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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Oct 22. 2023

전 부치는 날의 두드러기 같은 이야기

전의 이름은 ‘퇴사전’

밭에서 파를 뽑았다.

얼마나 많이 뽑았는지 팔다리허리가 다 쑤셨다. 파뿌리를 잘라내고 지저분하거나 상한 겉잎을 떼어냈다. 하얀 속살을 드러낸 싱싱한 파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흐르는 물에 여러 번 씻어 물이 빠지도록 가지런히 세워 놓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수산시장까지는 40분 이상 걸렸다. 시장에서 살 해산물은 새우와 오징어, 홍합이다. 손질되어 포장까지 깔끔하게 되어 있는 마트의 것을 사도 되지만 굳이 시장까지 간 이유는 맛에 정성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그 정성이 먹는 사람의 혀끝에 닿길 바랐기 때문이다. 새우와 오징어의 껍질을 벗겨 탱탱한 살만 발라내고, 홍합도 마찬가지로 속살만 숟가락으로 퍼냈다. 살 바르는 일만도 1시간 넘게 걸렸다. 진짜는 이제부터다. 부침가루와 튀김가루를 섞고 물에 개었다. 이제 프라이팬에 베이스를 깔고 파와 해산물을 얹어 부치기만 하면 된다. 앗! 그런데 전을 부치려고 보니 식용유가 똑 떨어졌다. 식용유를 사러 가려고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마트는 10분 거리이지만 가는 길에 신호등이 많아 20분 만에 도착, 주차하느라 10분이 또 지났다. 그렇게 전 하나 부치려고 반나절을 준비했다. 이제 정말 전을 부치기만 하면 된다. 모든 재료를 준비하고 가스불을 켰다. 허걱! 불이 켜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밸브를 돌렸다. 점화를 위한 작은 불씨만 튕길 뿐 가스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가스까지 떨어지다니… 도대체 전은 언제 부치지?




부장과 퇴사에 대해 상담하려고 준비한 하루가 허무하게 지나갔다.

오랫동안 마르고 닳도록 생각했는데 그날은 부장이 하루 종일 외근이었고 결국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퇴근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떨떠름한 상태로 퇴근을 했다. 퇴근도 늦었지만 하루종일 입맛만 다시느라 입안이 다 말라버렸는지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명절에 선물 받은 육포를 꺼내 씹었다. 도톰한 한우 육포를 입안에 가득 구겨 넣고 씹으면 그 마른 몸 어디에 수분이 있었던 건지 육즙이 쪼르르 나와 ‘포’계의 명불허전임을 입증해 준다. 역시 스트레스 푸는 덴 포 만한 게 없다. 육포, 어포, 마른오징어가 일상의 해방군임이 명백해지는 순간이다. 잘근잘근 조각난 육포와 함께 하루의 피로를 씹어 삼켰다. 피로의 크기를 알 수는 없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간 그것이 얼마나 컸던지 퇴근한 지 3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잠이 쏟아졌다. 일품 한우 육포가 아직 위에서 장까지 도달하지 못한 그 시간에 말이다. 그리고 그 밤 부치지 못한 전을 준비하는 꿈을 꾸느라 잠자는 동안에도 피곤이 가시질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팔에 두드러기가 나 있었다.

배 터지게 씹어 삼킨 육포 때문인지 씹지도 못한 꿈속의 전 때문인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두드러기가 난 건 5년 만이었다.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바리스타로 일하며 온갖 병을 달고 살던 그때 처음으로 얼굴 전체에 두드러기가 났었다. 하루아침에 붉게 부어오른 얼굴을 가리느라 코로나 시국도 아닌데 마스크를 쓰고 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번엔 그 흉측한 게 손등과 팔목에 퍼져 있었다. 역시나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고 가려움을 참기가 어려웠다. 아침저녁으론 찬 바람이 불지만 낮엔 반팔을 입어야 하는 간절기에 팔이 드러나는 옷을 입는 게 신경 쓰였고 특히 오른손 손등을 덮은 두드러기가 호감을 비호감으로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소복했다. 직접적인 원인은 전날 먹은 육포인 것 같았지만 그보다 더 큰 간접적인 원인이 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부장과 말을 섞기로 다짐했다.


비슷한 이유로 동반 퇴사를 결심하게 된 방대리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알맞은 때를 기다렸다.

오후 3시 30분.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우리는 마실 차를 준비하고 손님 테이블에 앉아 부장을 불렀다. 부장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평소답지 않은 우리의 행동에 안 좋은 예감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인내를 가지로 기다리려고 했지만 쉬는 시간은 너무 짧았고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방대리가 부장님을 다시 호출했다. 그제야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앞에 앉은 부장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이미 짐작을 한 듯 우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부장을 보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부치지 못한 전을 오늘은 꼭 부치리라는 각오를 다시 되새기며 말문을 열었다.

“부장님! 이제부터 좀 불편한 얘기를 하려고 해요.”

부장은 우리를 천천히 올려다봤지만 다음 말은 하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저희 둘 다 퇴사 생각하고 있어요. 더 이상 이대로는 일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두 분이 그만두시면 저도 그만둬야 돼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뭘 바꾸면 될까요?”

부장의 호소는 간절했지만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동안 여러 번 말했지만 변한 게 하나도 없었잖아요.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월급을 올려달라던가, 진급을 원한다던가, 인력충원을 바란다던가, 업무를 줄여달라던가 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 주길 바라는 부장의 바람과는 달리 우리는 바라는 거 없으니 퇴사를 받아달라는 쪽으로만 의견을 말했다. 의견이라기보다는 통보였지만. 딱히 부장을 위협하거나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자신의 설득이 먹히지 않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부장이 조금 있다 다시 얘기하자며 자리로 돌아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우리도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가 어색하기만 했다. 각자의 컴퓨터 앞에 앉아 업무를 시작했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전을 부치면 갈증이 말끔히 해소될 줄 알았는데 부어오른 두드러기만 더 가려울 뿐이었다.


한숨만 푹푹 쉬던 부장이 경영지원팀 팀장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한참만에 돌아온 부장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렸지만 부장은 묵묵부답이었다. 방대리와 난 퇴사를 말할 때보다 더 불편한 기류 속에서 부장의 리액션을 기다려야만 했다. 고객사 전화를 받으면서도, 불량 대책을 위한 이메일을 작성하면서도, 외주업체의 도면 문의로 신경이 곤두선 상태에서도 기다림은 지속됐다. 두드러기 난 곳은 가렵고 부장은 말이 없었다. 팽팽한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퇴근시간 종이 울렸다. 종소리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부장이 용수철처럼 튕겨져 일어나더니 우리를 향해 말했다.

“두  명 인력충원 하려고 해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아주시면 안 될까요?”

이번 퇴사는 두드러기 자국처럼 끈질기게 심기를 거스를 것 같은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퇴사를 안 하는 것보다 퇴사를 하는 게 더 힘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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