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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Oct 22. 2023

퇴사는 선택일까 운명일까?

행복하기 위해 행복하지 않은 회사를 다니는 아이러니

연차를 내고 병원에 갔다.

이번만큼은 고민 없이 연차를 냈다. 두 달 전부터 손목과 어깨가 아프기도 했지만 며칠 전 재밌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명절 선물 지급 없음! 회사에 돈이 없어 30명 밖에 안 되는 직원에게 선물 사 줄 돈이 없단다.  사실 안 받아도 그만인 별 거 없는 선물이다. 사장님 지인을 통해 사들인 저렴한 과일청, 스팸세트, 쿠키 등을 3-4번 연속 질릴 때까지 지급하는 선물이었고, 다 못 먹어서 쌓아두기 일쑤였던 차라리 안 받는 게 나은 선물이었다. 하지만 선물 살 돈이 없어 지급할 수 없다는 회사의 입장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긴급으로 돌아가는 일을 처리하느라 손목과 어깨가 나갔다. 긴급 건을 처리하느라 정작 해야 할 일을 퇴근 시간 이후에 해야 했고 매일 늦은 시간에 퇴근했다. 그게 벌써 9개월이 되어 간다. 회사는 매출이 줄어 돈이 없다고 하지만 인원 감축으로 인건비를 절감하였고 하청업체로 돌릴 일을 내부에서 해내느라 직원들은 밤샘 작업도 불사했는데, 회사는 돈이 없다고 한다. 이쯤 되면 직원들이 벌어들이는 돈을 다른 데에 퍼주고 있다는 의심이 강하게 들 수밖에 없었다. 인원이 부족하여 작년보다 일의 양이 1.5배는 많아졌는데 회사는 돈이 없다고 3만 원 상당의 명절 선물을 거르겠단다.


그뿐만이 아니다.

매년 10월마다 하는 건강검진에서 유일하게 직원 복지로 추가해 줬던 혈액으로 진행하는 20가지 암검진을 역시 돈이 없다는 이유로 빼버렸다. 직원을 위해 나름 복지차원으로 해줬던 작은 혜택을 야금야금 빼내고 있는 경영진의 작태. 그것도 모자랐는지 하청업체의 이윤을 10퍼센트 더 빼먹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통보했다. 업체에 예고도 없이 지금 당장 시행하라는 대표의 지시가 떨어졌다는 말을 부장 입을 통해 듣는 순간 드디어 때가 왔음을 절감했다. 이윤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곳이 회사라는 아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아이가 탈 없이 크기 위해선 주기적인 영양 공급이 필수다. 하지만 내가 키워야 하는 아이는 욕심이 많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입고 좋은 것을 탄다. 혼자만 잘 커도 되는데 친구와 가족들에게도 그 많은 걸 누리게 해 준다. 아이가 그걸 누리지 못해 자신이 입은 걸 벗어야 하자 아이는 옷을 벗는 대신 뺏어 입는 방법을 선택한 듯하다. 가진 것과 앞으로 가질 걸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러니 주변의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다. 아프다고, 슬프다고, 화난다고 이렇게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말이다.


평일이지만 병원은 붐볐다.

정형외과에 오는 환자가 그렇게 많을 일인가? 대기 시간이 30분은 족히 걸릴 듯했다. 회사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힐링이지만 그 힐링의 시간을 병원 대기실에서 보내야 하는 게 못마땅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병원에 올 수 있을까? 기왕 왔으니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자라도 끄적여보겠다며 메모장을 열었는데 그동안 여기에 화풀이를 다 했나 싶을 정도로 메모엔 퇴사라는 단어가 흘러넘쳤다. 퇴사를 하겠다는 의지인지, 퇴사를 하지 않으려는 발악인지 모를 엄청난 양의 메모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을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방사선과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손목과 어깨가 포토 라인에 섰다. 견갑골, 견관절, 경추, 수관절을 각도별로 11번 사진을 찍었다. 내 눈엔 보이지도 않는 뼈를 찍는 건데 자세를 취할 때마다 프로필 사진을 찍는 것 같아 괜한 신경이 쓰였다. 의사는 표정까지 신경 쓰며 고심해서 찍은 내 뼈 사진을 차례대로 훑어보며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사무직이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고 하자 의사가 말했다.

“회사 그만두세요!”

이 의사가 뼈를 보더니 내 마음까지 꿰뚫어 보기라도 했나 싶어 왜냐고 물었더니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아픈 거니 일을 하지 않으면 안 아플 거라고 덧붙였다. 의사의 그 한마디가 잠깐이나마 시끄러운 머릿속을 정화시켜 주었다. 회사를 그만둘 이유가 한 가지 추가됐다는 게 이렇게 안도할 일인가? 의사는 이제 본격적으로 치료를 하려는지 손목 꺾기, 앞으로 나란히, 열중쉬어 등 몇 가지 동작을 하는 동안 어디에 통증이 있는지 자세히 물었다. 손목은 옆으로 비틀거나 바닥을 짚고 체중을 실었을 때 통증이 있었다. 어깨와 팔뚝은 가만히 있어도 욱신거렸다. 무거운 걸 들거나 팔을 회전할 때는 오히려 통증이 없었다. 의사의 최종 진단은 이렇다. ‘병명, 많이 써서. 원인, 업무 과다.’ 그러니 일을 안 하거나 꼭 해야 한다면 운동만이 유일한 치료법이라고. 운동을 하려면 통증이 없어야 하니 진통제를 처방해 주고, 손목은 움직임을 최소화하도록 손목보호대를 착용하게 했다. 유독 오른쪽 손목과 어깨가 아픈 건 역시나 컴퓨터를 사용하며 마우스 사용이 잦기 때문이었다.


물리치료까지 야무지게 받고 병원을 나오니 오후 12시였다. 출근했으면 구내식당으로 향할 시간이다. 구내식당 대신 근처 카페로 갔다.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함이 마음에 들었다. 매일 타닥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연달아 울리는 전화벨 소리, 부장의 끝도 없이 큼큼 거리는 소음, 한번 풀면 1시간까지 이어지는 이사님의 수다에서 벗어나 듣기 좋은 음악만 잔잔히 흐르는 적막하기까지 한 카페에 앉아 있으니 이렇게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웠다. 쇼펜하우어는 행복한 시간은 잠깐이고 절망과 불행의 시간이 인생의 대부분이라고 했다. 반대로 말하면 평소에 늘 절망하고 불행하기 때문에 잠깐의 기쁨이 행복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만일 그 말이 맞다면 지금 카페에 앉아 있는 이 시간이 행복하다. 회사에서는 늘 얼굴 찌푸릴 일만 있고 그래서 기분이 다운되기 일쑤이기에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이 시간이 행복하다. 이 행복을 위해서 회사에 다녀야 하는 걸까? 퇴사를 하면 늘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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