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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ofs Oct 28. 2024

[장편소설] 붉은 눈 3부 -6-

 마르크는 서해 갑문에 도달했다. 한동안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22

마르크는 암흑에서 깨어났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빛이 없는 것인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감각은 있는 것 같았다. 눈 앞의 형체가 분간되지않았다. 귀가 먹먹하고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몸은 푹신한 무엇인가에 뉘어져 있었다.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손으로 아래를 만져보니 무엇인가 물컹했다. 굴곡이 느껴졌다. 어떤곳은 딱딱했고 다른 곳은 물렁한 느낌이었다.

 여기는 어디요?

 그는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답변하지 않았다.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고 피비린내와 악취가 코를 찔렀다. 폭탄이 터져 머리를 다쳤고 의식을 잃은 것은 알겠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에 납을 달아 놓은 듯 무거웠다.  엔진소리가 들렸고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르크는 자신이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간정도가 지났을까. 움직임이 멈췄다. 트럭의 뒷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왔다. 마르크는 흐릿하게 형체를 느끼기 시작했다.

 곧이어 차량의 수동기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몸이 수직으로 올라가더니 사체와 함께 굴러 떨어졌다. 목소리를 내려 해도 이제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시체더미에 파묻혔다. 트럭으로 사체를 옮기는 모양이었다잠시 후 다른 곳에서도 푸드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십 구의 사체들이 밀려나왔다. 마르크는 손수레로 사체를 옮겨 거대한 구덩이로 밀어 넣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개성이 아니었다. 한 쪽에서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 여 섯명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손수레를 놓고 그늘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마르크는 몸을 움직여 어떻게든 시체 더미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뭔가를 태우는 역겨운 냄새가 그의 코끝을 찔렀다. 마르크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했다. 가까스로 팔을 들어 손가락을 움직이자 한 사람이 움찔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 몇 명이 그 쪽으로 달려왔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어이 괜찮소?

여기는 어디요? 마르크는 웅얼거리는 소리로 말을 꺼냈다. 잘 들리지 않는지 한 사람이 귀를 가져다 댔다.

여기는 시체를 태우는 곳이요. 잠시 후 두 명의 사람이 함께 마르크를 꺼내 들것에 실어 그늘 쪽으로 옮겼다.

아니 살아있는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요? 이름은 뭐고 어디살고 있소? 인민복을 입은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 물었다.

이 사람한테 물을 좀 갔다 줘. 몸을 일으킬 수는 있소? 마르크는 물을 얻어 마신 후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소. 머리에 큰 충격을 받고 의식을 잃었는데 저 차에 타고 이리로 왔고. 마르크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소. 내가 누군지 어디 사는지.

어이. 여기 이사람 어떻게 해. 살아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없대. 자기가 누구인지.


 마르크는 그늘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씩 몸의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상체를 일으키자 다리에 조금씩 힘이 붙기 시작했다. 여전히 걷기는 힘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산더미 같은 쓰레기 더미와 철광석과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석탄과 철광석을 캐는 채석장 같았다. 신원미상의 사체를 태우는지 매캐한 연기와 고기가 익는 듯한 냄새가 났다. 저녁때가 되자 한 사람씩 하던 일을 정리하고 퇴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자신을 그늘로 데려온 사람은 김석만이었다. 이곳은 황해도 연안군이라고 했다. 개성의 사체처리 시설이 넘쳐나 무연고자나 신원확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보내 태우거나 구덩이에 묻는 것이다. 김석만은 한참을 고민하다 산 사람을 죽일 수 없으니 일단은 기억이 돌아올 때 까지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는 소달구지를 끌고 와 마르크를 뒤에 앉도록 했다.

노모와 나이어린 딸하고 같이 살고 있소. 있는 세간살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고 방이 하나 더 있으니 일단 몸을 좀 추스를 때까지 좀 버터 보쇼.

김석만은 무심한 듯 말을 했다. 어찌됐든 자신을 그곳에 버려두고 오지 않는 것 만해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소는 이들을 태우고 천천히 시멘트가 패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노을을 붉게물 들었고 멀리 보이는 집에서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녁을 준비하는 듯 했다. 김석만의 집은 큰길에서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더 올라가야 했다. 날은 춥지 않았지만 저녁이 되자 한기가 몰려들었다. 더욱이 마르크의 몸은 성치 않아 온몸의 근육에서 통증이느껴졌다. 오솔길 오른편으로 작은 냇가에 물이 흐르고있었고 갈대와 이름 모를 잡초들은 서서히 생장의 시기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지 물이 올랐다. 십 여분동안 길을 따라 가다보니 큰 소나무 나무아래 슬레이트 지붕과 ㄷ자 모양의 집이 보였다. 집은 벽돌로 이뤄졌고 외양간이 딸린 집이었다. 툇마루 앞에 작은 펌프가 있었다.   

거의 다 왔소 저기요. 어머니가 저녁을 준비하고 계실 거요. 저녁을 좀 들고 문간방에서 몸을 좀 지지시오. 그러면 좀 나아지겠지. 김석만은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잠시 후 방에서 열 댓 살 먹은 여자아이가 뛰어나와 그에게 안겼다.

내 딸 선화요. 그래도 이놈 때문에 내가 살고 있소.

누구? 그녀는 마르크를 보고 물었다.

공화국 사람이 아닌 거 같소 아부지.

아니다. 개성말투를 쓰는 거 보니 공화국 사람이 맞다. 그는 그렇게 선화에게 말했다. 아저씨는 몸이 아프시니 쉬도록 놔두고 어디 학교에서 잘 했는지 한번 볼까? 그는 선화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마르크는 문간방에 바로 누웠다. 잠시 후 석만의 모친이 멀건 죽과 간장 그리고 동치미를 갖다 주었다.    

일단 들고 몸을 좀 추스르시오. 그녀는 물과 함께 먹을 것을 건넸다. 마르크는 음식을 보자 갑작스레 식욕을 느꼈다. 옥수수와 쌀이 섞은 죽을 그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마셨다. 마치 음식을 들이 붓는 것 같았다. 음식을 먹자 온몸에서 열이 났다. 세포가 급속하게 생존을 위해  반응하는 듯 했다. 마르크는 곧바로 골아 떨어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지도 몰랐다. 그는 이틀정도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포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멀리서 포격과 총소리가 들려왔다. 마르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김석만과 선화가 그를 보았다.

놀란 게요? 그때 기억이 나서? 김석만이 말했다.

별거 아니오. 그냥 또 교전이 있나보지. 여기서 한참 멀어서 큰일은 아닐 거요. 저들끼리 치고 박는 거지.

이틀을 내리 잔 것 같은데 몸은 이제 괜찮은 거요? 김석만이 물었다.

이제는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소.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좀 쉬면서 천천히 생각하시오. 오늘은 밭을 일구러 가야 해서 나갔다가 와야겠소. 여기서 10리 정도 떨어진 곳이요. 김석만은 그렇게 말하고 달구지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햇살은 점점 따뜻해졌다. 마르크는 조금씩 몸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걸음도 자유롭게 걸을 수 있을 듯 했다. 마르크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실려서 내려온 큰 소나무가 있는 집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외양간 주변으로 잡초와 야생화가 보였다. 달구지를 타고 온 길가에 농수로가 있었다. 마르크는 사방을 둘러 보았다. 주변에 멀리 밭 한가운데 몇 채의 집이 보였다. 나무를 많이 베어서 인지 산은황토색을 띄고 있었다비가 온 후로 농수로에 물이 절반정도 흐르고 있었다. 나무가 없어서인지 물은 맑지 않았다. 누런 흙탕물이 도랑을 절반정도 채우고 있었다. 마르크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기억나는 것은 여기가 북한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거의 죽을 수 있는 사체 처리장에서 김석만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서 며칠 머물 수 있게 된 것이라는 점뿐이었다. 마르크는 막막했다. 어떻게든 기억이 돌아와야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마르크는 그의 농사일을 도와 당분간 머물러 볼 생각이었다. 오후 일을 마치고 김석만이 돌아왔다. 잠시 후 그의 딸 연화도 학교를 마치고 집 앞에서 만났는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는 그를 보더니 뭔가 부끄러웠는지 아니면 경계심인지 아버지의 품에 숨어 거리를 두고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애가 낯을 좀 가리오. 이제 걸을 수 있는 거요? 아까 오면서 형씨의 이름과 집을 찾는 것을 좀 도와주고 싶은데 그러려면 개성까지 가거나 근처까지 가야 하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복잡해. 보위부와 안전성에서도 패가 갈려서 서로 치고받고 숙청이 일어나고 있으니 선생의 신원을 파악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소. 분주소나 보안소도 지금 난리인 상태고 반동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으니.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사태를 보고 움직이시오. 김석만의 말도 일리가 있다. 분명히 자신도 장마당에서 폭탄이 터져 머리를 다 친 후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마르크가 물었다. 당분간 상황을 보고 움직이시오. 사태가 잠잠해 질수 있고 개성도 상황이 좀 정리가 되면 그때 가보시오. 그게 나을 것이요. 김석만은 웃으며 말했다.

몸이 좀 괜찮으면 농사일도 좀 돕고. 기억이 돌아올 때 까지 만이라도 지금 일손이 없소.


마르크는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당장 갈 곳도 마땅치 않았고 그의 집을 나간다고 해도 다른 대안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크는 그렇게  일을 시작했다. 특별히 힘든 것은 없었다. 때가 되면 일어나 김석만과 밭을 갈았고 농사에 필요한 자재를 날랐다.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고 가끔씩 내리는 비는 싹을 틔었다. 몇 달이 지나자  마음이 편안해 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가끔 김석만의 가족과  저녁을 먹고 TV를 보거나 그의 집에 있는 오래된 소설들을 읽기도 했다. 규칙적인 생활로 인해 건강이 좋아지기 시작했는지 식욕도 늘고 몸도 한결 개운해 졌다.  가끔 석만의 딸과 조금씩 거리감이 줄어들고 그녀의 낮가림도 줄어들었다. 어느날 그는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선화는 이름도 모르는데 혹시 이런것들은 아냐고 수학과제에 대해 물었다.


 별 기대는 안하는 눈치였지만 마르크는 어려움 없이 과제를 도와주었다. 그는 선화에게 문제의 의도와 원리를 설명해주었다. 이들은 이름도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용과 풀이는 어떻게 아냐고 신기해했다. 마르크도 마찬가지 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고 계절이 두어 번 바뀌기 시작했다. 마르크는 아직까지 자신의 기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공장이나 시설에서 흰색 옷을 입고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하게 무엇인가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몇 번이고 반복됐지만 그때마다 깨어나면 흐릿한 형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가고 있었고 계절은 이제 초겨울이었다. 마르크는 어느덧 북한 황해도 일대의 농부와 다름없었다. 석만의 옷을 빌려 입고 그와 함께 가을걷이를 다녔으며 종종 날품팔이를 할 때도 있었다. 사람들이 마르크에 대해 물으면 석만은 먼 친척뻘의 사람이라고 적당하게 둘러댔다. 선화나 석만의 어머니와도 어느 정도 친해져 스스럼이 없이 시간을 보냈다. 마르크는 가끔씩 그녀에게 수학에 대한 공부를 가르쳐 주며 둘은 친해졌다.


아저씨는 뭔가 공화국 사람 같지가 않소.

그래. 아직도 그러나? 그럼 어느 나라 사람처럼 보이나?

남조선? 남조선 사람들은 다들 잘생겼다고 해서. 아니 러시아나 외국사람 같소. 마르크는 웃으며 아직까지 기억이 분명하지 않아 자신도 외국에서 온것 같다고  둘러댔지만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외국사람이 왜 개성 사투리를 쓰고 여기서 아버지 따라 농사를 짓고 있소?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럴 때마다 마르크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때리며 수학문제를 풀라고 다그쳤다.


석만은 가끔씩 장마당에 들러 자신이 기른 농작물을 내다 팔거나 옷이나 다른 물건으로 교환해 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개성의 상황이 어떤지 들려주었다. 어느 날은 상태가 심상치 않다며 외국의 군대가 들어올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돈다 고도 했고 평양근처에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고도 했다. 김병철 사령관이 화학무기를 썼다는 것이다. 마르크의 기억은 가끔씩 회복되는 경우가 있었으니 단편적인 기억이 전부였고 그 기억이 무엇을 말하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영원히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을 찾지 못할까봐 두렵기도 했다.북한의 겨울은 매서웠다. 솜으로 만든 옷과 장마당에서사온 거울용 점퍼를 입었지만 매서운 한기가 옷 속을 파고들었다. 겨울이 지나고 계절이 또 몇 번 바뀌었다. 마르크는 이제 기억을 포기해야 하나 싶은 순간이 들 기도 했다.


 그날 마르크는 문간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김석만은 오후에 만날 사람이 있다고 지역을 넘어 해주에 다녀온다고 했고 선화는 학교에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다. 선화가 다쳤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장난을 치다 공사 중인 날카로운 건물의 철근에 팔과 다리가 찢어졌다고 했다. 마르크는 서둘러 뛰어가 선화를 업었다. 병원까지는 거리가 있었고 이미 일과가 끝난 시간이었다. 석만도 아직 귀가 전이었다. 선화는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녀를 업고 집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실신해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저 혈량성 쇼크가 올 수 있었다. 옆에서 그녀의 친구는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마르크는 일단 지압을 하고 상처를 봉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처부위를 압박해 이물질과 피를 흘려보냈고 지혈대를 사용해 출혈을 막아야 했다. 마르크는 괴사를 막기 위해 반복적으로 지혈대를 풀었다 조였다. 이후 몇 번을 반복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맥 쪽에 손상이 간 모양이었다.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마르크는 할머니에게 서둘러 선화에게 술을 먹여 일단 재우라 했고 실과 바늘을 가져와 소독을 했다. 그리고 난 뒤 임시로 상처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다행이 선화는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마르크는 피를 흘리며 고통에 소리치는 선화를 보며 강석철의 얼굴이 스쳤다. 선화를 치료하면서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이다. 그는 분명히 기억했다. 이들의 실험과정이 생생했다. 그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도 떠올랐다.  그는 두해가 넘어서야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 마르크는 소리를 질렀다.

뒤늦게 집에 도착한 석만이 상황을 파악하고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선화를 부축해 따뜻하게 입힌 뒤 달구지를 타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였지만 일단 병원으로 가는 것이 나을듯했다. 석만은 마르크에게 집에 남아있으라는 말과 함께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석만은 하루 뒤에 돌아왔다. 선화는 아직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며 초기 대응이 좋아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해 주었다고 했다. 석만은 마르크에게 고맙다고 눈시울을 붉혔다마르크는 나중에라도 약이 부족하면 버드나무 껍질이나 가지를 달아서 상처에 바르고 먹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소염과 진통제로 쓰인다고 알려주었다. 그날 석만은 마르크에게 오래된 머루주를 꺼내 술자리를 만들었다. 둘은 머루주를 마시며 일상의 이야기를 이어마갔다. 마르크 역시 할 말이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마르크가 말을 꺼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소. 기억이 돌아왔거든.

아니 그게 정말인가? 잘 되었네.

그래 어떤 사람이었소? 군 간부요? 아니면 당의 고위직에 있었소?

둘 다 아니오. 마르크는 슬쩍 웃음을 지었다.

내가 사실을 말하면 김 형이 고초를 겪을 수도 있을 거요. 신고해도 좋소. 마르크는 자신이 어디에 있었으며 어떤 일을 했는지를 이야기했다. 석만은 쓴 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사람처럼 보이긴 했소. 말투나 표정이나 여러 가지를 봐서. 공화국 사람 같지도 않았고. 그래 이제 어쩔 생각이요? 사태를 보아하니 개성에서 자주 치고받고 할 것 같소. 그리고 개성의 공단이 더 커질 모양이요. 근처에 사람들이 공단에 일하러 많이 간다고 하고 공단 운영에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할거요. 외국에서도 들어올 모양이고. 그쪽 장마당에 가보았소?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

아니 아직 가보지 않았소. 선화를 치료할 때 피를 지압하면서 그때 생각이 났지.

장마당이 더욱 커졌고 달러나 위안화가 사용되는 모양이야. 이제는. 노동자를 상대로 장사를 하니.

김병철이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뭔가 많이 바뀔 모양이지?

평양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 그런 것을 원하지 않겠소. 마르크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면서 말을 꺼냈다.

기억은 돌아왔지만 아직 돌아가기는 싫소. 당분간은 북조선의 여러 곳을 좀 돌아다녀 볼 생각이요.

아니 정신이 있는 게요. 여기는 남조선이나 미국이 아니요. 보위부에 끌려가 잡히면 노동 교화형이요. 형씨는. 간첩으로 몰려 죽을 수 있소.

알고 있소. 그래도 이곳 사람들이 사는 것을 더 보고 싶은 거요.

못 말릴 사람이구만. 정 그렇다면 내 공민증을 가져가시오. 혹시 모르니까. 써 먹을 곳이 있을 거요. 그리고 그 동안 일한 값을 쳐줘야겠지. 김석만은 빙긋이 웃었다. 언제 떠날 거요?

내일 선화에게 안부 잘 전해주고 어머니한테는 내가 인사 드리겠소.

선화가 섭섭해 하겠구만.

공부에 재능이 있어 보였소.

그래봐야 여기서는 성분이 중요해서.

기회는 있으니까.

그럼 기다리시오. 내가 려행증을 만들어 주겠소. 려행증이 없으면 지역 경계를 넘기가 힘들 거요. 마르크는 며칠 뒤 석만이 준 여비와 공민증 그리고 려행증을 받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구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요. 필요 할 때는 달러를 쓰시오. 위기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거요.     

혹시 검문에서 잡혀 보위부로 끌려가게 된다면 내가 공단에서 일했던 사람인데 기억을 잃어서 여기까지 떠밀려 왔다고 하면 믿어줄까 모르겠소. 마르크는 웃음을 지었다. 김석만은 어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단촐 하게 챙긴 짐과 먹을 것을 넣은 배낭을 메고 서쪽으로 걸었다. 그는 해주와 사리원을 거쳐 해서 송림과 남포까지 일단 여정으로 삼았다. 평양은 갈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르크는 아버지가 말했고 오래전 자신이 생각했던 오언의 이상적 공동체로서 이곳이 가능할지. 한편으로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간이 환경에 따라 변화하며 그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 불편한 환경 풍족하지 못한 물자, 억압적 정치 상황 이곳은 과연 변화를 통해 이상적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마르크는 그 점이 궁금하기도 했다. 생판모르는 자신을 묵도록 해주는 사람들. 부족한 음식도 나눠먹을 줄 아는 이들의 생활은 궁색해지만 원초적인 매력이 있었다. 마르크는 이들의 생활을 알고 싶었다. 연안에서 해주로 그리고 사리원으로그는 조금씩 걸어가며 사람들을 만났다. 중간 중간 석만이 준 돈으로 음식을 사먹고 묵을 곳을 정했다. 잘 곳이 없던 어느 날은 해변 동굴에 들어가 모닥불을 피우고 잠을 청했다. 얼어 죽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동굴에서 불을 피우니 생각보다 따듯했다. 북한의 날씨는 북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추워졌다. 도로변을 걸으며 운좋게 차를 얻어 타기도 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마르크가 외국사람이냐고 물어보았고 그는 친척을 만나러 간다고 둘러댔다. 말투를 들으면 대부분 수긍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박했고 그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다들 살기가 어려워 같은 처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편의를 봐주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마르크는 가끔 통행증을 요구받기도 했다.


 조마조마한 생각이 들었지만 석만이 준 공민증과 려행증 그리고 그가 알려준 이동에 필요한 여러 방법은 유용했다. 발발이(주:북한에서 사용하는 택시로 취급되는 탈 것의 한 종류) 를 타기도 했고 행정구역의 경계를 넘는 서비차(주: 택배 서비스와 비슷한 개념으로 지역의 경계를 넘을 때 이용하는 교통 수단)를 인민들과 함께 이용하기도 했다. 김석만은 사회 안정성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마르크는 여러 소도시를 돌아다녔다곳곳의 장마당을 거닐고 식사를 해결했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았다. 잠시 음식을 먹으며 모닥불을 쬐거나 따듯한 곳에서 밥을 먹고 한잠 잘 수 있냐고 물으면 대부분  부탁을 들어주었다. 물론 일부의 여비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했다. 마르크는 그렇게 몇 달 동안 북한의 서쪽 지역을 돌아다녔다. 외각으로 갈수록 주민들의 삶은 더욱 빈곤해 보였다. 개성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이들을 위한 삶은 무엇일까? 과연 북한의 이 정치와 경제체제가 이들의 삶을 바꿔 낼 수 있을까? 이들의 자립을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이상적 사회주의 체제로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공동체. 그가책을 통해서 읽었던 사회주의 계회경제의 실체 그 모든것은  허울 좋은 공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북한을 추종하던 일부 그들이 이곳에서 주민들의 삶을 보았다면 입을 닥치고 다들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말한 것은 이런 체제가 아니라는 변명이 늘어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북한의 서해안을 돌아다니며 마르크는 언제부터인지는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냥 가는대로 순례자처럼 걸거나 차를 얻어 타고 가며 사람들의 삶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석만과의 기간은 특별했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오자 지금까지 겪었던 그 모든 상황과 결과물들이 녹슨 철문을 열 때 밀려드는 잔해물 처럼 비명을 질러대는듯 했다. 석철과 동식 그리고 나머지 인원들은 아직 살아 있을 것인가. 흥분제와 근육 강화제 그리고 펜타닐의 조합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바뀐다면 갑작스레 몸은 이상에 빠져들 것이다. 지켜야 하는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과도한 근육의 사용도 온몸의 혈관을 파열시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수 십 년에 걸쳐 연구한 결과물일수도 있는 그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어떤 권력자가 이들을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석철 일향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타인의 의지대로 살 것인가.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새 그는 서해 바다에 도달해 있었다. 남포 근처 서해 갑문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저녁때가 되자 몇년간 보지 못했던 낙조가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한동안 마르크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근처에 묵을 곳을 찾아보았다. 려행증이 있으니 뇌물을 조금 주면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번 같은과정을 겪었다. 하루를 묵고 해주로 간 뒤 연안에 있는 김석만의 집에 다시 들를 생각이었다. 이후에 일단 공단으로 일단 돌아 갈 생각이다. 벌 써 몇 년이 지나 그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그전에 검문에 걸려 보위부나 안전성으로 끌려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그렇게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상황은 바뀔 수 있다.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긴다면 그렇게 그것은 어쩔 수 없다.  마르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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