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아직 충분히 다정해
며칠 전, 여느 때처럼 아내와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늦가을의 저녁 공기는 제법 선선했지만, 하루를 마무리하는 둘의 걸음은 여전히 따뜻했다. 이런 시간이 좋다. 하루의 피로를 내려놓고, 그날의 이야기들을 천천히 나누며 걷는 길. 특별한 일은 없어도, 그 평범함 속에 안도와 고요가 깃든다.
그날도 그런 평범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누군가 급히 뛰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운동복 차림의 젊은 여성, 대략 스무 살쯤 되어 보였다. 그런데 우리 앞에 거의 다다르자마자 갑자기 멈춰 서며 허둥지둥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마치 자신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아…”
아내와 나는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세요?”
“아… 에어팟 오른쪽이 빠졌는데, 어디로 간지 모르겠어요.”
여성의 말에 아내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혹시 뛰어오시던 쪽에 떨어진 건 아닐까요?”
곧 휴대폰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나도, 아내도, 그 낯선 여성도 각자의 방향에서 바닥을 비추며 찾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빛은 약했고, 퇴근길 인파가 끊임없이 오갔다. 작은 하얀색 이어폰 하나를 찾기엔, 너무 많은 발자국과 그림자가 엉켜 있었다.
5분쯤 흘렀을까. 여성은 점점 초조해 보였다. 나도 고개를 숙인 채 몇 걸음씩 옮겨 다니며 시선을 좁혀갔다.
‘혹시 차도로 굴러갔다면…’ 하는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그러던 순간, 멀찍이 서 있던 아내가 갑자기 소리쳤다.
“찾았다!”
그 목소리에 나와 여성, 그리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까지 고개를 들었다. 아내가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집어 들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요, 다행이에요!”
여성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연신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그 표정은 안도와 감동이 뒤섞인, 순수한 해맑음 그 자체였다.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 다시 빠르게 뛰어가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내는 이어폰을 쥔 손을 가만히 바라보며 웃었다.
“이런 건 그냥 못 지나치겠더라구. 나도 전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서…”
그 말에 나도 미소가 났다.
우리 부부도 얼마 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아찔한 마음이 떠올라, 순간 남의 일 같지 않게 다가온 것이리라.
걷던 길은 여전히 그날의 밤공기처럼 차분했다. 그저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던 작은 일, 그러나 그 짧은 순간 덕분에 내 마음엔 오래도록 따뜻함이 남았다. 낯선 사람의 당황한 눈빛에 공감해 주고, 손전등 불빛 하나를 더 보태주는 일. 그건 거창한 선행은 아니지만, 마음의 온도만큼은 세상을 덮을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래도 다행이야, 찾았잖아.”
“응, 나도 괜히 기분이 좋네. 오늘 하루가 조금 더 따뜻해진 것 같아.”
아내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그렇게, 아주 작은 친절 하나가 우리의 하루를 빛나게 한 날이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이란 게 꼭 이런 순간들의 연속이 아닐까 싶다. 크게 웃거나 눈부신 일보다, 누군가의 마음을 잠시 멈추게 하고, 작은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일들. 그게 쌓여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좋았던 시간’으로 남는 것 같다. 그날의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아내의 옆모습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세상은 아직 충분히 다정하다고, 그리고 나의 하루엔 그 다정함을 전해주는 사람이 함께 있다고.
진짜 따뜻함은, 거창한 말보다
작은 행동 하나에 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