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책갈피에 끼우고서야
가을이 깊어 간다는 것은 단순히 나뭇잎의 색이 변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무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던 잎들이 어느 순간 제 자리를 떠나, 땅 위로 내려와 ‘머물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머뭇거림 속에 계절은 자기만의 속도로 무르익는다.
며칠 전 아내와 걸었던 숲길에서도 그 변화는 어김없이 진행 중이었다. 붉고, 노랗고, 아직은 초록을 조금 남긴 단풍잎들이 가지마다 매달려 있었다. 어떤 것들은 바람이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듯 얇아졌고, 어떤 잎은 아직 자신이 떠날 때가 아닌 듯 묵묵히 가지를 붙잡고 있었다.
나는 그저 그런 가을의 흐름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지만, 아내는 매 순간 찾아오는 계절의 색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다. 수십 번 지나온 길인데도, 그날의 색이 조금 다르면 꼭 발걸음을 멈춘다. 한 손엔 카메라 대신 내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론 계절을 가만히 주워 담는다.
그날도 그랬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낙엽들 사이에서 아내는 유독 눈길이 가는 잎들을 고르고 있었다. 크기와 색깔이 제각각인 노란 단풍잎을 몇 개 들어 보이며 아이처럼 웃었다.
“이건 책 사이에 껴두면 예쁘게 말릴 것 같아.”
아내가 말할 때의 그 목소리는 늘 조심스럽고 단정하다. 마치 계절에게 실례되지 않도록 ‘잠시 빌린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생각한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닮아간다고. 아내가 모아 온 단풍들은 모두 따뜻하고 고요하고, 너무 강렬하지 않으면서도 오래 남는다. 그건 마치 살아온 세월 속에 남아든 아내의 마음결과도 닮아 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는 그 잎들을 책갈피 사이에 고이 눕혔다. 며칠 후, 아내가 조심스레 책을 펼쳤을 때, 그 단풍잎들은 처음 주웠을 때의 모습 그대로 눌려 있었다. 빛이 조금 바래긴 했지만 형태는 잃지 않고, 자기 색을 잃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모습도 이렇지 않을까.’
젊었을 때는 서로에게 들이대는 감정의 온도가 뜨거워 쉽게 흔들리고, 사소한 일에도 휘청이고,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금세 떨어질 듯 불안했다.
그러나 오래 함께 살아온 지금은,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는 동안 모양을 잃지 않는 단풍잎처럼 서로에게 고이 눌려 남아 있는 것이다.
가을이 만들어낸 색은 사실 엽록소가 사라지고 난 뒤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영양 공급이 끊긴 뒤에야 드러나는 ‘본래의 색’, 숨겨져 있던 진짜 빛. 그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어쩐지 올해 가을만큼은 그 문장이 유난히 마음에 오래 남는다.
아내와 나도 그런 과정 속을 지나온 것이 아닐까. 주고받는 말이 줄어든 시절도 있었고, 서로에게 미처 여유를 내지 못하던 시간들도 있었다. 바빠서, 힘들어서, 혹은 그냥 삶이 우리를 휘둘러서 잎사귀처럼 휘청이던 날들도 많았다.
하지만 세월은 잎을 물들이듯 사람도 물들인다. 찰나의 설렘은 사라지지만 그 자리에 잔잔한 믿음이 쌓이고, 뜨거운 감정이 식어 갈수록 더 깊고 은은한 정이 남는다. 가을의 잎이 영양을 잃고도 더 선명한 색을 내듯, 삶의 어느 시점을 지나온 우리도 그런 빛을 찾은 것이리라.
함께 걷고, 함께 식사하고, 같은 길에서 다른 풍경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아내를 세우고, 아내는 말하지 않아도 다양한 표정을 지어주는 이 모든 일들이 우리가 오래 눌려온 책갈피 같은 시간들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우리를 만든다. 책 속에서 마르지 않고 고운 모양을 지킨 단풍잎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계절이 변해도 형태를 잃지 않고 남아 있는 그 잎처럼, 우리도 서로의 곁에서 그렇게 고요히, 그러나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구나.
아내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가을은 참 예뻐. 근데 우리가 보는 가을은… 해마다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아.”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어쩌면 해마다 달라지는 것은 계절이 아니라, 그 계절을 함께 겪는 우리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올해 가을의 색도, 손에 올려놓은 노란 잎도, 책 사이에 눌러 보관한 단풍도 결국은 서로를 향한 우리 시간의 또 다른 기록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이 가을이 끝나도, 다음 계절이 찾아와도, 오랫동안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시간이 우리를 물들이면,
사랑은 비로소 본래의 색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