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게 마주하는 웃음의 결
언젠가부터 생각한다. 우리는 원래 이렇게 다정한 부부였던가? 젊은 날의 우리를 떠올리면, 지금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고 놀랍기까지 하다. 그때의 우리는 서툴렀고, 여유가 없었고, 서로에게 살갑게 마음을 열기엔 ‘살아내야 하는 하루’가 더 우선이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딸과 아들이 우리 사이의 윤활유 같은 존재였다. 우리가 하지 못한 다정함을 그들이 대신 보여주었고, 부모와 자식이 함께 떠들고 웃는 모습 속에 우리 둘의 어색함은 자연스레 묻혀갔다.
그런데 아이들이 떠났다. 딸은 자신의 삶을 찾아 출가했고, 아들은 군에 입대했다. 집에 남은 것은 오랜 세월을 함께한 두 사람, 그리고 그동안 너무 당연해서 들여다보지 못했던 ‘우리의 소원한 관계’였다.
처음엔 조금 어색한 침묵도 있었다.
“우리 둘만 남으면 뭐가 달라질까?”
그 질문은 어쩌면 두려움에 가까웠다. 하지만 놀랍게도 달라진 건 없었고, 오히려 더 좋아졌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우리의 시간은 마치 뒤늦게 찾아온 두 번째 전성기 같았다. 함께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함께 외출 준비를 하며 서로의 작은 행동과 변화에 웃고, 퇴근 후 산책길을 걸으며 하루를 해부하듯 이야기한다. 어제와 비슷한 하루였지만, 늘 새로운 에피소드가 생기고 어느 날은 눈물 날 만큼 마음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취향조차 닮아 있었다. 딱딱한 시사 뉴스에 같은 타이밍에 혀를 차기도 안따까워 하기도 하고, 새로 올라온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며 비슷한 장면에서 웃음 짓기도, 눈물 흘리기도 한다. 그 웃음의 결이 닮아 있다. 서로를 오래 지켜봐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편안한 닮음’이었다.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 있다. 함께 걷다가 배경이 예뻐 보이는 자리에서 아내를 세우고 사진을 찍어주는 일. 아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기다렸다는 듯 다양한 포즈를 취한다. 그 모습이 참 사랑스럽다. 어릴 적 아이들에게서나 보던 순수함이 세월이 흐른 지금, 가장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아내에게서 피어난다.
사진을 찍으며 문득 생각이 스친다. 우리가 닮아가는 건 단순히 취향과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오랜 시간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고, 실수와 서운함을 지나오고, 웃음과 눈물로 관계를 지켜낸 두 사람만이 닮아갈 수 있는 켜켜이 쌓인 마음의 결이라는 것을.
젊은 날에는 서로를 사랑하는 법보다 삶을 버티는 법을 먼저 더 많이 배워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조금은 비로소, 사랑을 ‘즐길 줄 아는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가을 숲길에 선 아내를 보면 그저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우리 둘이 함께 지나온 시간들이 겹겹이 스쳐 간다. 아내의 작은 포즈 하나에도 그동안 서로를 향해 쌓아 온 정성과 인내와 배려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세월은 어쩔 수 없이 흐르지만 이렇게 닮아가며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건 고맙고도 어린 마음이 스며드는 일이다. 마주한 계절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여전히 배우고 있고, 여전히 익숙해지고 있으며, 여전히 조금씩 더 좋아지고 있다.
오늘도 함께 걷는다. 떨어진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속에서, 아내의 발걸음이 내 옆에서 작게 리듬을 만든다. 우리는 그 리듬에 맞춰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렇게, 닮아가는 우리의 삶은 가을빛처럼 은은하게 깊어지고 물들어 가고 있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더 서로를 닮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