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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순례, 잘 다녀왔습니다!

-'멀쩡하다'는 얘긴 못 들었지만...

by 최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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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병원과 친해져야 한다는데, 저는 예나 지금이나 병원을 멀리하는 편입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첫째, 병원에 가는 게 귀찮고, 둘째, 병원에 갔다가 어디가 안 좋다는 얘기를 들을까 봐 겁이 나서입니다. 딸에게 이 얘길 들려줬더니 너무 어이없어하더군요. 첫 번째 이유는 이해가 가지만 두 번째 이유는 말도 안 된다며, 어디가 안 좋으면 하루라도 빨리 무슨 병인지 알아야 치료를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맞아요. 딸의 말이 백 번 맞죠. 근데, 맞는 말이 늘 내 맘에 와닿는 건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저는 굳이 병원에 가서 제 몸 어디가 안 좋다는 걸 확인하고 싶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그러니 병원에 제 발로 가는 걸 멀리할 수밖에요.




하지만 지난주, 저는 이틀에 걸쳐 병원 세 군데를 순례하고 왔습니다. 첫날은 흉부외과(하지정맥류 전문병원), 둘째 날은 정형외과와 안과. 흉부외과 나들이는 철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어요. 최근 들어 저녁만 되면 무릎 뒤편과 종아리 통증, 다리 부종이 심해 '이게 혹시 하지정맥류 증상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집 근처 하지정맥류 전문병원을 찾아 예약을 하고 약 5일 정도를 기다린 끝에 병원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 의심이 맞더군요. 초음파 진단 결과 왼쪽 다리는 괜찮은데, 오른쪽 다리에 하지정맥류 증상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그냥 두면 점점 나빠질 뿐 다시 원상태로 회복될 순 없다고, 수술을 해서 판막이 손상된 해당 정맥을 레이저로 지져 없애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다만 아주 급한 건 아니니 향후 일정을 보고 괜찮을 때 수술 예약을 하라고요(그나마 다행인 건 수술이 비교적 간단한 모양입니다. 수술 시간이 1~2시간 정도라고 하는 걸 보면요). 그리곤 다리 부종을 조금이나마 완화시켜 줄 혈액순환개선제를 처방해 주었습니다. 약국에 들렀다가 집에 오는 길. 맘이 착잡하달까, 좀 심란하더라고요. '나이가 드니 슬슬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하는구나, 운동을 하고 건강기능식품을 챙겨 먹고 꾸준히 식단을 해도 노화의 속도를 늦추진 못하네'라는 생각 때문에요.


그러고 운동하러 헬스장에 갔는데, 이번엔 트레이너 샘이 손목에 아대를 한 절 보고, "지난번 수업 때도 그렇고, 계속 손목이 안 좋으신가 보네요. 손목 염증 때문일 수 있으니 바로 병원에 가보세요. 그냥 두면 증상이 오래가지만, 약 먹으면 바로 나을 수 있어요"라는 얘길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음날 바로 계획에 없던 정형외과에 다녀왔답니다. 안과는 같은 건물 3층이라 겸사겸사 들렀고요. 요즘 시력이 많이 떨어져서 안경을 써야 하나 고민 중이었거든요.




먼저 정형외과에 가서 손목 통증과 목디스크 증상을 얘기했더니, 의사 샘이 엑스레이를 보면서 다시 얘기하자고 하더라고요. 검사 결과, 손목엔 염증이 발생했고 목 디스크 증상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치료가 필요하다네요.ㅠ.ㅠ 결국 손목엔 충격파치료를 받고, 목엔 신경주사를 맞고 물리치료까지 받았습니다. 처음 받아본 충격파치료는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나더라고요. 물리치료사 샘 말로는 손목이 안 좋을수록 치료할 때 더 많이 아프다네요. '아, 내 손목이 이렇게 안 좋았구나, 근데 그걸 꾸역꾸역 참고 있었네'하는 깨달음이 밀려왔습니다. 손목 충격파치료에 비해 목 신경주사가 오히려 견딜 만한 수준이었어요. 약간의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이 동반되긴 했지만요.


1시간여의 정형외과 치료를 마친 다음엔 안과를 찾았습니다. 극심한 안구건조증을 완화해 줄 눈물약도 받고, 시력 검사도 받으려고요. 이런저런 검사 끝에 눈물약을 처방받는 데는 성공했지만, 안경 처방은 나중으로 미뤄졌습니다. 지금은 노안이 오는 시기라 안경을 쓰면 오히려 가까운 데 있는 게 안 보일 수 있다네요. 양쪽 눈 다 0.7 전후 수준이니 일상생활엔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일단은 안경 쓰지 말고 버텨보라고요. 이틀간 세 곳의 병원 순례를 하며 들은 의사 샘들의 진단 중 유일하게 긍정적인 얘기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병원 순례는 제 몸엔 꼭 필요하지만 귀찮고 겁이 나서 미뤄뒀던 일입니다. 사실 성취와는 거리가 먼 일이죠. 하지만 살다 보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버틸 때가 너무 많잖아요? '병원 가봤자, 금세 나아지는 것도 아니잖아. 병명을 알면 뭐 어쩔 건데? 갔는데 괜찮다고 아무 이상 없다고 하면, 그것도 다 돈 낭비, 시간 낭비 아냐?'라는 변명을 계속하면서 문제에 직면하길 회피해 왔을 뿐이란 걸 이번 일을 계기로 알게 됐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100년으로 친다면 제 인생도 벌써 반환점을 돈 셈이니, 그동안 리모델링 한 번 없이 사용하던 몸에 잔 고장이 발생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죠. 뭐 어쩌겠습니까? 이제부턴 아픈 것도 그냥 내 몸의 일부려니 하며 귀찮고 겁이 나도 병원과 가까이 지내는 수밖에요. 그런 점에서 이번 병원 순례는 나와 내 몸을 좀 더 잘 알게 되는 계기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아주 작은 인식의 전환과 앎의 성취가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고요.

*이번 연휴, 이런저런 집안 행사가 많아서 글 업데이트가 하루 늦어졌습니다. 부디 양해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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