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희망에 차서 도시락통을 들고 가던 아빠는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며 점점 초조해지고 예민해지셨다. 엄마는 그때 아셨던 것 같다. 이 길은 구렁텅이로 빠지는 길임을~
엄마는 여러 번 진심을 다해 간절히 말리셨지만, 이미 돈을 잃고 잃은 아빠는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에 엄마의 말을 믿음 없는 말이라고 일축하며 계속 선물투자를 하셨고 총 7년을 하셨다.
처음엔 살던 아파트에서 나와야 했다. 아빠가 00은행에 다니며 현금을 모아 산 아파트. 1층에 살았는데 거실 앞에 아빠가 포도나무를 심으셔서 여름이면 작지만 보랏빛의 포도가 열리던, 학교까지 걸어서 3분 거리여서 고등학교 때 나의 수면시간을 책임져 주던 고마운 아파트는 헐값에 팔렸다. 아빠는 그 돈으로 선물투자를 계속하셨고, 손실을 보셨으며 우리는 훨씬 작은 빌라로 이사를 갔다. 이미 이때즈음 아빠가 받은 퇴직금 3억은 다 손실을 봐서 사라졌고, 아빠는 카드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 최대한도로 받아 까드깡을 하셔서 생긴 돈으로 계속 선물투자를 하셨다. (이 당시 신용카드를 어찌나 무분별하게 발급해 주었는지, 지금도 이 당시 신용카드를 무분별하게 발급한 것이 신용불량자를 많이 양산한 대표적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난 4년 동안 매주 과외를 3~4건 하며 나의 용돈과 우리 집의 기본 생활비 중 일부를 보탰고, 등록금을 아끼기 위해 교회 봉사하는 시간, 예배드리는 시간 외에는 공부에 매진해서 대부분의 학기에 부분 혹은 전체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장학금을 못 받던 학기는 아빠가 친척 분들에게 부탁해 돈을 빌려 내주셨다. 기숙사는 더 멀리 지방에 사는 학생들에게 밀려 들어가지 못했고, 자취할 돈은 없었기에 4년간 수업이 있는 날에는 늘 왕복 4시간, 푸시맨이 밀어야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숨 막히는 지옥철을 타고 등교를 했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는 아침 8시 교양필수과목 수업이 많아서 대학생인데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야 되는 날이 자주 있었다. 그리고 이때 마침 당산철교가 붕괴되고 다시 건설 중이어서 원래 전철노선보다 훨씬 돌아서 가야 했다.
과외비에서 생활비를 드리고 남은 돈은 딱 전철비와 점심 식비 정도였다. 한 번은 같은 전공 친구들끼리 모임을 하고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떡볶이 사 먹을 몇 천 원의 여유가 없어서 다른 일이 있다고 둘러대고 집에 돌아간 적이 있다.
빚은 계속 늘고 늘어 어느덧 3억의 퇴직금을 날리고, 다시 3억 정도의 빚이 생겼다. 그것도 질이 나쁜 빛, 카드깡을 했으니 카드 회사에 진 빚이 대부분이었다.
엄마는 이렇게 계속 불나방처럼 선물투자를 빛이라 생각하고 계속하는 아빠를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기도만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에 다녀온 엄마는 떨며 말씀하셨다.
"딸, 변에 피가 섞여 있어. 저번엔 그냥 그런가 했는데 계속 그러네. 병원에 가야 될 것 같아."
병원에 가니 직장암 2기 정도 됐고, 수술 후 방사선/항암치료를 받으셔야 했다. 아슬아슬하게 항문은 보존할 수 있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일들이 계속 밀려왔다.
아빠는 빚에 쫓기니 죽고 싶지만, 괜히 잘못 건물에서 떨어지면 죽지 않고 장애만 입어 가족을 더 힘들게 할까 봐 그러지도 못하신다고 말하셨다. 나는 정말 100만 원이라도 매달 벌어야 되겠다 생각해 4학년 때 일찍 회사에 취직했다. 벤처 붐이 일 때 아는 분이 반도체 관련 벤처를 창업해서 C/S 업무 보는 일을 맡아하며 월급을 받아 집의 생활비에 보탰고, 학교는 양해를 받아 시험 보러만 등교했다. 그러나 이 벤처 붐도 사그라들어 다닌 지 10개월 만에 회사는 문을 닫았고, 우리 집은 절박하게 빚만 많고, 생계비는 0원인 집, 그럼에도 아빠는 계속 어떻게든 돈을 빌려 선물투자를 하시고, 엄마는 직장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는 그런 집으로 전락했다. 어떻게든 내가 돈을 벌어야만 하는 그런 상황으로 치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