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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Aug 20. 2019

이혼은 처음이라서요 #3 아내의 꿈은 비구니 스님!  

사랑이 떠난 공간은 더 이상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여주 신륵사 입구의 나한상 중 하나다


아내의 독립선언

     

오래전부터 아내는 혼자 살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나와의 문제 때문이라고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예기치 못한 질병이 찾아왔을 때 아내의 소원대로 혼자 살게 해 주었다. 그것도 3년이나 혼자 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아들과 둘이 살았다. 나라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남편 없이 살았다는 의미다. 언제부터 나는 아내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부부로서 살았던 기억은 신혼기간 동안의 잠깐이 전부였다. 연애도 짧았고 아이도 바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실 신혼이라는 기간도 거의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모든 관심은 아이에게 집중되었다. 아이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라고 이해하려 노력하였다. 실제로 아이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그 문제들로 인해 아내가 받은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다행히 그 고비를 넘기고 아이는 정상적으로 잘 자라주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이제는 불쌍한 남편에게도 관심을 조금은 줄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서열은 항상 집안에서 4번째로 꼴찌에 벗어난 적은 없었다. 심지어 둘째 아들 고양이 단오보다도 아래였다. 단오가 아프거나 감기에 걸리면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주고 머리에 물수건까지 올려주며 간호를 하였다. 하지만 내가 아프면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못하였다. 아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아프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아파도 참아야 했고, 출근해야 했다. 나는 늘 단오가 부러웠다. 단오는 아프면 하루 종일 드러누워서 잠도 자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심지어 맛있는 특별 간식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아내는 슈퍼에 달려가 싱싱한 닭 가슴살을 사다가 가위로 정성스럽게 잘라서 주곤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는 남처럼 느껴졌다. 서로의 생활공간도 달랐다. 하지만 가계의 직원들 앞에서 그런 내색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쇼윈도 부부였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고 고쳐나가야 할지, 노력해서 과연 성과가 있을지를 수도 없이 고민해 보았지만 아내의 성격상 관계 회복은 요원해 보였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아내도 안쓰러웠지만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하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아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사업을 하고 직원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고 많은 대인관계를 하면서 원만한 사회생활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거기에서부터 나의 외로움이 우울로 바뀌는 시점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아내는 늘 비구니처럼 혼자 살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내도 똑같았다. 결국 어머니의 문제는 아버지였는데, 그렇다면 아내의 문제는 나일 가능성이 아주 농후하였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문제가,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로 승계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대물림할 게 없어서 부부간의 그런 문제를 대물림한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내의 문제는 어머니의 문제였고 아버지의 문제는 나의 문제였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수백 번 맹세하고 또 맹세한 나는 결국 아버지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는 또 다른 방법의 몸부림도 결국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DNA의 저주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하였지만 아버지와는 전혀 닮지 않은 또 다른 닮은꼴이었다. 그 슬프고 기구한 역설은 아내를 힘들게 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못난 남편이라는 사실을 절묘하게 반증하고 있었다.  슬프지만 사실이었고 그 사실은 현실로 집요하게 파고들며 부부 사이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제는 어머니나 아내의 독립선언이 이해가 간다. 물론 나도 그 독립선언이라는 걸 하고 싶었다. 즉, 혼자 살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는 의미다. 혼자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것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자유 의지대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나 아내가 했던 말도 모두 일맥상통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삶에 파묻히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관계에 파묻히고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촘촘하게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자유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그리고 시선을 줄 필요도 없는 자기만의 공간에서 그렇게 혼자 살 때 누리는 특권이라는 걸 20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우물쭈물하다 혼자 살아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원도 들어주지 못하였다. 결국 어머니는 뇌경색으로 쓰러졌고 돌아가셨다. 아내까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에 평생을 경찰서 한번 안 가보신 아버지를 험담하는 아들이 되어가는 자신이 싫어졌다. 아버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집 밖에서는 "법 없이도 살 분"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경찰서 한번 안 가보고 그렇게 살고 계신다.

      


   

사랑이 떠나간 자리

     

이혼을 하려면 누군가는 그 원인을 제공하기 마련이다. 물론 일방적으로 한쪽이 제공할 수도 있고 서로 간에 제공할 수도 있다. 나는 그동안 서로 간에 그 원인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하였다. 아내도 피해자였지만 나 또한 피해자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서 괴롭고 힘든 나날을 보낸 것도 사실이다. 아내를 원망하기도 하였다. 단오만도 못한 대우를 받고 가장으로서의 책임은 다해야 하는 삶이 너무도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삶은 나를 점점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는 찬바람만 불어댈 뿐이었다. 같이 살아도 떨어져 살아도 어쩔 수 없는 그 황량함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냥 참고 살아갈 뿐이었다. 그렇다고 아내의 마음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점점 외로움이라는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친구가 필요하였다. 나를 이해해주고 나의 말에 공감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필요하였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었다. 그렇다고 외도를 하며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진작 내가 먼저 이혼을 요구하고 가정을 포기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친구가 필요하였고 단 며칠만이라도 그런 친구에게 마음을 의지하고 싶어 졌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남녀 간에 친구 사이의 선을 지킨다는 것은 항상 논란의 소지가 많은 이슈이기도 하고 실제 그러한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그런 관계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있다. 지금도 오랫동안 그런 사이를 유지하는 대학 후배들이 있다.

     

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그런 친구들은 말이 되지 않는 헛소리일 뿐이다. 설사 같이 잠을 자지 않았더라도 그런 친구들과 같이 여행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를 외도로 보고 있었다. 생각의 차이는 크고 넓었다. 그 차이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부부간의 신뢰가 깨지고 사랑이 식은 상태에서 모든 행위는 일탈이고 분란의 소지가 되었다. 사랑이 떠나간 가정에서도 지키고 존중해줘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러한 생활을 평생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부간의 다툼이 많아진 것도 이러한 문제들 때문이었다. 실제로 부부간에 중요한 요소들이 빠진 상태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은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부부라는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언제든 바람에 날아가 버릴 만큼 허약한 것이었다. 그 울타리를 지키려는 노력은 바로 아이 때문이었다. 아이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은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이혼을 미루는 것이었다. 사랑이 있고 없고를 따지는 일은 너무도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부모의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오래전에 떠나버리고 없는 사랑을 더 이상 갈구하지 않으면서도 부부로서 남편으로서 아이의 아빠로서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사실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삶이 연극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연극의 대본이 잘 짜이지 않아 너무 어색하다는 느낌을 수시로 받았다. 이왕이면 치밀하고 반전이 있는 시나리오를 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곤 하였다. 때로는 삶이 연극인지, 연극이 삶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외로웠고 그 외로움은 우울을 불러오곤 하였다.

     



나의 브런치에 올려진 모든 글들은 [하루만에 책쓰기]로 써서 별다른 퇴고 없이 올려진 글들이다. 
참고로, [나는 매주 한권 책쓴다]란 주제로 정기 강의를 하고 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서는 매주 수요일 14:00~16:00, 서울 선정릉에서는 매주 금요일 19:00~21:00다. 글쓰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하루만에 책쓰기]를 통해서 실제로 매월 또는 매주 한 권 책을 쓸 수 있도록 고정관념을 적나라하게 깨트려주는 강의다. 실제로 필자처럼 매주 한권 책을 쓰는 회원들만 20명 이상이다. 매월 한 권 책을 쓰는 회원들까지 합하면 100여명 이상이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수강신청은 온오프믹스닷컴에서, 월출산 상시 강의 문의는 010 3114 9876의 텍스트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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