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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Oct 22. 2023

버티는 게 이기는 걸까?

나의 말이 나의 영혼을 지켜주길

출근길이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운전하던 중 무언가에 부딪히는 충격이 몸 전체에 전해졌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래서 사고가 난 건가?’ 차와 내 몸이 점점 구겨졌고 고통이 느껴질 때쯤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린 건 누군가 구겨진 차에서 나를 꺼낼 때였다. 오락가락하는 내게 그 사람이 말했다.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내 과실이 아니라고. 다행히 걸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기에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는데 날 보는 사람들은 경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내 모습이 어떤지 그들의 표정만 봐도 짐작할만했다.


근처 병원 응급실로 옮겨진 나를 가족들이 데리러 왔다. 가족들과 함께 기차에 올라탔다. 다른 병원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기차 안에서도 나를 보는 시선을 여럿 느꼈다. 얼핏 창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는데 영화에서만 보던 좀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얼굴 곳곳에 깊이 찢긴 상처가 있고 그곳에서 흘러내린 피와 멍으로 얼굴 전체가 울긋불긋했다. 기차는 역마다 정차하며 새로운 승객들을 태웠고 그때마다 나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결국 병원에 도착하지 못한 채 잠에서 깨었다.

눈을 뜨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다. 현실을 반영한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참으로 똑똑하다. 이렇듯 현재 처한 내 마음상태를 또렷하게 반영하다니…


요즘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이후로 많은 게 달라졌다. 차라리 그때 해고됐으면 한 달치 월급과 6개월여의 실업급여라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 퇴사하면 개인 사정에 의한 것이니 퇴직금 외에 추가로 받을 수 있는 돈이 없다. 나름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우쭐했던 그때의 나를 반성한다. 능력을 인정받아서가 아니라 같은 돈을 주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했던 건데. 40년을 넘게 살아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퇴사를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갈 길을 못 잡게 만드는 사내 시스템과 팀원과의 불통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나를 계속해서 가로막는 원인들과 싸우는데 지칠 대로 지쳐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다. 매일매일 기분이 좋지 않다. 컨디션 난조로 입병을 달고 살며 손목과 어깨 통증으로 파스값만 늘어가고 있다. 연차를 쓸 때마다 눈치 보게 만드는 부장 때문에 병원에도 못 가고 있다. 일은 늘 삐그덕거리고 시스템이 잡아주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줘야 할 부장은 ‘난 몰라. 네가 알아서 해!’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부장이 커버가 안되면 팀원들끼리라도 단합해서 일이 되게끔 해야 하는데 그들도 역시나 뒷짐만 지고 있다. 가장 합이 잘 맞아야 할 팀의 팀장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납기일 못 맞추니까 미뤄, 너 때문에 안되잖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좀 하면 안 돼?’. 나를 돕고자 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탓하고 내게 일을 미루는 사람이 더 많은 이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게 맞을까? 이런 고민들로 하루를 간신히 견디고 참아내다 보니 언제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부러지기 직전까지 가면 일주일의 5일이 지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토요일은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잠적하게 됐다. 토요일은 그야말로 녹다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늦잠을 자거나 멍하니 있는 것도 아니다. 평일과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고 쌓아둔 책들 중 한 권을 꺼내 읽고 먹을 게 없나 냉장고를 뒤지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하고 버릴 옷들을 정리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쉴 새 없이 뭔가를 하지만 회사에서 30분 내에 쓸 에너지 밖에 쓰지 않는다. 그러니 많은 걸 했어도 피곤하지 않고 더 많은 걸 해도 될 것 같아 하루종일 집 안을 정리한다.


인간에게는 자기만의 ‘말’이 있다. 늘 마음속에 그 말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 말을 혀와 몸과 의지로 표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자기만의 ‘말’이 있다. (중략) 나의 말은, 내가 사랑하는 그 말은, 나의 영혼일 수밖에 없는 그 말은 ‘고독’과 ‘권태’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쇼펜하우어와 달리 나의 ‘말’은 ‘자유‘와 의지’다.

언제나 그래왔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었고 내게 좌절을 가져다준 애인이었고 고통과 절망을 준 것도 그것에서 해방하게 도와준 것도 그 말이었다. 내게 말이 없었다면 토요일에도 회사에 나갔을 것이다. 밀린 업무와 처리해야 할 많은 일들이 쌓이는 걸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했고 그 덕분에 이렇게 숨을 쉬고 있다. 5일간 세상을 창조하고 6일째 사람을 만든 신의 뜻에 따라 6일째인 토요일은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걸까? 나만의 말이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는 한 무너질 일은 없겠지? 하지만 점점 말을 잃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자유롭지 못하고 의지를 굳건히 할 지지대가 시멘트가 아닌 모래 위에 꽂혀 있음을 느낀다.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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