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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Oct 22. 2023

퇴사 대신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누가 누가 이길 것인가?

입사한 지 2년 만에 퇴사를 결심했다.

하지만 퇴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쉽지 않았다. 매일 출근할 때마다 퇴사하지 말아야 할 이유, 퇴사하면 안 되는 이유를 찾고 있다.


많은 고민과 걱정들로 하루를 견디고 집에 돌아가면 밥 먹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피로누적만은 아니다. 워낙 운동을 하지 않아 체력이 바닥이니 더 고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하루보다 빨리 지나가는 한 해 한해 덕분에 나이도 한몫했다. 방법은 하나, 운동뿐인데 그게 그렇게 하기 싫었다. 하루종일 회사에서 시달린 것도 힘든데 집에 와서까지 몸을 고되게 하고 싶지 없었다. 운동은 귀찮고 땀나는 것, 한 발짝 다가가면 열 발짝은 멀어지는, S극인 내게 N극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한동안은 퇴근 후 매일 술을 마셨다. 술은 피로를 푸는 지름길이며 맛까지 좋다. 보고 싶었던 드라마나 영화를 틀어놓고 마시는 술 한잔은 놓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저녁시간의 훌륭한 벗이다.


싫어하는 운동을 시작했다는 건 배후의 엄청난 압박이 있었다는 뜻이다.

경기침체로 급기야 구조조정을 피해 갈 수 없게 된 회사는 인원감축, 연봉삭감이라는 무리수를 두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남은 직원들에게로 향했다. 누구나 뜻하지 않은 상황에 접하게 되면 살아남기 위해 자기만의 비책을 꺼내기 마련이다. 회사의 매출이 줄었다고는 하나 결코 일의 양이 줄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할 사람은 부족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임금이 줄었으니 일할 의욕과 사기가 떨어졌다. 이쯤 되자 직원들은 그동안 꽁꽁 숨겨 두었던 각자의 일에 대한 소소하지만 파괴력 있는 원칙을 꺼내기 시작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불평 없이 연장근무를 하던 A는 땡맨이 되었다. 6시 벨이 울리기 전에 퇴근 준비를 마쳤고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남의 일일 뿐이었다. B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타 부서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순간 자신의 일이 늘어날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일을 더 많이 하게 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생긴 것이다. C는 자신이 그 일을 처리할 수 없는 (본인에게만) 합당한 이유를 늘어놓았다. E는 고객사와의 일처리를 극도로 꺼리며 내게 그 모든 걸 일임했다. 그동안 본인이 처리했던 일들까지도 떠넘겨 안 해도 될 일을 하고 안 먹어도 될 욕을 먹는 건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30명이라는 몇 명 되지도 않는 회사에서 서로 일을 떠넘기고 누구도 자진해서 어려운 상황에 대처할 자세를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든 일이 되게끔 하려는 나는 매 순간 몸이 닳고 정신이 피폐해졌다. 나를 도와주고 위로해 주지는 못할 망정 고객사의 모든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편이 돼 줄 사람이 없다는 건 이 회사에 계속 다녀야 하는 이유를 찾게 할 수밖에 없었다.


쉬는 시간에 커피 한 잔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리고, 점심시간에는 일에서 벗어나 재충전을 하고,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그날의 일을 마무리하는 그런 하루는 내 것이 아니었다. 꿈에서까지 나를 괴롭히는 일, 일, 일. 남들과 똑같이 일을 미루고 나 몰라라 방관하고 남은 일과 상관없이 퇴근을 하면 괜찮을까? 일이 잘못돼도 내 탓이 아니라고 책임을 미루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할 일만 하면 좀 나을까? 그동안 살아온 방식으로는 결코 용납이 안 되는 이런 회사 생활을 해가며 버티는 게 성숙한 어른으로 나아가는 길일까? 그게 나를 위한, 내 미래를 위한 올바른 선택일까?


수없는 질문에 무슨 답을 해야 할지, 이럴 때 남들은 어떤 결정을 하는지, 진정 퇴사만이 답인 건지 혼란스러웠다. 매일 똑같은 고민을 거듭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저녁, <리바운드>라는 영화를 봤다.

해체 직전인 부산 중앙고 농구부 선수들의 재탄생을 그린 실화 바탕의 영화. 선수들은 공익근무요원인 신임 코치, 최소한의 지원조차 뺏으려는 학교, 팀워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악조건 속에서 고민한다. 선수 개개인들도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하는 데다 우승경험도 없기에 언제 농구부를 그만두어도, 언제 농구부가 해체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이다. 그들의 의지를 불태운 건 개인에 맞게 사기를 북돋워주고 지는 것이 결코 패배가 아니라는 믿음을 준 코치와 나중에 그런 코치의 마음으로 동료들을 챙긴 선수 모두의 힘이었다. 개인이 뛰어나다 한들 ‘우리’가 될 수 있게 할 그 믿음이 없었다면 선수들은 해체될 팀의 모지리에서 실업팀 최고의 선수로 도약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스크롤이 올라갈 때 나는 퇴사 대신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농구부처럼 최소한의 지원조차 하지 않는 경영진과 팀워크도 남아 있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을 갉아먹는 개개인들로 구성된 회사. 이기적인 개인을 이타적인 ’ 우리‘로 만들어주는 팀장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팀장도 저 개개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회사와 그들을 원망하며 퇴사를 해야 할까?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엉뚱하게도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퇴사 대신 운동을 택한 건 일종의 힘겨루기였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 여기서 ‘너’는 회사와 운동 모두를 지칭한다. 회사와의 싸움, 운동과의 싸움이다. 운동에서 이기면 회사에서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나만의 개똥 논리를 만든 것이다. 회사에서는 꾹꾹 참느라 개기지 못한 걸 이런 걸로 대신 우기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운동에서의 승자가 퇴사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적어도 회사에서 버틸 수 있는 내성 혹은 꼼수가 생기기 전까지는 내 운명을 운동에 맡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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