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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Jun 02. 2024

브레이크가 있으니 믿고 달릴 수 있는 거야

조수의 덕목


어릴 적 장기를 배울 때 각인된 말이 있다.


"버리는 수가 없어야 해. 지금 바로 보이는 수가 없다면 다음 수까지 생각해서 말을 움직이는 거야."


그냥 단순하게 눈앞에 당장 보이는 길만 쫓지 말고 상대의 다음 수 다음 수까지 내다보고 움직이는 것이 고수의 덕목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것이 조수의 덕목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사수의 손놀림, 일하는 모양새와 흐름을 내다보고 다음에 필요한 도구를 미리 손에 들고 옆에 서있을 수 있어야 한다. 사수의 손과 발이 되어 말하기도 전에 먼저 눈앞에 내밀 수 있다면 작업의 능률과 합일도를 높일 수 있다. 수술실에서 합을 맞추는 집도의와 간호사도 이와 같지 않겠는가. 척하면 착이다!  


사수가 높은 곳에서 사다리 작업을 할 때 조수의 역할이 특히 더 중요해진다. 손과 발을 넘어 눈도 되어주어야 한다. 지켜보는 눈! 막상 사다리를 직접 가까이에서 보면 어떻게 이걸 믿고 올라가서 일하지 싶을 만큼 부실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사다리를 믿고 올라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다리 아래를 지켜주는 사람을 믿고 올라가는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사수의 안전을 조수가 지킨다. 안전은 기본이자 제일이다. 시선이 미처 닿지 않는 모서리나 장애물도 조심할 수 있도록 미리 알려주어야 한다. 사수가 사다리 위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가능하면 크게 움직이거나 오르락내리락할 일이 없도록 손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조수의 중요한 덕목이다.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3 천보는 거뜬히 채운다. 조수의 복지를 위해 무릎보호대라도?


그리고 또 한 가지 정말 중요한 조수의 역할은 바로 브레이크가 되는 일이다. 조수가 사수에게 쉼표를 찍어주어야 한다. 반드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의 사수는 한 번 손댄 작업이 자신의 수준기에 딱 맞아떨어질 때까지 멈출 줄을 모른다. 끝낼 때까지 쉬는 법이 없다. 아침부터 시작한 작업이 점심도 못 먹고 오후 두세 시까지 이어지기 일쑤다.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과 절대 일 같이 못한다고 잔소리를 할 수 있는 기회이다. 나니깐 같이 하지! 조수의 몸값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조수가 쉼표를 찍어주지 않으면 사수가 위험해진다. 너무 달리다가 브레이크가 파열될지도 모른다.



당신은 나를 믿고 뒤를 맡기고

나는 당신을 믿고 곁을 내주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무림의 고수라고 할 만하다. 서당개 삼 년이면 천자문을 외듯이 집수리 조수로 일 년 가까이 쫓아다니다 보면 기본적인 도구는 최소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도구는 전동 드라이버이다. 앞에 끼우는 비트를 바꿔주면 드라이버도 되었다가 드릴도 되었다가 육각렌치도 되었다가 용도를 다양하게 바꿔 쓸 수 있다. 혼자 힘으로 못도 박을 수 있고, 나사도 조일 수 있고, 간단한 가구 조립도 할 수 있게 된다.   



화살표가 그려진 방향대로 오른쪽을 누르면 감기, 왼쪽을 누르면 풀기! 필요한 비트를 끼운 후 네모가 그려진 부위만 잡고 작동시켜야 한다.



그런데 사실 무섭다. 만지기도 전에 겁이 난다. 드르륵 강하게 돌아가는 모양새가 위험해 보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재봉틀도 한참 열심히 하다가 바늘을 두세 번 부러뜨리고 나면 겁을 먹고서 한동안 멀리하고 싶어 진다. 그런데 천천히 몇 번 꾸준히 연습하면 그리 어렵지 않다. 익숙해질 때까지 강도를 약하게 해놓고서 연습하면 된다. 내가 할 정도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전동 드라이버를 다루고 비트를 결할 때는 장갑이 딸려서 말려들어가지 않도록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연습만이 살 길이다.




그런데 사실 집에 온갖 장비와 도구를 갖추고 있어도 마음처럼 손이 안 따라준다.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살기도 하지만. 요즘은 유튜브를 보면서 셀프로 많이들 시도해보다가 잘 안되거나 이상하게 망쳐놓은 경우에 부르는 경우도 제법 있다. 오히려 그래서 작업이 더 어렵고 복잡해진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나의 사수는 전화 상담이 오면 먼저 최대한 자세히 하나하나 설명을 해준다. 아무래도 후계자를 키우고 싶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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