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가는 시간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누군가는 그때를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사랑의 때란, 서로의 마음이 닿을 때가 바로 그 순간이라는 걸.
아내와 나는 이른 나이에 만나, 서로의 청춘을 고스란히 함께 보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절엔 연애다운 연애를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데이트보다는 생계가 먼저였고, 두근거림보다는 책임이 앞섰다. 손을 잡고 걷는 대신, 서로를 밀어주며 버텨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제야 시간이 허락해 주는 여유 속에서 우리는 조금 늦은 연애를 하고 있다. 그건 불타는 열정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끓여 만든 깊은 국물 같은 사랑이다. 자극은 덜하지만, 대신 진하다. 한 모금 삼킬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맛이다.
요즘 우리는 “시간이 남으면”이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긴다. 퇴근 후 잠깐의 산책, 주말의 숲 속 동행, 가벼운 커피 한 잔에도 대화가 길어진다. 서로가 이미 너무 잘 아는 사람인데도 여전히 할 이야기가 많다. 아니, 이제야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생겨나는 것 같다.
“우리 예전엔 이런 여유 없었지?”
내가 물으면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그땐 여유보단 용기가 필요했잖아. 이젠 여유가 있으니까 용기보다 웃음이 더 많아졌지.”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에도 계절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 ‘늦가을’쯤에 서 있는 게 아닐까. 햇살은 한결 부드럽고, 바람은 서늘하지만, 그 안에는 오히려 더 깊은 온기가 있다. 그건 오래 함께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익은 사랑의 온도다.
숲길을 걷다 보면, 바람 사이로 들려오는 낙엽 소리가 우리 대화의 배경음악이 된다. 서로 나란히 걷다가, 가끔 멈춰서 바라본다. 서로를 찍어주며 웃고, 포즈를 취하다가 장난을 치며 깔깔 웃는다. 그 웃음소리엔 세월의 주름보다 더 선명한 행복이 담겨 있다.
“우리, 너무 늦게 철든 것 같지 않아?”
“괜찮아. 늦게 철든 사람은 오래 젊대.”
아내의 대답에 또 웃음이 터진다. 그 한마디로 오늘의 피로가 녹아내린다.
이제 우리는 경쟁하지 않는다. 누가 더 옳은지, 누가 더 많이 하는지 따지지 않는다. 대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래, 당신 말도 맞아.”라고 말할 줄 아는 여유가 생겼다. 그게 아마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것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분명 많은 것을 가져가지만, 그 대신 더 귀한 것들을 남긴다. 서로의 표정을 더 깊이 읽을 줄 아는 눈, 한마디 없이도 마음을 알아차리는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 좋은 마음.
가을이 깊어질수록 숲은 조용해지고, 나뭇잎은 천천히 제 자리를 떠난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한다. 우리의 사랑도 이 계절처럼 단단하게 익어가고 있구나.
이제는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좋다. 아내와 함께라면 평범한 하루가 충분히 빛난다. 그저 오늘처럼 숲길 벤치에 앉아 따뜻한 물병을 나누며 이야기하는 시간, 그게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다.
내가 말했다. “우리, 이렇게 늦게 연애 시작했으니 오래 해야겠다.” 아내는 웃으며 답했다. “그래. 늦게 배운 사랑이 더 깊다고 하잖아.”
그 말에 나는 확신했다. 그래, 지금이야말로 우리 사랑의 가장 좋은 때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시간’이 있을 뿐이라는 걸.
젊음의 사랑은 뜨겁지만, 나이 든 사랑은 따뜻하다.
익어간다는 건 식어가는 게 아니라,
깊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