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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헤브 May 12. 2024

17화_진짜사나이(Wild at heart)_2부_군대

진짜 사나이가 되어줘 아빠의 부탁이야 너는 할 수 있어

사랑하는 기쁨아
아빠가 잠깐 쉰다 했는데 2주가 지나 버렸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화상이란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했던 우리 기쁨이에게

이젠 어떤 아빠가 되어 주어야 할까
너를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까?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단다

그래도 감사해. 네가 내 아들이라서,
주님이 내게 널 사랑할 기회를 주셔서
최대한 사랑할 거고
모든 기회를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거야
자 이젠
지난번 약속처럼 "회복"에 대해 이야기해 줄게



진짜 사나이 될 수 있는 기회 한가운데 서서
아빠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자세히 들려줄 거야
보이지 않던 그 주님이 아빠의 시간 속에서 어떤 삶을 허락하셨는지
너와 나누고 싶어. 동시에 너무나 아픈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어

내 마음이 잘 전달되기를 바랄게

이제부터 아빠와 두 손 잡고 20년 전 그 시절로 함께 가보자   

네 마음에 이 모든 말이 이해될 즈음엔
이미 네가 어른이 되어 있겠지

네게 같은 일이 반복되어선 안 돼
아니 그 누구에게도 반복되어선 안돼
 
그래서 아빠는 아빠가 겪었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고
너와 너의 친구들에게 조금의 지혜라도 나누고 싶은 것 같아  

기쁨이 너를 사랑해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그렇게 사랑할 거야






육군병사로 해안 초소를 지키는 일은 내게 대단한 체력과 새로운 배움을 꾸준히 요구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과 초저녁에 반반씩 끊어서 자야 하는 잠은 숙면과 애초에 거리가 멀었다. 몇 명의 선임들은 초저녁에 누워 근무지에 나가는 시간 근처가 될 때까지, 말 그대로 졸릴 때까지 TV를 봤고 후임들은 잠이 전혀 안 오는 상황에서 소리를 들어가며 눈을 감고 잠을 청해야 했다.



잠이 오지 않아도 자야 했고, 들리는 소리가 궁금해도 눈을 그대로 감고 그날 밤샐 각오를 다져야만 했다. 모두가 피곤해하던 그 시절, 그래서 더욱 초소 근무지는 항상 어둡고 좁고 춥게만 느껴졌다. 



한 여름에는 모기떼가, 한 겨울에는 살을 에이는 강추위가 밤새 괴롭혔다.

병사들의 동상을 우려한 상급 부대는 겨울 내내 초소간 이동을 명령했고 시간 단위로 우리는 초소를 바꿔가야 했다. 새 근무지 들어가면 연락이 가능하도록 세팅을 새로 하고, 상급 부대에 도착을 몇 분 안에 알려야 했다


새벽녘 모두가 잠든 시간, 저 멀리 오징어 배에서 나오는 환한 불빛을 보며 마음에 조금의 위안을 얻었을 뿐 적막하고, 공포스러운 밤은 날마다 이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눈을 감으면 어두운 밤 해상을 비취던 오징어배 불빛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뭇 인간의 기억이란 놀랍다란 생각이 들 만큼 분명한 그림이 다가온다



내가 속한 부대는 사격 훈련을 자주 했다. 총기 관리를 평소에 잘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사격 자체를 잘해야 했다. 총기 분해와 조립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상이었고, 누구든 빠르고 정확하게 자기 총기를 분해, 조립하고 사격 시 제대로 과녁에 명중시킬 수 있어야 했다

   


야간 사격 훈련이 타 부대에 비해 많아, 원 없이 총을 쏠 수 있었다. 영화 주인공 람보가 들고 다니던 그 길고 무거운 M60 기관총을 내가 부여받을 줄이야. 그 총은 나의 어깨 정도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마른 체격에 십 킬로가 넘는 총을 한쪽 어깨에 매일 들고 다녀야 하는 수고가, 그 외 선임 장비까지 다 더하면 도합 20~30kg를 항상 짊어지고 백사장을 정찰하는 시간이 너무 버거웠다. 원래 약해서였겠지만 굉장한 체력적 부담감과 피로감이 나를 짓눌렀다.



사격 훈련이 있는 날이면 기관총 사수답게 총을 쏴야 했다. 굉음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총알은 오렌지 색에 점이 이어진 선과 같았고, 총알이 과녁을 빗겨 나갈 때면 장교들의 고함소리와 함께 다시 재장전을 해야 했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나는 정말 전장에 임한 군인처럼 집중력을 발휘하려 했다. 사격이 있던 밤이면, 앞으로 내 인생 역시 주님 맡겨 주신 과녁을 결코 벗어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훈련장 군기는 매우 엄격했다. 부대 특성상 여러 훈련을 대비해 다양한 군사지식을 외우고, 실전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능력도 평소에 제대로 배양해야 했다.



어려웠다. 적어도 내겐 어렵게 느껴졌다.



지형지물을 제대로 파악하고 작전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했다. 그런 일을 너끈하게 잘하는 선임들은 믿음이 갔다. 나 역시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어야 했고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후에는 그런대로 모든 것들에 익숙해져 갔다  



녹색 견장을 찬 분대장이 되고 나니 선임들 모두 각자의 고향으로 하나씩 돌아갔다. 빠진 만큼 바로바로 후임병들이 연이어 들어오는 게 신기했다. 모든 일이 나름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군대라는 집단에 대해 매번 놀라던 기억이 난다.



분대장이 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리더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선임으로서 바른 사고력을 요구했고, 여러 명을 이끌어갈 통솔력이 필요했다. 내 분대만 이끄는 것이 아니라 최고참이 되면 20명 이상의 소대를 이끌어 나가야 했다. 물론 장교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부여받은 임무를 분대장이 잘 해내야 했다.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1년 간 받던 지적과 나약해진 마음이 치유되는 데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진짜 사나이가 되고 싶었던 내게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 돌파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책이 없었다. 더구나 지난 1년 침묵했던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이제는 의심 없이 굳게 믿고 싶었다.




나에 대한 평가는 후임들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이미 그 기억마저 흐릿해졌겠지만 그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대한 건 그들 각자의 자유다. 어떤 사람에게는 조금 모자란 선임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일 노력하던 선임으로 좋게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 마음속에 군생활 후반 1년에 대한 과정과 끝맺음이 아름다웠기에 내게는 매우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하다는 말씀 밖에는 별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입대 이후,



사회에선 각자 이름으로 불리던 우리들에게 신병 교육대는 새로운 이름을 제시했다

장정, 장정이라니. 호칭 자체가 너무 어색하게 들렸다. 이내 몇 분 후 장정들은 새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번에는 몇 번 훈련병 000다. 대답할 때마다 말이 꼬이게 만드는 술책이라고 누가 말할지 모르겠을 만큼 입에 금방 붙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때 몇 번 훈련병 누구라는 그 대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 후 마침내 6주가 지나 자대를 배치받고 나면 드디어 사회에서 자주 듣던 "이병"이라는 계급이 주어진다. 이등병의 편지라는 노래가 있을 정도로 서글픈 계급이다



진짜 사나이란 자유와 열정, 모험으로 어우러진 삶을 살아가는 남자라 했다. 그러나 입대 전 그 단어를 실제로 접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 남자 다움이란 무엇인가 대해 십 대부터 고민했던 나로서는 그 남자 다움이 무엇인지 스스로 확인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분명한 건 진짜 사나이의 진정한 뜻을 혼자 힘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거였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남자 다움의 문제에 대해 많은 시간 기도를 드리고 성경 안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1장 5-8절)




많은 순간 긴장 되었다. 나 자신을 보면 금세 자신이 없어지는데 과연 진짜 사나이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습관적으로 그 삶을 매일 살아낼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이 일렁일 때마다, 눈앞 탁 트인 깊은 바다를 내려다보았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높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한 가지가 분명했다. 나는 언제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관계를 지향했다. 후임들에게 선임으로서 가져야 하는 군인으로서의 모습은 취했지만, 근무지에서는 긴장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개인의 취미, 관심사, 군대를 통해서 얻어가고 싶은 배움들, 지금 마음속 두려움은 무엇이며, 부모님은 건강하신지, 원래 꿈은 무엇인지, 노래를 좋아하는 후임에게는 노래를 편한 마음으로 부르라 했다. 어차피 다음 초소까지는 몇 백 미터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그 밤 그곳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긴장 속에 조는 후임에게는 눈을 감고 잠시 쉬라 했다. 나는 원래 자지 않는 게 몸에 배어 있으나 너는 너무 피곤해서 자연스레 졸음이 몰려오는 것이니 피곤하면 졸 수도 있다 말해주었다. 졸면 안 되지만, 말이라도 해주면 편안해질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곤해 보이는 후임들에게는 어깨를 주물러 주고, 당시 유명한 가요를 배우며 같이 노래를 하며 매서운 밤바다를 지켰다.



술 한잔도 하지 않는 나는 후임에게 임창정 씨 소주 한잔과 윤도현 씨 사랑 two 두 곡을 배우고, 근무를 서면서 졸음을 쫓기 위해 열창을 하곤 했다. 주위에 민가도 없고, 우리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는 동해 바다 물고기들 뿐이었으리라.. 그들의 잠을 깨웠을 수도 있어 미안하지만 그렇게라도 졸린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그렇게 후임들이 조금씩 내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기회가 닿는 대로 힘들어하는 후임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무엇이 힘든지 알려고 직접 물었다. 모든 후임들과 친해지고 싶었지만, 이미 자기 자리를 찾은 후임들에게 다가가기보다는 힘들어하는 후임들을 찾아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후임들은 형이기도 했던 내게 점차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서너 명의 후임들을 데리고 주일 이면 차량을 타고 대대 교회를 가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그 시간에 교회 노래를 듣고 배워가며 아주 조금 위안을 얻는 것 같았다. 평소 잘 웃던 후임도 있었고 어두웠으나 나와 대화를 할 때 유난히 미소를 띠던 후임도 있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고충과 고통이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다 알 수 없는 그들의 고통에 조심스레 다가가고 싶었다.


일병 어느 날이었다. 심한 군기 속에서 내 영혼이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군인들에게 주어지는 외박을 사용해 부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서 주말을 보낼 수 있었다. 종일 속으로 기도만 하고 살던 시절이었기에 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살려 달라는 기도를 드리며 그날도 부대문을 나갔다.



부대에서 예배드리는 데 커다란 제약이 있었기에, 군대 바깥에서 드리는 예배는 내게 실로암 그 자체였다. 어둡고 캄캄한 밤을 헤쳐나갈 수 있는 등대였다. 처음 그 교회에 간 날 군복을 입고 예배를 드리던 나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그 예배 가운데 홀로 일어나 흐느끼며 찬양을 드렸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으나 나는 이미 마음속에 큰 위안을 얻고 있었다. 예배당 안에 있는 것 자체로 나는 커다란 위안을 느끼고 있었고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숨죽여 울고 있었다.



교회에서 점심을 제공해 주었다. 식판을 들고 배식을 받는데 어느 권사님이 밥을 퍼 주셨다. 그분은 내게 친절하게 어느 부대에서 외박을 나왔느냐 물어주셨고, 나는 한눈에 그분이 좋은 분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고 그 분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과 마음이 또 한 번 이어졌다.


길 권사님. 그분은 내게 어머니와 같은 분이 되어 주셨다



외박을 나올 때마다 나는 권사님을 만났다. 권사님은 내게 자녀 사진도 보여주시고, 가정사도 이야기해 주셨다. 나와 대화가 너무나 잘 통했고, 날 너무 좋게 봐주셨다. 아들도 아닌 내게, 아들처럼 대해 주셨다.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어머니처럼 외박 때마다 나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길고 길었던 군생활 속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시던 사람은 바로 길 권사님이셨고 지금도 그분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계신지 너무 궁금하고 자주 생각이 난다. 그 어른을 뵙고 싶다.



어느 날 외박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는데, 권사님이 나를 햄버거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는 대화 도중 같이 생활하는 부대원이 몇 명이냐 물어보셨다. 처음엔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이해를 제대로 못해서 바른 데로 대답을 드렸다. 그리고 그분은 내 손에 30개 가까운 햄버거를 들고 부대에 복귀하게 해 주셨다. 부대원과 장교들까지 다 먹을 양이었다. 그날 부대에 들어가기 전에 얼마나 많이 울고 들어갔는지 모른다. 그분을 통해 나는 후임들을 더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다른 선임들과 관계없이 나는 내 일을 제대로 하겠노라 마음먹게 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선임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던 건 그 보다 한참 후에 일이다. 내게는 길 권사님이 계셨다. 어머니라 부르고 싶을 만큼 따뜻했던 분, 나를 너무나 예뻐해 주시던 나와 전혀 관계없던 그분이 내게 어머니가 되어 주셨다.



제대 후에 한 동안 연락이 되다가 권사님과 연락이 끊어졌다. 제대 다음 해에 미국에 가게 되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사랑하는 두 번째 어머니 길 권사님의 소식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날들을 추억하며 감사의 마음을 홀로 그분께 전해 드린다. 어느 날 저 천국에 가게 되면 그 권사님 곁에서 오래오래 머물러 대화를 나눌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그런 따뜻한 상상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 있으랴



그분이 쏟아 주신 사랑을 힘입어, 나는 후임을 대하려 노력했다. 많이 부족한 선임이었지만 적어도 몇 명은 알아주었던 것 같다. 권사님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각한다.




제대할 무렵이 되었다. 우리 부대는 전통적으로 멍석말이를 했다. 워낙 군기가 세고 후임들이 고달팠기 때문에 제대 전 날 후임들로부터 좀 맞아야 했다. 의례적으로 연례적으로 항상 이불을 말아 누가 밟은 지도 모르게 마지막 신고식을 치르고 집으로 가야 했다. 이불에 넣고 잠시 밟고, 주먹으로 어깨를 치고, 한참 이야기도 듣는 전통 아닌 전통이 있었다. 물론 웃으며 다들 그랬지만 그런 이벤트는 마지막에 마련되어 있었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제대하는 날 내게는 조금 다른 이벤트가 주어졌다.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이벤트.

후임들은 나를 들고 저 하늘로 헹가래를 쳐주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형님 나가신다 하고 누군가 소리도 질러주었다. 그리고 내가 아끼던 아들 군번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현재 형 잘 가~ 그중 몇 명이 그랬다. 잘 가라고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다고

많은 아이들이 형 나가서 성공하라고 말해주었다.



군 생활 내내 나는 울보였다.

죽고 싶어 울었고, 살려달라고 기도하면서 울었고, 억울해서 울었다

밤새 비를 맞으며 온몸이 얼어버릴 것 같던 그 추위 속에서 너무 서러워서 울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무나 큰 위로를 받으면서 또 울었다


그날 부대 문을 나서며 하늘에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제대한다. 이제 나는 자유인이다!


나는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고, 후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기쁨아 오늘 마지막은 짧게 말할게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면 놀라운 일들이 생겨

그 사실을 아빠는 평생 경험해 왔고, 네게 남겨 주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야


예수님이라면 할 말과 행동을 네가 하기를 바라

너무나 어렵지만 그만큼의 큰 유익이 네게 있을 거야


알지! 우리 기쁨이 아빠가 너무나 많이 너를 사랑한다는 그 사실을,


하나 더 이야기해 주고 싶어

아빠는 네 엄마를 너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사랑해주고 싶어.

그건 이해해 주라. 그건 나중에 다시 설명해 줄게 사랑해


 




P.S 마음에 공감이 되신다면 주위 아파하는 분들께 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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