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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서 꽃형님 Nov 20. 2019

'복붙 하기'만 잘하면 디자이너?

by 캡틴서

'디자이너'를 정의 내린다면

디자이너, 특히 '패션 디자이너'라고 하면 최신 트렌드로 옷을 입고 쓱싹쓱싹 스타일 일러스트를 그려서 잠~시 고민하다가 소재를 손으로 이렇게 저렇게 만져 보더니 바디에 핀으로 좀 고정시켜보고.. 뚝~딱~, 짜자잔 ~ 하고 디자인한 옷이나 액세서리를 탄생시키는 매우 창의적인 직업이라고 많이들 생각한다. 그리고 남들보다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에 예의는 없고 도도하고 차가운 이미지로 보인다. 이렇게 왜곡된 모습으로 드라마나 영화들이 매우 틀에 박힌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크게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다. 본인의 이름을 걸고 힘들게 시즌별 컬렉션을 창조해 내고 쇼를 통해 대중과 만나는 디자이너들이 아닌 이상, 기업에 소속되어 있는 '디자이너'라는 직무에 속에 있는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디자이너'라는 단어의 정의와 거리가 좀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디자이너든 엠디든 모두들 본인이 속해 있는 기업이나 브랜드 안에서 매출과 이익을 창출하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고,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월급을 받는 직장인의 자세이기도 하기 때문에 크리에이티비티(creativity), 즉 '창의성' 따위는 그다지 필요 없다. 미안한 말이지만 디자인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기보다는 'arrange; 어레인지'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브랜드 방향성에 맞게 브랜드 아이덴티티, 컨셉과 시즌 전략에 따라 상품을 만들어 내기 위한 디자인을 잘 어레인지(사전적 의미 : 각색, 조정, 배열)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인 거다.



작업지시서는 디자이너의 '얼굴'

내가 패션업계에서 일을 시작했던 90년대에는 제품을 만드는 생산공장과의 업무를 위한 도구인 작업지시서를 직접 종이로 된 작업지시서에 그려야 했다. 지금은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리하여 당시에는 디자이너들 저마다의 개성(?)이 묻어 나오는 작업지시서들이 탄생하곤 했다. 어떤 사람은 작업지시서를 살아있는 일러스트처럼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 연필로 밑그림부터 시작해서 꼼꼼히 스티치까지 표시하기도 했다. 개개인의 성향이 너무 담겨있어서 나중엔 작업 지시서만 봐도 누가 그렸는지, 즉 해당 아이템 담당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다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다들 그림(?)은 멋들어지는데 왜들 그렇게 반드시 표시해야 될 사양들은 빼먹기 일수 인지. 스티치 사이즈와 간격, 시접 사이즈, 안감이 있는지 없는지 등등. 그렇게 해놓고 샘플이 제대로 안 나오면 일단 업체 탓을 먼저 한다. 업체는 작업지시서 대로 할 뿐, 더도 덜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디자이너들도 적어도 작지를 만들 땐 좀 더 꼼꼼히 체크했으면 한다. 아니면 다 그리고 나서 한번 더 점검해 보던가.    


요즘이야 기업들이 저마다 전산 시스템에 입력하게 되어 있는 '전자 작업지시서'를 도입해서 일러스트로 작업지시서를 그려서 만들어야 하니 그나마 깔끔하고 알아보기 용이하지만 그만큼 'Ctrl+C, Ctrl+V'를 누르는 횟수도 많아졌다. 컴퓨터 좀 다룰 줄 안다는 사람은 다 아는 '복사해서 붙여 넣기' 말이다. 좋은 점은 작업지시서가 깔끔해지고 알아보기 쉬워졌다는 거고, 아쉬운 점은 모두 다 같은 작업지시서로 보인다는 거다.

어쨌든 디자이너 직무에 있는 사람들이 완성도 높은 작업지시서를 만들어 낼수록 생산팀이나 공장들이 일하기가 수월하고 샘플의 완성도가 좋아진다는 것은 뭐 두말하면 잔소리지. 



디자이너의 자격

소위 말해 '디자인 잘하는' 디자이너라고 하면 브랜드에서는 무엇보다도 판매율이 그 기준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생산 수량 많고 높은 판매율을 기록한 아이템을 담당한 디자이너인 거다. 모든 것은 매출로 연결되는 것이 조직의 이치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디자인 결과물이 나오려면 상품기획자들도 생산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전략적으로 세워야 한다. 그게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지만 결국 엠디와 디자이너의 의견교환과 눈높이 맞춤을 통해 팀워크가 형성되고 호흡이 좋아지면서 좋은 결과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잘 팔리는 상품만 디자인하고 만들 수는 없다. 판매의 중심을 잡아 주는 스타일이 있으면 또 트렌드를 표현하면서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잘 나타내는 '아이 캐칭(eye catching)' 스타일도 디자인할 줄 알아야 한다. 결국 상품을 보는 눈, 브랜드에 맞게 적용하는 센스 등이 있어야 '잘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그러한 경험들이 쌓이면서 브랜드 전체를 보는 눈이 길러지고 브랜드 이익에 기여할 방법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디자인 실장으로서의 역할을 가지게 된다.


일 좀 '잘'한다고 정평이 나 있었거나 실천하고 있는 대부분의 디자인 실장들은 소위 얘기하는 'Branding; 브랜딩'을 위한 '비즈니스 마인드' 장착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고집만 내세우고 지난해의 스타일 구성이나 판매율이 높은 상품의 구성을 답습하며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는 경우들도 많이 보았다. 그러면 상품 구성이나 물량기획을 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브랜드 매니저와의 소통도 지속되지 않고 발전하지 못하게 되어 그 사람의 역할은 거기까지가 되는 거다. 그래서 예전에는 정말 하룻밤 사이에 디자인실 인원이 통째로 교체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매출이 부진하거나 목표 달성을 하지 못하면 디자인실 문제라고 판단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지켜보는 직원들 입장에서는 너무 무모하고 잘못된 방법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오너 입장에서는 최대한 단기간에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는 디자인실에게 그러한 방법을 쓰는 것을 불가항력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만큼 디자이너들이나 특히 디자인 실장에게 지급하는 인건비의 쏠림이 컸고 그랬기에 결과에 대한 책임도 컸다고 하겠다. 


예전처럼 브랜드가 다양하지 않고 브랜드 라벨을 단 옷이 예쁘기만 하면 팔리는 시대에는 그런 것이 통했지만, 지금처럼 상품이 평준화되고 브랜딩이 중요해진 시대에는 각 업무를 맡은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하고 맞물려 상호작용을 하는 인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잘해서 시너지가 나야만 브랜드의 이미지가 좋아지고 매출이 따라오는 시대가 되었다.  



당신도 디자인실장이 될 수 있다.  

브랜드에서 디자이너가 디자인 실장이 되면 그때는 정말 일개 '디자이너'가 아니고 브랜드를 책임지는 운영자의 한 명이 되는 거다. 오히려 업무적으로 엠디, 영업, 마케팅 분야를 아우를 수 있어야 디자인 실장이 아니라 진정 '브랜딩'을 하는 브랜드 매니저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 CD)로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의 실력을 갖추어야 당연히 가능할 테지만, 요즘은 어쨰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도 CD가 많아지는 게 의문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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