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님 만만세!!
[ 잊을 수 없을 "운수 좋은 날" ]
오늘 새벽 다섯 시 반.
어제도 밤을 설쳤는데 왜 이렇게 눈은 빨리 뜬 거야.
이걸 보려고 그랬나 봐.
아무도 못 봤을걸? 이라며
이 새벽에 혼자
잠옷바람으로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며 사진을 찍는다.
나 오늘, 새벽부터 하늘을 '시크릿 선물'로 배송받은 기분
그냥 이유 없이 마음이 뭉클.
운수 좋은 날의 시작!
이런 걸 보면 당장이고
이 장면을. 이 기분을 종알종알. 재잘재잘 나누고 싶은데 그럴 사람이 없다는 게
혼자되고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아.
그런데 사실 오늘의 본론은 이게 아니라,
정신 차리고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오늘의 주제는
잊을 수 없는 "운수 좋은 날"
어제 우리의 마지막 계획이었던 심야영화 보기는 무산이 되었다.
이유는 마땅히 보고 싶은 영화가 없기도 했지만
우리에겐 어제저녁이 잊을 수 없는 밤이 되었기에.
어제저녁식사를 하면서 또 둘이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는데,
국어학원에서 문학작품의 경우엔 부분발췌가 아닌 중요 도서의 경우 전체 읽기가 과제로 나오는데
그래서 과제를 했냐 안 했냐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가
수능지문 같은 거 부분만 보고 문제 푸는데만 집중하지 말고,
주옥같은 작품들이 교과서나 수능에 지문으로 나오는 거니 시간이 될 때
전체를 읽어볼 수 있게 노력을 하라는 잔소리? 가 본의 아니게 시작되었는데.
아기새가 자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자기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슬픈 책이고 잊을 수 없는 책이라고 해서
순간 (긍정적 의미)의 충격을 받으면서, 애써 티를 내지 않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침착하게
"왜 좋았어, 그 책이?"라고 물으니
"하루종일 좋은 일이 생겨서 기분이 좋았던 김첨지가 집에 가는 길에 아내가 좋아하는 국밥을 사갔는데
아내가 죽어있었잖아. 그걸 보고 김첨지가 오늘은 왠지 운수가 좋더라니...라고 말하잖아....
나는 그 장면이 너무 극적으로 슬펐어. 현진건은 천재라고 생각했어.
우린 이미 이게 소설이고 반어적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읽지만, 현진건은 소설을 쓸 때
이 슬픔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생각을 도대체 어떻게 했을까? 너무 슬프잖아"
라고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결국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대성통곡을 한다...
(아,, 신이시여,,, 우리 대문자 T 딸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군요 만세!)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덩달아서 눈물이 쏟아지고, 둘이 서로 그 모습을 보며 울다 웃다 난리.
그러다가
"그러니까,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잘해야 해. 부부끼리도, 부모자식도,
그래서 옛말에 자식이 효도를 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아?"하고 했더니
이번엔 아기새가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 “ 라는 거 아닌가!!!
"너 그걸 알아??"
"한문시간에 배웠거든 ㅡ.ㅡ"
와... 갑자기 뭔가 대화가 너무 즐거운 것. 자꾸 가지를 뻗어나간다.
"그럼 너 현진건의 [빈처] 혹시 읽어봤어?"
"어, 그것도 읽긴 했는데 그건 운수 좋은 날만큼은 슬프진 않았어"
" 너 그 빈처가 무슨 뜻인 줄 알아?"
" 아니 "
" 가난할 빈, 아내 처 - 가난한 아내란 뜻이고, ~~~~~(이하 생략)
한참을 둘이서 빈처를 가지고 전에 아이에게 설명했던 [행복총량의 법칙]을 비교하며 다시 이야기 삼매경.
"너 또 뭐 소설 중에 좋아하는 책 있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뭐? 이문열 소설??"
"그게 좋았어? 왜?"
"엄석대와 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정말 똑같잖아, 정말 잘 나타냈다고 생각했어.
권력자와 그 아래에 지배당하는 힘없는 이들의 모습?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가지고 엄청 매칭을 잘했다고 생각해"
다 나열할 수 없지만,
팔불출이라 해도 오늘만은 말릴 수 없음...
어제 둘이 이런 대화하면서 두 시간 넘게 떠드느라, 영화도 못 보고, 내 목감기는 더 심해지고
그러나 나는 가슴이 벅차고 너무 행복했다.
지난여름방학 시작할 때
제인에어를 사주면서 이 책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었고 블라블라~ 하면서 선물했으나
별 관심이 없고, 평소에 워낙 시크해서 반쯤 포기했고... 이런 날 올 줄 몰랐지.
운수 좋은 날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고 함께 가슴 아파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무슨 책이면 어때.
어제야말로 잊을 수 없는 엄마에게 "운수 좋은 날"이었네 ^^
이제 정말 너는 내 친구가 되어가는구나.
아가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키만 나만해진 게 아니라 생각도 마음도 크고 있었구나.
김첨지를 떠올리며 우는 게 이뻐서 사진 찍으니 엄청 싫어했지만, 이거 엄마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싶어! 했더니 겨우 허락받고 우는 현장도 하나 찍어두고!
어제 이 아이를 재우고, 나는 한동안 가슴이 벅차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젯밤의 이런 가슴 벅찬 이야기를,
오늘아침의 이런 아름다운 감동을
오롯이 나눌 사람이,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것이 진짜 외로움이겠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참으로 다행인 건
글로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하면서
유, 일, 한. 이는 비록 없어도
함께 공감해 주는 이는 이곳에 많아졌기에 지금의 삶도 나쁘지 않다, 감사하다고 생각한 날.
그래서 오늘은 집콕하면서
어제의 감동을 곱씹고 곱씹으며 엄마로, 주부로 참하게 성실하게 집안 살림 중 ^^
이번주말은 감동을 선사한 아기새를 위해 주말 끝날 때까지 친절한 엄마로 마무리할 테다 ㅎㅎㅎㅎ
덧) 오늘부터 제일 존경하는 작가는 현진건 님이 될 것 같아요 만세 만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