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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Oct 26. 2022

자궁과 무덤은 서로를 의식한다

목 사장의 이야기

이제야 내 곁에 네가 있어.     


눈을 감은 네 얼굴은 네가 가장 많이 만들었던 의자의 선을 닮았다. 펜을 떼지 않고 완성한 한붓그리기처럼 모든 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평온함. 네 얼굴을 바라보면 들뜬 호흡도 널뛰는 눈동자도 서서히 가라앉아 차분해지니까, 들키지 않으려 숨죽여 뛰는 내 심장을 제외하고.

네 심장의 느리고 끈질긴 박동 수를 확인하며 네 몸을 지상에 붙들고 있는 각종 선들을 헤아린다. 몸 바깥으로 튀어나온 선들은 네 것이 아니기에 성급하고 날이 서 있다. 이것들이 정말 너를 살리고 있는 걸까? 오히려 너를 해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들 중 가장 굵고 의심스러운 선이 내 것이다.


너와의 연결을 끊지 않기 위해 내가 했던 수많은 일들이 네 몸에 흘러들어 비정상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걸까.     

나는 후회하지 않아.     


목련이 피기 직전 주먹을 쥔 꽃봉오리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 아래서 너를 처음 본 순간을 죽어도 잊을 수 없다. 목련꽃은 피기 전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는 네 말도 쉼표 하나까지 기억한다. 목련은, 꽃은, 피기 전이, 가장, 아름다워. 거대한 꽃봉오리 모양의 의자로 가구공모대전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을 때 나는 네가 했던 그 말을 기억했고 너는 웃었다. 아주 짧게, 꽃이 피는 순간 사라질 미소를.


그 미소를 얻기 위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공학으로 바뀐 목천여고에서 20년 교사 인생에 가장 불가사의한 조합이라며 담임은 나와 너의 관계를 쿡쿡 찌르고 다녔다. 네 장학금이 어디서 나온 돈인지 항상 생각하라며 지 딴에 농담이라 생각한 교사들의 말들로부터 나는 너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너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목천 시장에서 복조리개를 만들어 팔며 홀로 너를 키운 너의 어머니가 가르친 삶의 기술이라고 했다. 


그런 말이, 들리면 내 몸을 살짝, 띄운다고 상상해. 발이, 땅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발바닥 아래로 말들이 기어 가. 그때 발로 슬쩍, 밟으면, 끝.


네가 서울대를, 나는 K대를 합격했을 때 나를 불러 세 시간이 넘게 무릎을 꿇리고 휘두른 아버지의 말로부터 나를 지킨 것도 네가 알려준 그 기술 덕분이었다. 애비 없는 애도 가는 서울대를 못 가는 너는 쓸모 하나 없는 딸 따위의 말이 가벼워진 내 무릎 아래 자근자근 짓눌려 사라졌다. 덕분에 불필요한 말을 꺼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애초에 아버지는 내가 아니라 오빠를 사랑하잖아요, 서울대도 하버드도 순서대로 척척 붙고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던 국회의원 배지를 단 오빠를. 오빠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말도 많고 사랑도 넘쳐나 몸이 열 개도 모자랐다. 나는 바쁜 오빠를 도와야 한다는 핑계로 선 자리를 거절하고 홀로 버틸 수 있었다. 


오빠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일에 본능적인 감각을 가진 오빠의 운명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감각을 그대로 물려받은 조카를 보며 나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사랑의 총량을 따져보았다. 너와 나의 불운이라면 각자 타고난 사랑의 불균형에서 시작되었겠지. 오빠처럼 다수의 인간들에게 사랑을 배분해야 하는 사람이 있고, 나와 같이 거대한 기념비가 될 단 하나의 사랑만을 타고난 인간이 있으니까. 그리고 너는...     


목천여고 졸업식 날, 유학 중인 오빠를 만나러 미국으로 간 아버지가 보내 준 졸업 축하 용돈을 가지고 나는 너와 네 어머니를 모시고 목천에서 제일 비싼 중국집에 갔다. 테이블 가득 요리를 시키려는 나를 만류하고 짜장면 세 그릇과 탕수육을 시킨 너는 내게 직접 만든 열쇠고리를 주었다. 복조리를 만드는 죽사로 엮은 작은 공이었다.


탁구공인가? 내가 웃으며 묻자 너는 빙그레 웃었다. 


귤이야, 영원히 썩지 않는.


나는 왜 네가 귤을 선물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날은 그랬다. 네 어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린 뒤 둘이 팔짱을 끼고 목천천을 산책하다 내가 키스했을 때 너 역시 묻지 않았다.


이건 내 선물.


차마 네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인 채로 나는 변명처럼 말했다. 선물이라면 다 해결될 것처럼, 누군가의 꽃다발에서 빠져나왔는지 모를 안개꽃이 흩어진 바닥을 정답지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한참을 바닥만 바라보았다. 흰 점 같은 안개꽃 가운데 네 검은 학생용 구두를 네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응시했다.


제주도, 가보고 싶어.


예상하지 못한 네 말에 놀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너는 바싹 마른 목천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도 목천천엔 물이 흐른 적이 거의 없었다.


귤꽃이 핀대.


귤꽃이 피면 귤 향이 나는 게 신기하다고 계모임에서 제주도 여행을 다녀 온 네 엄마가 말해 주었다고 너는 이야기했다.


같이, 가자.

제주도에?

귤꽃에서 정말 귤 향이 나는지, 보러 가자. 


나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네 손을 잡았다. 내 선물에 대한 답으로 충분했다. 네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너는 나를 필요로 한다, 너는 내 손을 놓지 않는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네가 나를 필요로 하니 나는 힘껏 그 기대에 부응해야지, 오빠를 핑계로 매니지먼트 전문 회사를 만들어 대학 졸업 후 목수가 된 네 작업 활동을 지원했다. 귤꽃으로 로고를 만들어 브랜드가 된 네 작품을 팔았다. 전시회를 열었다. 네 남편이 될 사람을 소개했다. 혼인의 증인이 되었다. 네 입양아의 후원자가 되었다. 나는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 일만 제외하고.     


그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너는 낯설었다. 나는 너를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다. 너의 어머니보다도. 너는 다들 급식실로 목숨 걸고 달려 나갈 때 느긋하게 마지막으로 걸어오는 사람이다. 천만 관객을 찍는 영화관에 빈자리가 없을 때 그 옆의 도서관에서 스스로의 취향을 누리는 사람이다. 서울대 졸업 후 유망하고 유리한 자리들을 거절하고 나무를 매만지는 삶을 선택한 사람이다. 너는 꽃이 피기 직전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너는. 


그 아이 문제를 마주한 너는 이제까지 내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네 간절한 부탁에 두어 번 궁전빌라를 다녀온 뒤 너는 선언했다. 그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저렇게는 절대 둘 수 없어.

소영아.

내 힘으로 아이 하나쯤은 충분히 키우고도 남아. 


쉼표와 여백이 느껴지는 평소의 네 말투와 전혀 다른 말에 나는 당황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미 정해졌고 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무참했다.


정말 미안해, 소영아. 그것만은 할 수 없는 일이야.


처음엔 미혼은 입양이 불가하다는 법적 근거를 이유로 끌고 왔고, 나중엔 ‘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해야 했다. 너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설명하는 이유들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한 아이의 삶을 짓밟을 정도로? 그럼 낳질 말았어야지, 여기에 그 여자를 데리고 오면 안 되는 거지. 


네 말 다 맞다, 그건 안 되는 일이다. 이미 내가 오빠에게 먼저 했던 말이다. 오빠는 그 아이보다 그 여자의 잘린 손가락을 중요시했고, 자신이 받은 모욕감에 훨씬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납득하지 못하는 내게 오빠는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너를 보호해야만 했다. 궁전빌라를 잘못 건드렸다가 자칫하면 내가 가진 모든 것, 그러니까 너를 잃을 수도 있었다. 당선이 확실시되던 상대 후보를 불륜 이슈로 묻어버린 오빠는 도덕적이고 가정적인 이미지에 매달렸다. 그걸 한방에 무너뜨릴 폭탄 같은 존재를 세상 바깥으로 꺼내올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상심과 어머니의 투병생활이 겹쳐 네 작품 활동은 일 년 넘게 중지되었다. 네 공백을 채우고 수습하는 일은 기꺼이 내가 맡았다. 네 일이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몇 번이고 되뇌어도 지나치지 않는 이 말.

그리고 너는 내게 말했다.      


너는 내게 결혼할 상대를 구해 달라고 했다.      


일 년 넘게 얼굴 한 번 직접 본 적 없이 떨어져 본 적은 처음이었다. 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은 너를 본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상주인 너보다도 더 오래 울었다. 흐느끼는 나를 토닥이며 너는 기습적으로 내게 결혼을 말했고 나는 눈물이 쏙 들어갔다. 


돌보아 주고 싶은 아이가 있다고, 법적 절차를 위해 혼인신고만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이상하고 괴상하고 아주 까다로운 부탁이지만 이런 부탁을 들어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너는 느리고 확실하게 말했다.


이제, 나는 엄마도, 없어. 아빠는, 처음부터 없었고. 나는, 너밖에, 없어.


내 손을 잡고 이런 말을 하는 너를 내가 어떻게 거절할까.     

그리고 나는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과연 선배는 내 이야기를 듣고 박장대소했다. 사람 얼굴만 한 크기의 특대 파르페를 반 이상 먹어치울 때까지 기다리다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였다. 선배는 내 이야기가 특특대 파르페인 양 받아들였다.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는 선배의 모습에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떤 표정으로 지금 이 상황을 대면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까지 잇몸 다 마를 정도로 웃을 일이야?

나 지금 머릿속으로 등본 들고 가서 영감들 보여 줄 상상에 기절할 것만 같아. 여기 제 배우자가 있습니다, 있는데 없습니다!


선배의 언행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동시에 웃게 만드는 괴괴한 매력이 있었다. ‘사람은 가벼움이 필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학내 모든 술자리를 빠지지 않는 선배의 별명은 당시 유행했던 소설의 작가인 쿤데라로 통했다. 그 소설을 아꼈던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쿤데라 선배와 거리를 두었다. 우연히 같은 교양 수업에서 마주쳤다가 그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 것을 본 뒤 이어진 대화부터 우리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알고 보니 쿤데라 선배는 쿤데라와 톨스토이 말고도 수많은 소설가의 작품들을 섭렵한 애서가였다. 자신은 소설을 사랑하고 특히 러시아 소설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이름이 길잖아. 안나 아르카디예브나 카레니나 같은 이름 봐봐, 나도 나중에 최소 열 글자는 되는 이름으로 개명할거야.

그럴 거면 그냥 이름 긴 회사를 하나 만들어 버려요. 다 기억하지도 못할 정도로.


선배는 내 말에 열렬히 호응했고 정말로 19개의 음절로 이루어진 회사명을 지었다. 가까이서 본 선배는 그토록 가벼우면서 진지했고, 진지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다. 선배가 잃어버리려 애쓰는 것들은 훨씬 무거운 관계들이었다. 가볍게 끊어낼 수 없는 선배의 가족들. 직접적으로 때리지만 않았다 뿐이지 책 한 권으로 다 담지 못할 가족 내 괴롭힘은 지금 이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 붙었을 때는 합격증을 백 장 복사해서 집에 뿌렸지, 4수한 형도 못 간 대학 내가 갔다고, 그때 내가 기대한 반응보단 덜했지만, 이번엔 확실히 해야지!

그러다 진짜 결혼이 하고 싶으면? 상대가 선배 결혼 전적을 문제 삼게 되면?

들뜬 선배를 향해 나는 찬물을 뿌렸고 선배는 다른 의미로 차분해졌다.

나는 결혼 같은 거 안 해.

물론 지금 이걸 제외하고, 선배는 다시 특유의 팔랑거리는 손짓으로 찰나의 진지함을 날려 보냈다. 너도 아는 그 손동작, 가벼워지기 위해 애쓴 자의 노력이 응집된 오른손의 움직임이 나와 선배와 너를 동시에 연결시켰다. 그건 평범한 삶을 향한 마지막 인사 같기도 했다.     


왜 내 주변엔 평범한 가정에서 평탄하게 자라 평온한 삶을 영위한 이가 없을까. 나부터가 주머니를 뚫고 나온 송곳과 같은 사람이라서? 네 곁을 떠나야 한다면 차라리 내 목을 송곳으로 뚫어버릴 사람이라서? 정신병원에 끌려갈 뻔한 나를 오빠는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 동생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이해해 달라 요구했다. 오빠니까. 나는 내가 아닌 스스로 손가락을 자른 그 여자를 병원에 밀어 넣었다. 그 아이를 궁전빌라에 방치했다. 그 대가로 너를 지킬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나를 배신했지.     


남자와 법적 결혼까지 감수하며 얼마나 대단한 아이를 데려올까 생각했다. 복잡한 법적 절차는 내가 맡았지만 아이를 직접 데려온 건 너였다. 내 차를 빌려 왕복 다섯 시간을 운전해 데리고 온 아이는 이틀 뒤에 네 공방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공방에 들어서자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절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네가 해원이구나?


그 애는, 해원은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얘는 나와 같은 과다.


너는 나와 같은 눈을 가진 아이를 선택했구나. 세상이 불타오르고 모든 인간이 손가락질해도 아랑곳 않고 제 십자가를 세우는 인간.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품은 소명을 완수하는 인간. 나는 반대할 마음을 접고 해원을 지켜보기로 했다. 네가 해원을 궁전빌라에 데리고 가는 것도 모른 척 했다. 두 아이들의 목천천 산책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자유는 괜찮겠지.     


해원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었지.      


그건 또 너와 같은 종류의 성격인데, 누군가 너를 규정지으려 들면 그 경계를 아예 뛰어넘어버리는 성질머리를 닮았지.


해원이 사무실로 찾아왔던 날 나는 당황했다. 목천시로 승격된 이후 가장 더운 여름이라고 했다. 해원은 땀에 젖은 머리칼을 목덜미에서 떼어내며 비서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든 갈색의 서류봉투도 땀으로 얼룩이 져 있었다.

이렇게 크고 번듯하게 에어컨 빵빵한 곳일 줄은 몰랐어요. 

내가 능력이 좀 괜찮잖니.

오렌지 주스를 연거푸 두 잔 마신 해원은 손에 들고 온 봉투를 내게 건넸다.

글은 오래 전부터 써 왔는데 올해 초부터 원고를 정리했어요. 회인이가 몸이 점점 안 좋아져서...

걔가 쓴 거야?


우리가 썼어요. 그리고 걔가 아니라 회인이에요.


나는 원고를 꺼내 훑었다. 그때 내 손에 가장 먼저 잡힌 글이 「자궁과 무덤」이었다.     



<자궁과 무덤>     


 무덤tomb : 자궁womb     


 그녀는 이 단어에서 머문다. 왼쪽 창의 햇빛이 오른쪽 창으로 옮겨 앉을 때까지. 화장실에서 몇 방울의 오줌을 흘려보내고 배 속 네가 툭툭 거리며 신호를 보낼 때까지. 그녀는 이 단어 두 개를 노란색 포스트잇에 써서 벽에 붙인다.      


 거대한 다리가 허리를 무참히 짓밟는 것 같은 통증. 그녀는 너와 허리를 달래기 위해 침대로 향한다. 똑바로 누워도 봉긋하게 솟아오른 배. 그녀는 비로소 이해한다. 팽팽해진 자궁의 모양이 꼭 무덤 봉분과 닮았다는 사실을. 그녀는 네가 양수를 마시고 배출하며 숨 쉬는 자궁을 향해 절을 하고 술을 뿌리고 잡초를 뽑아주고 싶다.      


 그녀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름을 회상한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아했다는 곶감과 소주병이 든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앞서 걸어갔다. 그녀는 아버지를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기에 아버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녀의 어머니가 무덤에 소주를 뿌리고 곶감을 던지고 무덤 위를 뒹굴며 울부짖는 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만 보았다. 한여름 정오의 태양 아래 푸른 무덤 위로 원색의 꽃무늬가 뒤엉켰다. 그녀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천박하다는 단어를 배웠다.     


 침대 위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워 몸을 동그랗게 만다. 뱃속에서 네가 취하고 있을 이 자세는 그녀 역시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똑같이 몸을 말고 이따금씩 큰 소리가 들리면 손이나 발로 내벽을 두드렸을 것이다. 태아의 자세가 인간에게 가장 편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배가 돌처럼 단단해지거나, 허리가 대바늘로 찔린 것처럼 아프거나, 눈앞이 새하얘지며 머릿속이 버려진 무덤처럼 엉망이 될 때마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옆으로 누우면 괜찮아졌다.     


 자궁 속 인간의 자세가 동그랗다면, 무덤 속 시체는 일직선으로 사지를 쭉 편 모양일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관 속에 똑바로 누워 있는 모습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다른 자식들은 무덤 위치를 알려달라는 그녀의 말을 비웃었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가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말 한마디 없이 손만 휘둘렀다. 그게 끝이었다.     


 그녀는 혼자 납골당에 어머니를 모신 뒤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누운 채로 침대 옆 책상과 책상 위 책과 책상 앞 벽에 붙은 포스트잇들을 바라본다. 방 안이 빛으로 가득하다. 거실 겸 부엌에 방 하나, 자그마한 베란다 하나가 전부인 집이지만 사방이 창이라 빛이 잘 든다는 점을 높이 샀다. 그는 배가 점점 불러오는 그녀는 이곳에 데려다주고 손수 짐을 옮겨 주고 새벽 배송으로 식재료를 배달시켰으며 무료할 그녀를 위해 책을 선물했다. 몽테뉴의 [수상록]이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같이 최소 500페이지가 넘는 벽돌과 같은 책들이었다. 그녀는 한 달에 한 권씩 그가 가져다준 책을 읽었다. ‘내가 처음부터 다시 살게 된다면, 나는 전에 살아본 대로 살아보겠다.’(몽테뉴-수상록)나 ‘우주는 자연과 생명의 어머니인 동시에 은하와 별과 문명을 멸망시키는 파괴자이다.’(칼 세이건-코스모스) 같은 문장들을 포스트잇에 베껴 벽에 붙였다.      


 지금 여덟 번째로 읽는 책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다. 그녀는 문장 하나에 주석 하나씩 일일이 짚어 읽으며 그가 없는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리고 두 단어가 나란히 놓인 구절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무덤tomb : 자궁womb     


 무덤과 자궁, 그녀는 방금 붙인 포스트잇을 응시한다. 영어로 알파벳 하나 차이라는 사실이 신기하다. 한국어로도 글자 구조가 묘하게 비슷하다. 가장 거리가 먼 것 같은 죽음과 탄생이 언어적으로 가깝다. 그녀는 그와 함께 이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네 움직임이 격해진다. 갑자기 빨라진 심장 박동 소리에 놀랐는지 모른다.      


 그녀는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번갈아가며 자세를 바꾼다. 이 몸의 주인은 그녀가 아닌 너와 너를 보호하는 자궁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낯선 언어로 쓰인 소설처럼 난해하다. 그녀가 불가해한 제 몸을 어쩌지 못해 뒤척이면 그는 섬세한 독서가처럼 커다란 두 손으로 그녀를 쓰다듬었다. 허리를 마사지하고 퉁퉁 부은 두 다리를 주물러 주었으며 네가 있는 배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 손길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었다.     


 네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인다. 그녀에게 세상의 전부가 이 집인 것처럼 네겐 자궁이 세상의 전부일 테니. 그녀는 임신을 확인한 뒤로 부쩍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갓 태어난 너에게 이 세상이란 그녀가 전부일 것이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갈 때를 제외하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발끝에 집중했다. 가끔씩 그가 그녀 옆에서 자고 갈 때 뒤척이지도 않고 한참을 가만히 누워 있으면 코 밑에 손가락을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생명을 품으면 죽음에 예민해져.     


 그녀가 이런 말을 하자 그는 웃었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아.     


 그는 연극배우처럼 진지하고 장중한 어조로 말했다. 나와 너와 이 아이를 만나게 해 준 사랑에만 집중하면 된다고, 사랑은 죽음도 뛰어넘는다고. 그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주 입에 담았다.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의 꽃무늬 원피스를 떠올렸다. 손바닥만 한 꽃송이들이 제 깊은 곳까지 활짝 벌린 그 옷을 그녀는 제 손으로 태워버렸다. 그녀는 아무 무늬 없는 검은색 옷만 입었다.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 역시 검은색이다. 검은색은 어떤 천박한 무늬도 끼어들 틈이 없다. 검은색은 햇빛조차 흡수한다.     


 문득 그녀는 오늘따라 햇빛이 유독 강하다는 생각에 베란다에 둔 아이스박스가 걱정된다.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나가 아이스박스를 열자 강한 냉기가 그녀의 맨발에 스며든다. 그녀는 말랑해진 얼음 팩을 꺼내고 냉동실에서 새 얼음 팩을 꺼내 냉기를 보강한다.     


 박스 속 우주는 온전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키고 잠들어 있다.      


 이 아이스박스는 그녀가 그와 처음으로 떠났던 여행을 준비하며 샀던 것이다. 2박 3일 간 외딴 펜션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아이스박스에 가득 담아 온 음식과 술을 깨끗이 비웠다. 여행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펜션 앞마당에 피어 있던 나팔꽃처럼 사랑의 말이 도처에 피어났다.      


 그 이후 그와 그녀에게 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녀는 아이의 존재를 알렸다.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다. 


 그는 그녀에게 어떤 말을 했는가.     


 이게 나의 최선이야. 나는 그 이상은 받아들일 수 없어.      


 그녀는 그의 최선을 발견했고 최선의 끝에 설치된 담장을 보았다. 국경선이나 감옥 담벼락에 쓸 법한 가시가 촘촘히 달린 철조망 담장. 그 너머로는 왜 그녀가 갈 수 없는지 물었다. 그는 변명했다. 그는 호소했다. 두 팔을 그녀에게 내밀고 설득을 시도하는 그의 목소리와 그의 얼굴과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전부 그녀를 찔렀다. 철조망의 가시처럼.     


 도굴당한 무덤처럼 모든 것이 파헤쳐진 그날 그녀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보라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마을에서 열린 축제 한복판에 서 있었다. 머리에 빨간 모자를 쓴 근육질의 남자들이 웃통을 벗고 두 줄로 서서 거대한 통나무를 운반했다. 통나무 앞쪽은 연필처럼 뾰족하게 깎여 있었다. 꿈속의 그녀는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두 가슴을 감싼 채 주저앉았다. 내게 뾰족한 건 이 가슴뿐인데 이걸로는 아무것도 찌를 수가 없어, 저들은 거대한 무기를 가졌는데.      


 그녀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그녀는 아이스박스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한쪽 손으로 아이스박스의 뚜껑을, 다른 손으로 볼록한 배를 쓰다듬는다. 어머니이자 파괴자로서. 네 심장소리를 확인했던 날 그가 배를 쓰다듬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목소리를 기억하며.      


 이제 그녀는 안다. 사랑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선물했다는 꽃무늬 원피스처럼 덧없는 약속이라는 의미를. 그렇게 똑똑했던 그가 잘못된 단어로 그녀와 너를 부르다니. 

 그녀는 울지 않는다. 그녀는 너를 기다리며 책을 읽을 뿐이다.     


 그녀는 그가 주는 책을 읽으며 조금씩 배운다. 오늘 그녀는 무덤과 자궁을 배웠다. 그 둘은 서로 포개질 수 있는 단어라는 것을. 사랑은 덧없으나 무덤과 자궁은 확실하다. 이 둘은 서로를 의식하며 상대방을 보증한다. 그것들은 믿을 수 있다.


 믿기로 한다.     


 그녀는 너와 함께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와 같은 자세로.      


 우리 셋은 동시에 태어나는 거다.     




내가 원고를 내리고 고개를 들자 해원과 눈이 마주쳤다. 해원은 절대 먼저 눈을 피하는 법이 없다. 그 시선 때문에 학교에서 버릇없다며 뺨을 맞은 적 있다고 네가 전해 주었다. 가끔 무섭기도, 하고, 묘하게 안심이, 되는 것도, 있어. 

 지금 느끼는 감정과 같다.


 이걸 왜 가지고 왔니?

 책을 내고 싶어요.


나는 네게 했던 것과 같이 왜 이 원고를 책으로 낼 수 없는지 설명하고 설득했다.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정문을 마주한 해원의 표정은 너와 똑 닮았다. 어디서 이런 애를 데리고 왔나, 나 모르게 낳은 애 아냐? 흔들리는 내 눈동자 위로 방금 읽은 문장들이 떠다녔다. 사랑은 덧없으나 무덤과 자궁은 확실하다. 이미 내 몸에 도깨비씨앗처럼 이들의 글이 깊숙이 박혀 버렸다. 


해원은 내 손에서 원고를 낚아챘다.


 반대할 건 예상했어요.

 안 될 걸 알면서 왔어?

 한 번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이게 전부니?

 훨씬 많아요. 이건 네 편정도 골라놓은 거구요.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원고 관리 잘 하라는 거, 아직은 때가 아냐.

 그 때라는 게 언제 오는데요?


해원은 내 눈을 보았다. 그 아이가 해원의 눈동자 뒤에 앉아 나를, 내 뒤에 숨어 있는 자에게 묻고 있었다.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왜 나는 나의 탄생을 불행으로 알아야 합니까?

나는 이 네모난 자궁이자 무덤인 이곳에서 나오고 싶습니다. 

그 때를 알려 주세요. 구체적으로.


병원부터 데려가야 해요. 손가락 쓰는 것도 버거워 해서 내가 타자를 쳐요.

일단 너는 졸업부터 하자.

회인이랑 한 약속 아니었으면 진작 때려 쳤어요.

네 엄마와도 약속한 거지. 나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최대한 돕는 거고.

그럼 나와도 약속해요. 회인이 궁전빌라를 떠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원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이미 5분 전에 나는 사무실을 떠나 중요한 미팅에 참석하러 가야 했지만 해원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 약속은 지켜질 수 없지만 내 입으로 약속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껄끄러웠다. 

해원은 내가 어떤 답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살짝 웃었다. 


솔직히 회장님도 안 믿잖아요.

어떤 걸?

‘그러면 안 되는’이유들, 회인이 왜 세상으로 나올 수 없는지 덧붙이는 구질구질한 말들, 그건 그냥 변명이에요. 어떻게 들리는지 알아요? 애기들이 이불에 오줌 싸 놓고 오줌 싼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오줌이 잘못했다고 역정 내는 것 같다고요.

보통 그런 걸 자기합리화라고 하지.

이건 한 사람의 ‘삶’이잖아요, 한 삶을 가지고 그딴 식으로 내 눈에 안 띄면 존재하지 않는 거야, 합리화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나도 알아. 다들 알아. 근데 대부분 그렇게 해. 왜 그런 줄 아니? 원래 사람이란 게 그렇게 태어났어. 오줌을 싸면 제어가 풀린 방광 탓이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손가락질만 피할 수 있다면 제 몸의 방광도 떼어버릴 수 있는 게 인간이라 그래. 오빠는...목 의원은 절대 그 아이를 인정하지 않을 걸. 욕먹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고 그 애의 존재 자체가 자신을 향한 거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해원의 눈을 바라보며 쏟아낸 나의 논리가 곧 나 자신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도 오빠와 같이 나의 정체를, 나의 사랑을, 나의 ‘나’를 절대 인정하지 않고 살아왔으니까. 그걸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게 다 끝이라고, 지금 가지고 있는 걸 모두 잃고 말 거라고, 너를 인정하지 않아야 너라는 현재를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살아 왔다. 지금까지.      


나는 해원에게, 해원의 안에 있는 그 아이에게, 너에게, 경고한 거야. ‘현재를 지켜.’     


해원의 눈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서류봉투로 향했다. 두 손과 두 눈으로 잡은 봉투는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럼 나는 증명할래요. ‘그런’인간이 아니라는 거.


그 말과 함께 네 딸은 내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이 애가 자칫하면 모든 걸 무너뜨리겠구나, 나는 두려웠다. 네 생명을 붙들고 있는 이 관들처럼 현재를 유지하는 주삿줄과 호흡기를 떼어버릴까 무서웠다.      


그 전에 해원을 목천에서 잠시라도 떼어놓아야 했다.     


궁전빌라에 가서 그 애부터 설득했다. 갓 스무 살이 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좋은 프로그램이 있는데 대학 진학 유무와 상관없이 참여 가능한 아주 좋은 기회라고 했다. 해원이도 지원 자격이 충분하니 네가 잘 설득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애는 정말로 해원을 설득했다. 그 아이가 병원에 입원한 걸 확인한 뒤에야 해원은 짐을 쌌다. 많은 것을 보고 올 테니 그 사이에 건강을 회복하라고 했다. 다녀온 뒤에 책을 내고 수능도 다시 볼 거라고 했다. 그렇게 해원은 6개월 간 해외로 떠났고 그 아이는 병원에서 뒤늦은 치료를 시작했다. 너무 늦었지만. 오빠에게는 나중에 알리려고 했다.


너무 늦었지만.


너무 늦었다. 그 애도, 너도, 병원만 일찍 갔다면, 내가 좀 더 빨리 알아차렸다면, 내가...


달라졌을까.     


나는 해원에게 그 아이의 죽음을 제때 알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네 딸은 절대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엄마인 너에게도 이렇게 반 년 가까이 연락조차 않을 정도로 화를 내고 있으니.

변명하지 않겠다. 사실 네 곁에서 네가 아닌 다른 사람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필요 이상으로 너무 길게 말했다. 오빠 이야기, 그 애 이야기, 해원, 나 자신.      


사실 이건 터무니없이 길어진 하나의 변명이다.     


집중해야 한다. 내가 가진 너의 이야기를, 꽉 쥔 주먹 같은 꽃봉오리 이야기를 반복해야 한다. 사람에게 가장 끝까지 남아 있는 감각이 청각이라고 의사가 말했기에, 이렇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네 엄마를 쓰러뜨린 병이 네게까지 칼날을 들이밀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을 때 나는 울었고 너는 울지 않았다. 네 부탁을 받고 해원을 찾아 전국을 뒤지고 다니면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물을 마시다 울고, 차를 운전하다 신호에 걸리면 울고, 너를 보러 가다 오늘은 울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울었다. 

우는 내 손을 잡으며 너는 말했다.     


해원을, 도와줘.     


그게 너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네가 다시 깨어나지 못하리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눈물이 멈췄다. 

앞으로 내가 흘릴 눈물은 내 안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눈물과 함께 내가 가진 사랑을 모두 흘려보냈으니, 내게 더 이상의 사랑은 남아있지 않다.     


딱 한 번 함께 떠난 제주도를 기억한다.      


둘 다 너무 바빠 귤꽃이 피는 때 가지 못하고 피서객으로 와글와글한 여름 제주에서 너는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신기해했다. 비행기 창밖으로 위엄 있게 환영하는 한라산의 능선을, 검은 돌이 깔린 해변을,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바다 빛을, 무심하게 걸어 다니는 말들을, 오름이 대부분인 제주에 산 모양의 산인 산방산을, 산이 어쩜 저렇게 귀여운 모양이냐고, 저런 모양의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계란을 반으로 자른 것 같아.

용머리해안에 서서 산방산을 바라보며 너는 손을 움직였다. 나무를 다듬고 조립하는 익숙한 네 손동작이 산방산을 어루만졌다. 너의 집을, 우리의 집을 깎아내는 너의 손.


끝끝내 그 손은 내게 닿지 않았다.   

  

나는 말한다,

너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기억나지? 네가 살아보고 싶다던 제주의 산.      


나는 말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은 내가 받은 저주고 업보이고 죄. 한 인간을 네모난 무덤에 가둬 두고 감히 원형의 집을 꿈꾼 죄. 나는 오직 너만을 원했다. 네 안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꽃봉오리들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필연적으로 꽃은 피어야만 하고 그렇게 우리는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피어나리라 낙관했다.    


 나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말한다.


 그곳에 네 무덤을 만들 거야.

 네가 원했던 장소가 네 무덤이 될 거야.

 내가 너의 무덤이 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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