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밝고바른 Nov 05. 2023

거짓말하는 기분

내 머릿속과 마주하기

1. 세상과의 연결고리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멋쟁이십니다. 두 분 다 각자의 집안에서 조금 별나셨지만 매력은 가득했어요. 한 명은 무척 시끄러웠고 다른 한 명은 매우 조용했지만 서로 사랑했습니다. 단란했던 우리 가족에게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어서 많은 기회를 빼앗아갔습니다. 남겨진 사람은 영원히 치유되지 못할 공허함과 쓰린 마음을 얻었지만 떠난 사람은 밝은 빛과 함께 행복을 얻었을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로 내게는 '딸에게 들려주는 엄마의 교훈' 같은 같은 것은 받을 새도 없었습니다. 한 동안은 하늘로 몸이 붕 떠오른 채 지냈어요. 느낌도 없고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저 아래에 있었지요. 들려오는 '웅웅' 거리는 소리만이 저 세계와 거리를 가늠케 할 뿐이었어요.


저편에 위치한 그들의 시간은 나와 달랐습니다. 이 쪽과 저 쪽은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듯했어요. 잘할 수 있는 일들에 매달려 남들보다 비록 늦더라도 바로 한 발짝 뒤까지 따라가려 했습니다. 매 순간을 줄여보려 했지만 가까워지기는커녕 더 멀어지고 밀려났습니다. 마치 세상과 연결되었던 고리가 끊어져 파도에 밀려가버린 것처럼요.



2. 우연의 시작


상황의 한복판에서 난 19살이 아니라 마치 9살인 것 같았습니다. 미처 어른이 되지 못한 때에 그런 일이 있었기에 의사로부터 직접 말을 듣거나 질문할 기회는 없었어요. 게다가 어른들은 워낙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로 충격에 휩싸여 나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어요. 만약 그들 대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상황도 나의 이 상황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까요. 결국 전해 들은 건 '뇌혈관 기형', '여자형제들은 모두 검사를 받아볼 것', '온도차로 혈관이 수축을 해서'와 같은 조각의 말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대학병원을 예약해서 뇌혈관 MRI를 찍어달라 청했습니다. 머리를 어딘가에 세게 부딪힌 이후에 충동적으로 든 생각이었지만 위 단어들을 열심히 조합하면서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요청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뇌혈관 기형은 유전되지 않는다', '증상이 없으면 검사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차가운 표정만이 기억납니다. 그날은 결국 Traumatic injury, 뇌 CT를 찍었고 아무런 이상이 없었죠. 아마 그는 내가 10여 년 뒤 뇌혈관 MRI에서 이런 소견을 받게 될 줄은 아마 몰랐을 겁니다.

 중대뇌동맥에 심한 동맥 협착이 관찰되고 그 말초부 동맥 가지들의 혈류도 상당히 감소되어 있어 모야모야병을 우선 감별해야 함.
의사 상담 요망.


3. 거짓말하는 기분


그런 기분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요. 현재 내가 겪고 있는 상황임에도 진실하지 않은 것 같은 그런 기분입니다. 내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양심에 찔리고 저 검사결과는 꼭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습니다.


십 년 만의 대학병원 진료에 앞서 이번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차근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제 어디가 어땠는지 내가 겪은 증상들을 잘 말씀드리면 '어째서?'라는 빈칸을 채워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관련이 있을지 모르는 나의 증상들을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 일지 몰라도 어쩌면 하나의 수수께끼를 풀 우연의 조각들 중 하나일지도 모르니까요.

   증상은 검진결과를 받기 1년 전인 2020년의 여름에 시작되었다. 가끔씩 왼손 약지 끝 마디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동상에 걸린 듯 경계가 느껴졌고 두 아이의 출산과 육아로 어깨나 손목이 좋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증상은 손가락 전체로 손날을 타고 팔과 겨드랑이 쪽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정형외과를 방문했지만 큰 이상은 없었고, 반복이 될 때마다 조금씩 심해졌다. 저린 증상과 함께 갑자기 말문이 막혀 침만 삼키게 되거나,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머리가 울려 잘 들리지 않았다. 점점 심해져 어지러워 토할 것 같았고, 말을 할 때 발음이 잘 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방에서 누워서 심호흡을 하면서 쉬면 금방 회복이 되었다. 이런 증상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였다. 가장 마지막의 경험은 어지러워 토할 것 같아 쉬러 이동하는 동안 왼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넘어질 뻔했고 한참을 쉬어야 했다. 근처의 신경외과에서는 남편과 둘째 아이를 동반한 나에게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은지 물었고 그때까지도 횡설수설 정신없어하는 나의 상황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의 증상은 거짓말 같이 끝이 났다.

나의 증상과 내 머릿속이 일정 부분 일치하지 않으니 두 병원을 다녀오며 몇 번의 추가검사가 있었습니다. 결론은 전형적으로 진행되는 모야모야병은 아니니 검진을 통해 추세를 보면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엄마의 병력은 별개일 것이라 말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상황이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떨떠름했습니다. 결국 나의 증상이 명확히 무엇인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라는 빈칸은 여전히 비워져 있었지요. 그때의 증상들은 나의 건강상태를 말해준 것일지도 모르지만, 단지 저도 모르게 나에게 잠재된 불안이 만든 거짓반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사실, 어느 쪽이던 이유도 모르게 벌어진 내 머릿속 상황은 그저 또 다른 우연일 뿐입니다.


우연과 단서들은 한동안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습니다. 나도 어쩌면 내 딸이 늦잠을 자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질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입버릇처럼 우리 자매가 어른이 되면 떠나겠다던 엄마의 말은 정말로 그렇게 되었고 난 아이들과 나에게 시간을 아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죠. 저 빈칸은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채워야 한다는 것을요. 


오랜 친구와도 같았던 거짓말하는 기분과는 영영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우연들이 쌓이면 그것은 더 이상 우연이라 부르긴 어렵겠지요. 이제부터는 내게 남겨진 수많은 빈칸들을 스스로 채우려 합니다. 나의 몸이 하는 말을 경청하되 휘둘리지 않는 딱 그 정도로 말이죠.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
- 랄프 왈도 에머슨(미국, 시인)
이전 01화 나의 서른두 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