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기어야 하는데, 기어 다니지 못해 몸을 강하게 만져 주어야 했다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마구 울었던 그날에도 나는 아이의 치료를 멈출 수 없었다

아이와 함께 울다, 아이가 없을 때 또 울었다


아빠로서 미안했고, 죄스러웠다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내 아이로 태어난 것 밖에 잘못이 없는데,

이 아이는 왜 이렇게 힘든 시절을 보내야 할까

수많은 밤을 생각하고 생각했다


끝으로 기쁨 이에게 마음을 남긴다. 청소년이 되면 아마도 이 글을 보겠지 상상하며 남긴다


아들아, 아들아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네가 다른 아이들처럼 태어나 자랐더라면 지금의 고생은 없었을 텐데


아빠와 그 모양 다르지만, 너는 더 심한 고통을 겪는 것 같아 아빠가 죄스럽구나


아빠 마음이 많이 아프다 우리 아들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단다


아빠는 네가 태어나고 어느 날 생각 했었어


언젠가 네게 물려줄 책을 쓸 거라 생각했었어


그런데 그때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어느 날, 네가 아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빠는 굳게 결심했어


너에게 최고의 아빠가 되겠다고, 그리고 너에게 남겨줄 책을 쓰겠다고


그렇게 10년을 지나왔고, 지금 그 책을 만들어 가고 있네


기쁨이 너는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두 사람에게 커다란 기쁨이었어

그래서 네 엄마가 태명을 기쁨 이로 하고 싶다 했을 때 그러자 했어


네 배아를 처음 현미경으로 봤을 때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


꽃송이 같았어. 아빠는 지금도 그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어


지난 10년 참 잘 자라 주었어. 아빠 춥다고 옷깃을 여며주는 너,


불편한 한 손은 쉬고 있지만, 나머지 한 손으로 아빠를 품에 안아주는 너


아빠는 더 바랄 게 없단다. 지금처럼만 살아가자. 살며 사랑하며 같이 배우며, 풍성한 유산을 남기는 삶을..


너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될 거야


아빠는 확신해. 너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거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꺼져 가는 영혼에 다시 불을 붙여 줄 거야


사랑해 우리 기쁨이 정말 사랑해. 너는 할 수 있어. 기쁨이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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